"기존의 정무 중심적 사고와 업무시스템에서 벗어나 융복합적 사고와 정책결정 과정을 정착시키고, 주요 7개국(G7) 선진국 수준의 잣대로 정책 내용을 재점검하며, 정책의 집행 결과가 국민을 안심시키고 민생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시스템 정비와 조직문화, 업무방식의 변화를 유도하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시는가.
'기름장어'의 추억
'글로벌 중추국가'를 지향한다는 동아시아 분단국에서 12일 새 외교 수장이 취임했다. 조태열 외교부 장관이 12일 취임 첫 기자회견에서 밝힌 포부다. 조 장관은 "우리가 처한 대내외적 환경과 시대적 상황을 감안해서 첫째 경제·안보 융합 외교, 둘째 G7플러스(+)시대 외교, 셋째 국민안심 민생외교에 초점을 맞춰 우리 외교 역량을 재정비하겠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외교관의 언어'는 알쏭달쏭한 표현으로 진의를 숨기거나, 모호성을 띠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정부 차원에서 뚜렷한 결정을 내리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의 복심을 흐리되, 상대의 복심을 떠보려 할 때 유용하다. 국익을 추구하는 과정에 나온 '협상의 언어'로 용납된다. 그러나 국민을 상대로 정책을 설명하고 비전을 제시할 때는 다른 언어가 동원돼야 한다. 예를 들어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취임 이후 일관되게 강조하는 '중산층을 위한 외교정책'은 얼마나 명료한가.
외국 기업을 미국에 끌어들여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 미국 중산층의 삶을 부양하겠다는 정책이다. 교육 수준과 무관하게 미국민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법한 언어다. 우리로선 그만큼 한국의 일자리를 미국에 빼앗기는 것이지만, 미국 고위당국자들은 그게 "한미동맹에 좋다"고 우긴다.
공직자의 대언론관은 대국민관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많은 외교관은 언론에 기삿거리를 제공하지 않은 걸 자랑으로 여긴다. 꼬투리를 잡히지 않았다는 자기만족이다. 이 분야의 대가는 '기름장어'로 불린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다. 무언가 그럴듯한 말을 한바탕 내놓기는 했는데 듣고 나서 언론이 건질 게 없으면 성공이라고 자평한다. 그렇지 않아도 미끈대는 장어에 기름칠까지 했으니 얼마나 갈피를 잡기 어려웠겠나. 누가 봉급을 주는지 헛갈려 하는 한국 외교관들의 뒤틀린 대언론관, 대국민관이 낳은 부작용이다.
대국민 메시지는?
국제정세는 탈탈냉전 시대 미증유의 지정학적 변곡점에 처해 있다. 한반도 안팎에서는 어느 때보다 분쟁 위험이 크다. 지난해부터 각국의 고위당국자와 전문가들이 쏟아내고 있는 분석이다. 난국의 한복판에 취임한 외교 수장의 비전은 무엇이고, 그가 국민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관심을 두고 듣고, 읽었지만 당최 졸가리가 잡히지 않았다.
좋은 질문은 많았다. △강제징용 해법과 관련해 일본이 고민하고 있다는 데 어떤 고민을 하고 있나 △시진핑 주석의 방한과 한중 관계 △북러 군사협력과 한러 간 양자관계 관리 방안 △북한의 연초 도발 의도에 대한 평가 △한미 간 투자의 역조에 관한 질문이 제기됐다. 그러나 무엇 하나 제대로 된 답변이 없었다. 거의 모든 질문에 "그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한데, 앞으로 잘 해보겠다"라고 답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제징용 해법과 관련해서는 일본 기업의 선의에 막연한 기대를 내비쳤다. "윤석열 정부의 제3자 변제 해법이 거의 유일한 방안"이라면서 "일본 민간기업도 (한일관계 개선의) 배를 함께 탄다는 마음으로 문제 해결에 동참해 주기를 기대하고, 그런 방향으로 이뤄지도록 노력하겠다"라는 게 답안 골자다. 한중 관계는 "대외 지정학적 환경이 어렵게 만드는 측면이 더 강하기 때문에, 우리 컨트롤(통제) 밖에 있는 문제라서"라며 이중으로 전제한 뒤 "그 환경 속에서 제약 요인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우리 대통령이 베이징에 6번 가는 동안 시 주석이 서울에 한 번도 오지 않은 것에 대해선 "가급적 조속한 시일 내 오시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놓았다.
"노력하겠다" "노력하겠다"
한러 관계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근본적인 요소들이 해소되지 않는 한 어떤 획기적인 관계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며 "그런 가운데서도 안정적으로 관리돼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당초 지난해 가을 이뤄질 것으로 예정됐던 러시아 외교 차관의 방한은 여전히 성사되지 않고 있다. 북러 간 무기 거래가 궁금하다면서 직접 소통하는 외교는 않고, 유엔 안보리를 비롯한 공개적인 자리에서 러시아 비난에 집중해 온 게 우리 외교부의 이상한 '직무유기'다. 조 장관은 "러시아 측 인사가 방한하겠다는 계획은 구체적으로 듣지 못했지만, 상황 개선되는 걸 봐가면서 자연스럽게 이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북한의 최근 도발 의도와 외교부의 역할을 묻는 질문에는 비교적 객관적인 견해를 펼쳤다. "(북한이) 여러 전략적 셈법이 깔려 있겠지만, 금년 들어 새해 포격 사건, 이런 것들은 윤석열 정부 들어 한미일 확장 억제력이 커지고 대북 억제력을 강화하는 우리의 구체적인 노력이 굉장히 가시화되면서 불안감을 느끼는 것 아닌가 한다"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 각료 중에서 북한의 도발 원인의 하나가 한미, 한미일의 억제력 강화 때문임을 인정한 건 조 장관이 처음이다. "(우리의 대응이) 치킨게임처럼 비치는 측면이 있을 수 있지만, 우리가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을 때 (국민이) 느끼는 불안감은 더 클 것"이라고 덧붙였지만, 우리의 강한 대응이 북한의 강한 반응을 일으킨다는 상식적인 평가였다.
외교관의 말은 게임이자 전략이다. 국내 언론과 국민뿐 아니라 외신과 관련국도 오디언스(청취자)이기 때문이다. 주변국의 심기를 결정적으로 건드리지 않으면서 국민에게 뚜렷한 메시지를 전하는 건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쉽지 않은 일을 해내는 게 외교관이 밥을 버는 이유다. 조 장관도 지명 뒤 미국 매파 탓에 호된 통과의례를 거쳐야 했다. 지난달 20일 "한중관계도 한미동맹 '못지않게' 중요하다. 조화롭게 양자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 정도 말에도 미국의 '일개 전직 대사'가 발끈하자 우리 외교부가 서둘러 정정하는 촌극을 벌였다.
해리 해리스의 '탈선'
해리 해리스 전 주한 미 대사가 지난 2일 "우려스럽다"는 반응을 내놓자, 우리 외교부는 4일 미국의 소리(VOA) 방송에 "'못지않다'라는 말은 (한미 관계와 한중 관계가) 동등하지 않더라도, 또한 중요하다는 의미"라고 해명했다. 해리스는 "조 후보자가 한미동맹을 중시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며 한국 외교부의 해명을 '승인'했다. 기울어진 한미 관계의 단면이다. 평소 생각을 내놓았다가 예상치 못한 일격을 당한 조 장관이 발언을 다듬고 깎은 결과가 첫 기자회견의 물에 물 탄 듯한 발언이었는지 모른다.
조 장관은 청록파 시인 조지훈(본명 조동탁)의 아들임을 자랑으로 여겨왔다. 현역 외교관으로 사실상 마지막 보직이었던 유엔개발계획 집행이사회 의장을 마치고 2019년 이임에 앞서 가진 뉴욕 특파원 간담회에서 "세상에, 또 아버지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되기 위해 살아왔고, 아버지에게 누 끼치지 않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살아왔다"고 술회했다. "우리가 가진 문화 역량에 대한 국민적 자긍심을 확산시키는 것도 국민을 위하는 일"이라는 취임사의 한 대목이 각별하게 다가온다.
조 장관의 40년 외교관 경력은 경제통상과 유엔을 비롯한 다자외교에 집중됐다. 취임 일성은 지극히 애매했지만, 외교부 수장으로선 더 이상 애매하지 않길 바란다. 혼돈의 시대 양자 외교 무대에서도 '균형 잡힌 소신'을 펼쳐나갈 것을 권한다. 스스로 희망한 '제법 언론을 가까이 한 장관'은 디폴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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