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상식적인 사실이 새삼 뉴스가 되는 것은 그만큼 현실이 비상식적이라는 방증이다. 한미가 추구하는 북한 핵문제의 궁극적인 해법은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이다.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어떤 경로로 목적지에 이를 수 있을까. 어떤 형식으로든 해법을 찾는 모색은 이러한 고민에서 출발해야 한다. 상식이다. 경로와 방법이 빠진다면, 정책적 목표라기보다 '희망사항'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북한 비핵화를 위한 '중간 단계 조치' 또는 '잠정적인 조치(interim steps)'가 필요하다는 뉴스 아닌, 뉴스가 잇달아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정 박 미 국무부 대북고위관리는 5일 "비핵화는 하룻밤에 일어나지 않으며 궁극적인 비핵화에 도달하기 위해 취해야 할 단계가 있다. (다만) 중간 조치를 최종 단계로 예단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날 카네기 국제평화재단 워싱턴 사무소가 '북한의 전략적 변화 속에서 미국 정책 이해하기'를 주제로 연 세미나에서 이같이 밝혔다. 그러면서 한국 내 일각에서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동결'과 '군축회담'에 대한 질문은 한사코 피했다.
박 대북고위관리는 '중간단계 조치에 (즉각적인 CVID가 아닌) '동결'이 포함되느냐'는 질문에 즉답을 피하면서 "전술핵무기와 (미사일의) 고체연료 및 극초음속 능력, 무인 잠수정 등 북한 무기 관련 활동과 확산의 범위를 생각할 때 우리가 (협상에서) 다뤄야 할 무기가 많다는 점을 인정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북한이 핵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미국은 미사일 숫자 제한을 비롯한 군축 목표를 달성하는 데 열려 있느냐'는 질문에도 "우리의 목표는 분명하다. 그것은 한반도 비핵화"라고 에둘러 답했다.
그가 분명히 밝힌 것은 대화와 외교를 통한 해법 모색이라는 원칙뿐이었다.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를 달성하는 유일한 길은 대화와 외교이며, 이를 위해서 어떤 직급에서건 관심 사항에 대해 전제조건 없이 대화를 재개하고 싶다는 메시지를 북한에 계속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박은 최근 통일 관련 기구·단체를 해산하고 대한민국을 제1의 주적으로 선포한 북한의 최근 움직임에 대해 "우리는 김정은이 장기적, 전략적 변화를 취하고 있다는 분석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북한과 군사협력을 고도화하는 러시아와 북한 대외교역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중국 등 두 개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있음을 지적했다. 북·러 간 미사일과 포탄 거래 및 군사기술 이전을 거듭 부각시켰지만, 러시아에는 아무런 주문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에 대해서는 "유엔 대북 제재의 완전한 이행과 북한에 대한 대화 촉구, 역내 안보에 해로운 활동 자제 등의 건설적 역할을 해주기를 권한다"고 말했다. 북한이 사이버 (해킹) 활동과 정보기술(IT) 기술자와 노동자 파견 등으로 얻는 수익과 관련, "일각에서는 10~20억 달러로 추정하고 있다"면서 "북한의 위협이 진화하면 우리도 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북한 핵문제 해결과 관련한 이날 박의 발언은 미 행정부 차원에서 언론용으로 준비해 둔 지침(press guidance)이라기보다 상식적인 말이었다. 박에게 이런 질문이 제기된 것은 전날 서울에서 "북한과 비핵화를 향한 중간단계 조치를 논의할 용의가 있다"라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당국자의 발언에서 비롯됐다. 미라 랩후퍼 NSC 동아시아·오세아니아 담당 선임보좌관이 4일 중앙일보-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포럼에서 "미국의 목표는 여전히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임을 확인하면서 "그러나 만약 역내와 전 세계를 더 안전하게 만들 수 있다면 비핵화를 향한 중간조치도 고려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고 중앙일보가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미 관리들은 '북한 비핵화'가 아닌, '한반도 비핵화'라고 표현했다.
북핵 해법과 관련한 박 대북고위관리와 랩후퍼 보좌관의 발언이 지극히 상식적인 이유는, 1990년대 초 북핵 문제가 시작된 뒤 30여 년 동안 단계적 해결방안에 대해서는 이미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단박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긴 하다. 전쟁을 통한 해결이다.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2017년 10월 27일 미 하원의원의 공개질의에 서면답변을 통해 "북한 핵프로그램의 모든 구성요소를 포착, 완전하고 확실하게 파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지상군 공격뿐"이라고 밝힌 바 있다. 2000년대 중반 북핵 6자회담 당시 크리스 힐 국무부 차관보를 비롯한 미국 관리들은 달리던 자동차(핵활동)가 역진하려면 일단 멈춰 선 뒤(동결한 뒤) U턴을 해야 한다"는 설명을 여러 차례 내놓았었다.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당시만 해도 비록 단계를 설정할지언정 비핵화 문제 해법을 추구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후 5년 동안 북한의 핵무기 및 핵 운반수단(미사일) 능력이 훨씬 고도화한 상태에서 단박에 CVID를 논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게 알려진 비밀이다. 그럼에도 미국 관리들이 '잠정조치'라는 표현을 내놓은 것은 일부 한국민과 한국 보수 정부의 거부감을 감안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윤석열 정부는 북한의 핵, 미사일 위협에 일일이 맞대응(tit-for-tat)하면서 강력한 응징 의지를 내보임으로써 북한에 군사적 도발의 비용이 막대함을 인식시키려고 애써왔다. "북한의 핵, 미사일 위협에 100배, 1000배 대응하라(대통령 작년 1월 국방부 업무보고 발언)"는 호언과 '힘에 의한 평화'라는 장담이 그것이다. 이는 한국민에게 북핵 문제가 단박에 해결될 수도 있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그럼에도 박과 랩후퍼의 발언이 뉴스가 된 것은 그만큼 한국 내에서는 누구도 북핵 해법에 관해 진지한 발언도 내놓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김건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4월 총선에 여당 후보로 나가겠는가.
물론 미국이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는 북한과의 '조건이 없는 대화'는 공허한 수사에 불과하다. 북핵의 '선(先) CVID'를 전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면전을 할 능력과 의지가 있지 않다면, 빈말이라도 대화 제의를 해야 한다. 작년 4·26 한미 '워싱턴 선언'과 8·18 한미일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의 공동성명에서 합의한 사항이기도 하다. 미 당국자들의 상식적인 발언이 한국에서 뉴스가 되는 것은 그만큼 한미 , 특히 한국 정부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현실을 고스란히 내 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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