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 전문가 그룹이 부처를 장악한 집권 엘리트와 서로 조율, 협업하면서 국익을 극대화해야 하는 데 이 과정이 왜곡됐다. 외교부는 전문가적 입장에서 의견을 내지 않는다. 여기서 영합하는 사람만 출세하기에 그 방향으로만 적극적이다. 전문가 집단의 역할이 갈수록 퇴보, 축소됐다. 지금 외교부는 아무것도 아니다."
위성락 더불어민주연합 비례대표 당선인(69)의 오랜 소신은 한국 외교의 선진화다. 2020년 칼럼집 <한국 외교 업그레이드 제언>의 머리말과 1장에서 내놓은 화두다. 위 당선인은 4.10 총선 뒤 활발한 언론 접촉을 통해 윤석열 정부 외교 실책에 따끔한 지적을 내놓고 있다. 언론의 인터뷰 요청이 많은 건 그만큼 당선인에 대한 기대가 높음을 반영한다.
외교 관료 출신 국회의원은 여럿 있었지만, 위 당선인의 이력은 다소 독특하다. 직전 대선에서 이재명 민주당 후보 캠프의 자문역을 했고, 제22대 국회의원 당선인이며, 다음 대선에서도 일정 정도의 역할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시민언론 민들레>가 위 당선인을 만난 것은 본인이 강조해 온 '외교 선진화'의 구체적 복안을 듣는 한편, 정치인으로서 또 야당의 정책통으로서 이를 어떻게 구현할지에 대한 포부를 듣기 위해서다. 최근 여러 언론이 소개한 '논평가 시각'을 지양한 까닭이다. 그는 외교부에 36년 재직하면서 한반도 평화교섭본부장과 러시아 대사를 지냈다. 인터뷰는 지난 20일 서울 종로구 위 당선인의 사무실에서 있었다.
한국 외교 선진화
그는 "외교안보 이슈를 당파적 목적에 종속시키다 보니 정작 국익이 잊히는 경우가 많다"라면서 "이러한 문화를 바꾸는 데 정치권에서 역할을 할 생각"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구체적으론 "외교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의원 연구모임을 운영하면서 의제를 던지고 싶다"고 덧붙였다. "야당의 외교안보 대안을 풍성하게 하면서 그 과정에서 제1야당의 지도자가 더 좋은 외교 대안을 내는 데 힘을 보탠다면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라고도 말했다.
'한국 외교 업그레이드' '초당적 분위기' '국익 중심의 외교' 등 당선인이 설파해 온 외교 개혁의 문제를 다루려면, 외교의 주체인 외교부의 개혁이 전제돼야 한다. 모두에 소개한 것은 외교부에 대한 그의 매서운 비판의 일단이다. 당선인은 수십 년 외교 현장을 누빈 외교부 전문가 그룹과 집권 엘리트의 관계가 왜곡돼 국가적 망신을 당한 대표적인 사례로 부산 엑스포 유치전을 들었다. "전문가 집단이 권력 엘리트와 어떤 협의, 조율 과정이 없이 그냥 같이 하니까 처참한 결과를 빚고도 아무도…"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전문가 그룹과 집권 엘리트가 모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다.
36년간 봉직한 친정에 대해서는 애증이 엇갈렸다. '외교부를 비롯한 관료집단이 갈수록 몸을 사리는 것 같다'는 질문에 "외교부가 너무 오랫동안 소외돼 처지가 곤궁하게 됐다는 약간의 동정심이 있다"라면서도 "굳이 옹호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이어 "박근혜-문재인 정부 10년이 외교부 자체 개혁의 기회였다"고 짚었다. "최초로 외교부 출신이 캠프를 거쳐 권력 엘리트로 돌아와 각각 5년 동안 부처를 명실공히 관장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전에는 외교부 출신이 부처에 돌아오더라도 권력의 간택을 받아 2~3년 '바지 사장'을 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 10년 동안 외교부 직원들이 힘을 키우고, 외교 정책 결정 과정에 역할과 기여를 많이 하며, 외교 기반을 강화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약화시켰다"는 평가다. "지금 외교부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탄식이 나온 배경이다.
외교관 시절 상부에 숱한 건의를 내놓아도 결국 실행되지 않은 데 따른 '굉장한 좌절'이 한국 외교의 선진화를 구상하게 된 계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선인은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과 돈바스 지방 소요 탓에 서방이 대러시아 제재를 가했던 시절 러시아 대사로 재직했다. "외교부도 있지만 외교부는 대통령실(청와대) 아래 있다"라면서 "러시아에 있을 때 '운신의 폭'을 갖자며 수십 번 건의해도 정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라고 회고했다.
의정활동 계획
2015년 외교부 퇴임 뒤 칼럼니스트로 또 대학 강사 생활을 해 온 그는 관료, 학계, 언론, 정치 등 4개의 행위자를 경험했거나 곧 경험한다. 여기에 집권 엘리트와 시민단체를 추가하면 바로 그가 <한국 외교 업그레이드 제언>에서 한국 외교의 선진화를 막는 주역으로 열거한 6대 행위자가 된다. 현역 시절 정파적 관점과 언론 역할에 특히 아쉬움을 많이 토로했던 당선인이다.
그는 의정활동과 관련해 "자꾸 문제를 제기하고, 정부를 견제, 만류하는 활동을 통해 정부에 여론의 압박이 전해지는 것"을 1차 목표로 삼았다. "대미 관계를 강화하고, 대일 관계를 개선하는 건 옳은 방향인데 중국과 러시아의 반작용에 대한 대응 방략이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그는 "총선 이후 정부가 중국, 러시아에 대해 전과 다른 톤으로 대처하는 것 같다'라면서 '선거 결과와 민심, 민주당의 움직임 등의 정치적 과정이 정부의 외교에 영향을 미친다"라고 지적했다. "정부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이미 바뀌고 있다"는 평가다. "현 정부가 강력한 네오콘(신보수주의자) 성향이기 때문에 좀처럼 듣지 않을 것"이라면서 "해서 상당한 압력을 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큰 방향성과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데 머무르려고 한다"라면서 스스로 역할을 제한했다.
'국회 다수당이자 제1야당으로 국민적, 국가적 의제를 제시할 수도 있지 않나'라는 질문에 "이론적으론 가능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차기 대선에 접근하면서 당이 좀 더 가지런해질 시점에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 당내에는 문재인 정부적 흐름과 이재명 대표적 흐름도 있어 가지런하지 않다"라는 이유에서다.
'입법이나 의정활동을 통해 외교부 직원들이 소신을 갖고 일할 제도적 장치를 만들 수 있지 않나'라는 질문에 "그럴 생각은 있다"라면서도 주로 이종섭 호주대사 파문에서 비롯된 공관장 인사 파행에 대한 의견을 내놓았다. "업적과 자질을 토대로 대사를 지명하는 게 필요한데 지금은 학교 동창이나 누구를 마구잡이로 시켜도 되는 자리가 됐기 때문"이다. "꾸준한 문제 제기로 외교부 스스로 누구를 임명하면 야당에서 엄청 시끄러울 수 있다는 인식을 갖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은 외교가 위태로워져 (국민과 기업의) 경제활동이나 민생까지 어려워진 국면"이라는 진단을 보탰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두 국가' '두 민족'을 말한 지금, 민주당의 전통적인 대북포용정책을 업그레이드할 필요'에 대해서는 "대북 억제력은 필요한 만큼 가져야 하지만, 동시에 협상과 대화가 있어야 한다"라는 모범답안을 내놓았다. "민주당은 대북 대화-압박 기조를 취하면서 핵, 미사일 문제와 관련한 저간의 변화를 정책 수립 과정에 반영해야 한다"라면서 "미·중 경쟁 심화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미·러 관계도 살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제1야당 대표의 외교안보 발언 리스크 관리에 대해서는 "당대표는 현재 당조직의 보좌를 받고 있다'라면서 향후 외교통일위원회에 가면서 "(당대표가) 조금 더 대외관계 소통에 관심을 기울이게 해볼 생각"이라고 답했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중산층을 위한 외교정책'처럼 유권자가 체감할 수 있는 의제 설정의 필요성에 대한 질문에는 다소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우리 같이 중급 규모의 국가는 국민적 이익을 내걸어도 미국과 달리 시행할 힘이 없다"라면서 "분단되고 사방에 (강대국으로) 둘러싸인 엄중한 지정학적 여건에서 오는 외적 변수를 놓고 국익을 계산한 다음에 국내적 의제를 맞출 수밖에 없다"라는 것이다.
한국형 외교모델과 한러 관계
한·러 관계의 현주소에 대한 평가는 서늘했다. "중국만큼 압도적 문제는 아니지만, 당장 닥친 문제로 러시아 문제가 더 긴박하다"라면서 "러시아 외교 스타일이 외교, 군사, 정보, 공작을 다 묶어서 바로 치기 때문이다." 6월 중 첫 국회 토론회로 러시아 문제를 다룰 예정이다.
"러시아의 우크라 침공 이후 대러 제재 압박 연대에 한국이 가담하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한반도 비핵화-평화 정착-통일이라는 독특한 지향을 가진 나라로서 미국이나 호주, 영국과 똑같이 제재할 수는 없었다"다는 게 한·러 관계 악화에 대한 원인 진단이었다. 그는 "어느 정도 미국과 협력하고, 어느 만큼 대러 외교 공간을 확보하는 전략적 사고가 필요하다"라면서 '일본 모델'을 예시했다. 그가 설명한 일본 모델은 미국이 요구하면 제재 속으로 깊숙히 들어가 미국의 신뢰를 얻지만, 제재가 북방 4개섬 문제와 같은 자신들의 핵심 의제에 악영향을 주면, 미국의 양보를 끌어내는 방식이다. "왼쪽, 오른쪽으로 꿈틀거리면서 운신의 폭을 갖는 역동적인 외교 모델"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한국 외교는 정적이고, 수동적이다. 미국이 요구하면 러시아의 눈치를 보며 마지못해 따라가고, 일단 따라간 다음에는 좀처럼 역행하려 하지 않는 외교'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한국도 제재가 북한 비핵화라는 우리에게 중요한 의제에 역행하면 미국을 설득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미·중·러가 한반도 비핵화에 공감대를 갖기는커녕 무한 핵 경쟁에 돌입한 국제정세 속에서 한국의 좌표와 관련한 질문에는 "미·중, 미·러가 다른 문제에서는 으르렁거리더라도 북한 비핵화 문제에서는 협력할 수 있도록 떼어내는 노력을 벌이는 게 한국 외교의 과제"라고 말했다. 라인야후 사태와 관련해서는 "기업의 경영권 다툼과 별개로 일본 정부가 자본관계 재검토를 말한 대목은 우리 정부가 더 일찍 개입했어야 했다"라면서 "과학기술부가 나설 문제가 아니라 외교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세한 인터뷰 내용은 일문일답으로 대신한다.
위성락 국회의원 당선인 일문일답
-우선 당선을 축하드린다. 외교관 출신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몇 명 있었다. 의정활동의 좌표를 어떻게 설정하고 계시는가.
"지역구 의원으로 정치를 이어갈 생각은 없다. 우리 외교를 수준 높은 선진외교를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여기까지 왔다. 그 과정에서 야당의 외교 대안을 풍성하게 강화하는 데 역할이 있을 것 같다. 당장의 문제의식은 지금 우리 외교 환경이 위태롭고 취약해졌다는 점이다. 그걸 견제, 제어하고 막는 게 첫째다. 그다음, 야당의 외교 안보 대안을 더 풍성하게 하면서 그 과정에서 제1야당 지도자가 더 좋은 외교 대안을 내는 데 힘을 보탠다면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외교의 개선을 주장해 왔다. 국회에서 그걸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
"신냉전 비슷한 상황이 된 지금, 우리 외교의 주변국 관계가 굉장히 어그러졌다. 한국 외교의 수준은 국력에 비해 너무 낮다. 국력과 외교가 이처럼 괴리를 보이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할 것 같다. 외교안보 이슈를 국내적 당파 목적에 종속시키는 사례도 아주 많다. 그러다 보니 외교를 당파를 위한 행정, 의전. 행사로 끌고 가고, 국익은 잊히는 경우가 너무 많다. 이러한 문화를 바꿔 가는 데 정치권에서 역할을 하겠다는 생각이다. 초당파성을 강조하고, 그런 모임도 운영하면서 의제를 던지고 싶다. 구체적으로 외교 인프라를 강화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가령 '경제안보시대'라는 데 이를 제대로 다룰 조직이나 체계가 있는지, 살펴볼 생각이다. 미시적 문제이지만, 공관장 특히 특임공관장을 운영하는 데 자의적이고 정파적으로 운영하는 사례가 많다. 이종섭 씨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런 것을 포함해 개혁적인 의제를 던질 생각이다."
-'한국 외교 업그레이드' '초당적 분위기' '국익 중심 외교'. 다소 추상적인 것 같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중산층을 위한 외교정책'처럼 이해하기 쉬운 말로 표현한다면.
"우리는 초강대국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국내 이익을 너무 전면에 내세울 수 없다. 미국도 자기네 중산층을 내세우면 무리가 된다. 장기적으로 통할지, 역효과가 날지 미지수다. 그럼에도 미국은 일단 시동을 걸고, 시행할 힘이 있다. 우리 같은 중급 규모의 국가는 민생이나 중산층, 서민이나 우리의 국민적 이익을 전면에 내걸고 시행하기가 어렵다. 국제 구도가 (먼저) 우리에겐 압도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외적 요인을 놓고 어떤 게 국익인가 계산한 다음에 우리의 민생이나 국내적 의제를 맞출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정치의 본질은 유권자들의 필요를 충족해 주는 게 아닌가? 그 이전에 외적 요소를 살펴본다는 게 민주주의 국가에선 다소 의아하다.
"물론 유권자의 이해관계가 더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 같이 분단 되고 사방에 둘러싸인 엄중한 지정학적 여건에 있는 나라는 (그걸 내세우면) 작동하지 않게 되어서 국익에 더 큰 피해를 볼 수 있다. 어쩔 수 없는 한국의 여건이다."
-국회의원들은 주로 주무부처 장, 차관을 불러 호통치고, 자기 말만 하는 걸 의정활동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제1야당의 외교적 의제가 국민 피부에 와닿게 할 방법은 없겠는가.
"보여주기 식을 넘어서야 한다. 자꾸 문제를 제기하고, 정부의 치우친 외교나 위태롭게 된 한반도 상황을 개선하려는 노력, 견제하고 만류하는 활동을 해야 한다. 그렇게 의제를 던지고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정부에 여론의 압박이 전해지길 기대한다. 우리에게 다가온 최대 아젠다는 미국 관계를 강화하고, 일본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다. (위 당선자는 한미일 캠프 데이비드 합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해 왔다) 이건 옳은 방향인데 그게 초래하는 중국과 러시아의 반작용이 당연히 있지 않나. 대응 방략을 갖고 있어야 했는데, 없었다. 4-10 총선에서도 그에 대한 국민적 불안이 반영됐다고 생각한다. 총선 이후 정부가 중국과 러시아에 대해 전과 다른 톤으로 대처하는 것 같다. 예전엔 (문제를 제기하면) 화를 내면서 '미국과 관계 강화하는 데 뭐가 문제가 있느냐'고 강변했다. 지금은 그렇게 얘기 안 한다. 선거 결과와 민심, 민주당의 움직임, 이런 정치적 과정을 통해 정부 외교에 영향을 미친다. 정부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이미 바뀌고 있다. 거대한 정치적 작용과 반작용의 일환이라고 본다. (국회에서) 대안을 구체적으로 내놓지는 않을 거다. 그건 정부가 할 일이자, 우리가 집권한다면 할 일이다. 큰 방향성과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데 머무르려고 한다. 현 정부가 강력한 네오콘(신보수주의) 성향이기 때문에 좀처럼 듣지 않을 거다. 해서 상당한 압력을 가해야 한다. 여론이 받쳐줘야 한다."
-정부 외교안보 정책의 잘못을 질책하고 중국, 러시아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건 야당의 당연한 책무가 아닌가. 제1야당이자 다수당으로서 국민적, 국가적 비전을 제시할 수도 있지 않나 싶다.
"이론적으론 가능하다고 본다. 다만 지금은 아니다. 대선에 좀 더 근접한 시점에 나올 수 있을 거다. 지금 야당 내에는 문재인 정부 적 흐름도 있고, 이재명 대표 적 흐름도 있다. 차기 대선에 접근하면서 좀 더 가지런해질 시점에 생각해 볼 수 있다."
-<한국 외교 업그레이드 제언>이라는 책 서문에서 한국 외교가 5대 수렁에 빠져 있다면서, 집권 엘리트-관료-정치인-언론-학계-시민단체 등 6대 행위자가 역할을 하지 않다고 진단한 바 있다. 외교관 재직 시절 특히 정파적 관점과 언론의 역할에 아쉬움을 많이 토로했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제 당이라는 정치적 배경이 생겼다. 물론 (당 내부가) 다양하기 때문에 한곳으로 모아가기는 이른 것 같다. 그걸 전제하더라도 이 속에서 한국의 고질적 문제에 대처해야 한다. 내부적으로 공감대를 모아가는 일이 필요하고, 언론과 소통을 많이 하겠다. 일-북 관계라면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이후 북한과 일본의 생각이 대략 이렇고, 일-북의 상호작용이 흘러갈 경로의 범위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게 없으면 경쟁 구도에 있는 언론은 단편적 정보를 엮어서 엉뚱한 곳으로 간다. 진실에 기반한 소통과 교감을 많이 해야 한다."
-외교의 선진화가 외교의 주체인 외교부의 개혁이 없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박근혜 정부 이후 직권남용이 화두가 되면서 공무원들이 더욱 몸을 사린다.
"비슷한 비판 의식을 갖고 있다. 말을 많이 안 하는 건, 외교부가 너무 오랫동안 소외돼 처지가 곤궁하게 됐다는 약간의 동정심이 있어서다. 옹호할 생각은 없다. 집권 엘리트와 오랫동안 현장에서 일해 온 (부처 내) 전문가 그룹이 서로 조율하면서 국익을 극대화해야 하는 데 이 과정이 왜곡돼 있다. 집권 엘리트는 위에서 찍어 내리려 하고, 외교부는 전문적 입장에서 의견을 내지 않는다. 여기서 영합하는 사람만 출세하기에 그 방향으로만 적극적이다. 수십 년 노하우를 내놓기는커녕 지시 사항만 따라간다. 경제 부처는 약간 다르다. 파워 엘리트가 들어와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약간의 협업구조가 있다. 연속성 담보하거나, 전문성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있다. 외교부는 그런게 약한다. 해서 누구라도 장관이 될 수 있게 돼버렸고, 전문성도 중요하지 않게 됐다. 전문가 집단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일이 잘못되면, 권력 엘리트들이 스스로 돌아보게 해야 한다. 부산 엑스포를 보시라. (외교부 전문가 집단이 권력 엘리트와) 그냥 같이하다 보니까, 처참한 결과를 낳고 아무도…. 전문가 집단의 역할이 갈수록 퇴보, 축소됐다."
-외교부의 자체 개혁 기회는 없었는가.
"외교부만 놓고 보면, 박근혜-문재인 정부 집권 기간이 기회였다. 최초로 외교부 출신이 캠프를 거쳐 권력 엘리트로 돌아왔다. 정권의 신임을 갖고, 5년 동안 외교부를 명실공히 관장했다. 그전에는 외교부 출신이 돌아오더라도 권력의 간택을 받아 2~3년 '바지 사장'을 하다가 나가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그 10년 동안 외교부 직원들이 힘을 키우고, 한국 외교정책 결정 과정에 역할과 기여를 많이 했느냐, 외교 인프라가 강화됐느냐. 아니다, 지속적으로 약화됐다. 지금 외교부는 아무것도 아니다."
-국회 차원에서 입법 활동이나 의정활동을 통해 외교부 직원들이 소신 있게 일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만들 수도 있지 않나 싶은데.
"그럴 생각은 있다. 업적과 자질을 토대로 대사를 지명하는 게 필요하다. 지금은 무슨 학교 동창이나 누구를 마구잡이로 시켜도 되는 자리가 됐다. 꾸준히 문제 제기해야 하는 문제다. 외교부 스스로도 누구를 임명하면 야당에서 엄청 시끄러울 수 있다는 인식을 갖도록 해야 한다. 외교부만이 타겟은 아니고 그 위에 대통령실이 있고, 파워 엘리트가 있으니까. 전체적으로 외교활동을 잘 못했을 때 그 책임을 지게 해야 한다. 지금은 외교가 위태로워져서 경제활동이나 민생까지 어려운 국면이다. 두 번 세 번 생각하고 신중하지 않을 수 없도록 여건을 만들어 가야 한다."
-야당 대표의 외교안보 발언 관련 리스크 관리가 안 되는 것 같다. 이제 '사이다 발언'으로 대중의 관심을 끄는 일개 야당 정치인이 아니다. 직전 대권주자였고, 현 야당 대표이며, 3년 뒤 대권주자일 수 있다. 보좌, 자문 시스템이 필요한 것 같다.
"당대표는 기존 당조직의 보좌를 받고 있다. 제가 외통위에 가고 역할을 하면 더 소통이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조금 더 대외관계 소통에 관심을 기울이게 해볼 생각이다. 아직 대표를 보좌하는 처지가 아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두 국가, 두 민족을 말하면서 남북 간 정치적 대화는 물론, 경제, 스포츠 분야의 교류도 끊어졌다. DJ 이후 이어져 온 대북 포용 정책을 업그레이드해야 하지 않나 싶다.
"북한은 핵을 놓지 않으려는 기류다. 남북 교류협력의 반작용이 너무 많다는 생각에 남쪽을 끊어버리려고 한다. 신냉전을 유리한 국면으로 판단, 저쪽 진영(중국, 러시아)에 들어가면 체제보장이 확실하다고 판단하는 게 아닌가 싶다. 이걸 방치하면 비핵화-평화 정착-통일 추구라는 우리만의 의제가 불가능해진다. 대북 억제력은 필요한 만큼 가져야 하지만, 동시에 협상과 대화가 있어야 한다. 민주당은 대북 대화-압박 기조를 취하면서 핵, 미사일 문제와 관한 저간의 변화를 정책 수립 과정에 반영해야 한다. 미․중 대립과 경쟁이 심하다는 점, 우크라 전쟁 이후 미·러 관계도 감안해야 한다. 나부터 고민의 지점이 거기에 있다."
-북한이 응하지 않는 한 대화할 방도는 없지만, 우리로선 대화 용의가 있다는 신호를 계속 보내야 하지 않나.
"시그널을 계속 던지면서 여지는 남겨야 한다. 결국 (북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주변 여건이 바뀌는 걸 기다려야 한다. 지금 중국과 러시아는 갈수록 역기능을 한다. '의도하지 않은 결과'다. 중-러가 작당해서 안보리 대북 제재위 전문가 패널을 깨는 역설적 상황이다. 제재 체제가 무너졌으면 그 결과가 초래된 이유를 고민해야 하는데, 지금 윤 정부는 안 하고 있다. 미-중이 공급망을 비롯한 다른 분야에서는 으르렁거리더라도 한반도 비핵화 문제는 공조 영역으로 떼어내야 한다. 북핵 6자 회담 초기로 돌아가면, 중-러, 특히 러시아가 북한 비핵화에 훨씬 더 전향적이었다."
-6자 회담 당시와 달리 지금은 미-러 간, 미-중 간 비핵화 공감대는커녕 핵 군비통제의 고삐가 풀려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최소한의 위기관리도 못 하고 있다. 러시아는 이미 작년 4월 한국의 비우호적 행위에 대해 "한반도 문제에서 한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협력하지 않을 수 있다"고 밝혔었다. 러시아가 유엔 안보리 1718위원회 전문가 패널에 거부권을 행사하기까지 우리 외교는 11개월간 손 놓고 있었다.
"(우리 외교가) 미숙한 건 사실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압도적인 악재 탓에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은 인정한다. 그 속에서도 관리할 공간이 나왔는데 아무것도 안 했다. '한미 동맹을 강화하면 우리 입지가 좋아지기 때문에 중․러를 대하기가 더 쉬워진다'라는 단순한 논리에 매몰돼 있었다. 사실 지금 한-러 관계가 최악이 된 것은 '예고된 살인'이었다. 러시아가 어떻게 대응할지 알면서 그대로 간 거다. 중국만큼 압도적 문제는 아니지만 당장 닥친 문제로는 러시아 문제가 더 긴박하다. 러시아 외교 스타일이 외교-군사-정보-공작을 다 묶어서 바로 치기 때문이다. 6월 중 첫 국회 토론회로 러시아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
-미-러, 미-중 간 핵전력 경쟁 추세를 우리가 바꿀 수는 없을 것 같다.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위치설정을 해야 하나.
"우리로서는 북한 핵문제에 대한 대처로부터 출발, 좀 더 넓혀가야 한다. 미-러, 미-중 협력이 생기도록 하고. 그걸 하다 보면 미-중, 미-러의 전술핵, 전략핵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지 않겠나. 한반도 비핵화에 초점을 두고 미·중, 미·러 협력 필요성을 제기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야당이 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지만, 한국 외교가 해야 할 역할이다."
-우크라 전쟁은 끝물이지만, 언제 끝날지 모른다. 올해 내 종전이 돼도 서방에선 지난 2년여 동안 반러 정서가 제도화한 것 같다. 한․러 관계 개선을 위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무엇이라고 보시는가.
"우크라 침공 이래 러시아에 대한 제재, 압박 연대에 한국은 가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제재의 명분과 가치에 동참하지만, 한반도 비핵화 평화 정착, 통일이라는 독특한 지향을 가진 나라로서 미국이나 호주, 영국과 똑같이 할 수는 없다. 한국형 전략 좌표를 갖고 미·러 사이에서 어느 정도 미국과 협력하고, 어느 만큼 대러 외교 공간을 확보하는 전략적 사고가 필요하다. 일본은 일본형 외교가 있고, 인도 인도형 외교가 있다. 이게 없는 상태에서 중국, 러시아와 대화를 해도 겉돈다. 중국은 대화 자리를, 한국을 훈계하는 자리로 여길 거다. 미-중-러 사이에서 큰 방향을 잡고, 우리의 보수-진보 정부에 따라 미세 조정하는 게 필요하다. 그래야 대중, 대러 관계에서 '전략적 안정성'이 이뤄진다. 일본은 일본형 외교가, 인도는 인도형 외교가 있다."
-일본형 외교 모델은 어떤 것인가.
"우리보다 훨씬 역동적이다. 우선 대미 공조 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 러시아 제재를 충분히 한다. 미국의 신뢰를 얻은 뒤 북방 4개 섬 문제와 같은 자신들의 핵심 아젠다에서 미국의 양보를 받아낸다. 독일도 마찬가지다. 왼쪽, 오른쪽으로 꿈틀대면서 미․러 사이에서 활동 공간을 열어 간다. 한국 외교는 정적이다. 가만히 있다가 미국이 제재 요구를 하면, 러시아 눈치를 보면서 마지못해 조금 하고, 다시 가만히 있는다. 러시아 대사를 할 때 러시아의 (20014년) 크림반도 병합이 있었다. 한국은 미국의 압박에 마지못해 제재에 들어갔지만, 제재 행위는 별로 하지 않았다. 그다음에는 미국이 두려워서 러시아가 원하는 걸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러시아 사람들이 처음에는 우리가 제재를 많이 안 한다며 고마워하면서 제재를 깊이 한 일본을 비난했다. 그런데 한 1년 지나니까 한국을 더 비난했다. 일본은 제재를 많이 하더라도, 필요할 때 러시아와 할 일은 하는 식이었다. 한국은 수동적이다. 미국이 압박하면 따라가고, 압박 안 하면 그대로 있는다. 우리 국익을 중심에 놓고 어떨 때는 제재를 더 하고, 어떨 때는 러시아로부터 필요한 걸 받아내야 한다."
-바로 그런 발상과 행동을 정부 내 어느 부처에서 해야 하나.
"외교부도 있지만, 외교부는 대통령실 아래 있다. 박근혜 정부 때 청와대에 외교부 출신들이 많았는데도 안 하더라. 지금도 활동하는 분이 계셔서 이름은 밝히지 않겠지만. 러시아에 있을 때 그런 애로가 많았다. 건의를 수십 번 해도 안 됐다. 엄청난 건의를 한 건 아니었다. 운신의 폭을 갖자는 거였다. 그런데 정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굉장한 좌절이었다.
-일본과 유럽 국가들은 아직도 러시아산 천연가스와 원유를 수입하고 있다. 한국은 러시아에 카레이스키 동포 20만 명을 두고 있다. 대러 제재 참가 49개국 중 어느 나라가 이러한 동포 문제를 갖고 있나. 그걸 명분으로 최소한 서울~모스크바 직항 노선이나, 서울~블라디보스토크 직항이라도 복원해야 하지 않나. 한국은 일본이 하지 못한 155㎜ 포탄 우회 지원을 하고 있다. 러시아는 또 한-러 비자면제협정을 여전히 높이 평가하고 있다.
"우리는 북한 비핵화가 중요하다. 대러 제재 압박이 북한 비핵화에 역행하면 우리도 미국에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비자면제협정은 러시아 대사 재직 중 한 거다. 스스로 업적으로 평가한다. 서방 선진국은 물론 중국도 러시아와 비자면제협정이 없다. 러시아 사람들은 '비자면제협정이 30년 관계의 이정표'라고 평가했었다. 우크라 전쟁만 없었으면 한러 인적 교류가 연간 100만 명이 됐을 거다. 우리만 갖고 있는 특장인 비자면제협정과 많은 고려인의 존재, 북한 비핵화라는 사활적 이해관계를 갖고 필요할 때는 예외 조치를 끌어내는, 운신의 폭이 있어야 한다."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이 최근 자리를 옮긴 러시아 연방 안보협의회 구성원에는 두마와 상원 의장들도 포함돼 있다. 국회 차원에서 대러 외교에 나설 때 통로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럴 수도 있겠다."
-언론 인터뷰에서 푸틴 대통령이 올해 중 방북하면 2000년 북러 친선-선린-협조에 관한 조약의 개정 가능성을 언급했다. 북․러는 종래의 '자동 군사개입 조항'을 폐지하고, 안보 위기 시 '협의-협력' 규정으로 대체했다. 한․미 상호방위조약 수준이다. 이걸 수정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인가.
"약간의 업그레이드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냉전 시대 동맹까지는 아니더라도, 표현을 다소 조정해 남북한에 시그널을 줄 수 있다."
-한·일 간에 최근 불거진 라인야후 사태에 대한 의견이 궁금하다.
"기업 간 경영권 문제도 있고 복잡한 측면이 있지만 요체만 짚어내면, 일본 정부가 보안사고를 계기로 개입하는 정도가 과도하고 불공정하다. 왜 자본 관계 재검토를 말하는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 정부가 더 일찍 개입했어야 했다. 기업의 경영권 다툼과 별개로 이 부분은 즉각 문제 제기했어야 했다. 우리 과학기술부가 대화할 게 아니라, 외교부가 나서야 한다. 한일 간 통상협정 상에도 협의 근거가 없지 않다. 강인선 외교부 2차관이 주한일본대사관 총괄공사를 만난 게 유일하던데, 꼭 짚어봐야 할 문제다. 경제 안보가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하는 건 맞지 않는다."
-미국은 경제안보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가 담당한다. 작년 봄,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이 공개 연설에서 경제안보전략(small yard, high fence)을 발표하고 비슷한 시기 재닛 옐런 재무장관과 지나 러몬도 상무장관이 관련 메시지를 내놓는 팀워크를 보여주었다.
"우리는 기껏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에 비서관 자리를 만들었다가 차장으로 승진시켰다. 중요한 건 정부 부처 간 조율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각 부처의 역할도 규정해야 한다. 실제 조율하는 부처는 대사관을 보유하고 있는 외교부인데, 외교부가 별로 다루지 않는 것 같다. 미국은 메시지와 방향성이 정해지면, 재무, 상무부가 역할을 분담해서 일사천리로 움직인다. 그게 선직국형 조율된 외교다. 우리 NSC는 전략이나 방향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당면 현안 논의하고 헤어지는 식이다. 전략이 없다. 후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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