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제라블 속) 미리엘 주교 같은 분이 앉으셔야 할 자리인데…. 기왕, 은행장이 된 김에 하루라도 빨리 은행 문을 닫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은행 임원은 한해 억대 소득세를 내는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고액연봉자들이다. 그런데 무슨 은행이기에 새 은행장의 포부가 은행 폐쇄일까? 지난 8일 인권연대 장발장은행 2대 은행장으로 취임한 정범구(70) 전 독일대사의 취임 소감이다.
취임 일성 "하루라도 빨리 은행 폐업"
2015년 탄생한 장발장은행은 돈 없는 은행이고, 돈을 벌려고 하지 않는 은행이다. 별도 사무실은커녕 행장에게 단 한 푼의 보수나 경비도 제공하지 않는다. 홍세화 초대 행장이 지난 4월 18일 타계한 뒤 석 달 가까이 비어 있던 자리를 인권연대 운영위원으로 활동해 온 정 전 대사가 떠맡은 것. <시민언론 민들레>가 지난 19일 서울 중구 만리동1가 인권연대 사무실에서 정 행장을 만났다.
은행 소개에 숫자가 쏟아졌다. 지난해 벌금형 대상자는 51만 209명. 그 가운데 11% 정도인 5만 7267명이 벌금을 내지 못해 징역을 살았다. 벌금 확정 1달 내 납부하지 못하면 노역형으로 대체하도록 한 '환형유치제도'에 따른 것이다. 빵 한 조각 훔친 죄로 평생을 쫓겨 다녀야 했던 장발장은 19세기 프랑스 소설 속 인물이 아니다. 우리 옆에 살아 있는 군상이다. 대한민국 사회가 매년 4만~5만 명씩 양산하는.
"벌금을 내지 못해 '몸빵'을 해야 하는 분들은 우리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고단한 생활 탓에 예비군 훈련을 제때 받지 못해 향군법 위반자가 되고, 교차로 무단횡단과 같은 기초질서 위반자가 되죠. 이런 분들일수록 '신용'이 없어요. 은행 대출은커녕 카드깡을 할 신용카드조차 없어 벌금을 내지 못하죠. 주머니가 빈 분들에게 감옥은 의외로 가까이 있어요."
1350명에 23억 5650만 대출, 언발에 오줌누기
벌금형이 사실상 징역형이 되는 까닭은 노역을 시행할 장소가 마땅치 않다는 지극히 행정적인 이유에서다. 교도소 수감자들이 하는 일을 나눠서 하기에 감옥에 들어가 평균 하루 10만 원 정도의 일당으로 벌금액을 채울 때까지 머물러야 한다. 그런데 하루라도 일을 못 하면 가족을 부양할 생활비 마련이 묘연하고, 병든 모친을 돌봐야 하거나, 어린 자녀의 양육 문제까지 걸려있다면 마음 편하게 징역을 살 수도 없다. 바로 이런 분들에게 벌금액을 대출해 줌으로써 '비상구' 역할을 하는 게 장발장은행이다. 그간의 실적은 보기에 따라 창대하기도 하고, 미미하기도 하다.
지난 9년 동안 1350명에게 23억 5650만 5000원을 대출했다. 5월 21일 자 보도자료는 116번째 대출로 '현대판 장발장' 13명에게 2660만 원을 빌려주었다고 밝혔다. 그나마 시민 후원 덕에 가능했지만, 같은 기간 노역으로 벌금을 대납한 약 45만 명의 300분의 1도 안 된다. 정 행장이 "급한 불을 끄는 데 약간 도움을 줄 뿐, 언 발에 오줌 누는 수준"이라고 안타까워 한 연유이다. "은행 문을 닫겠다"는 말은 대출사업을 중단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잠정적으로 후원이 늘어나 대출을 늘리는 게 절실하지만, 근본 처방이 될 수 없다. 불합리한 벌금제와 환형노역제를 개선, 벌금을 빌려줄 필요 자체를 없애자는 말이다. 정 행장의 취임 일성에 담긴 조속한 폐업 뜻은 장발장은행의 설립 목적과 통한다.
벌금형, 평등 가장한 무자비한 불평등
"인권연대의 노력은 몇 갈래로 진행됐습니다. 우선 벌금제도 개선. 장발장의 나라, 프랑스에선 자산과 부채를 고려해 벌금 액수를 정해요. 모두에게 같은 금액을 매기는 것은 겉으론 평등이지만, 실제로 무자비한 불평등이기 때문이죠. 벌금 100만 원이 그야말로 껌값인 부자와 몸빵으로 대신해야 할 빈자를 동일한 기준으로 묶는 건 레미제라블이 나왔던 시대의 야만에 가까워요. 딱하지 않습니까?" 정 행장의 말을 더 들어볼 필요가 있다.
"핀란드와 스웨덴,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많은 유럽 국가에서는 자산 및 소득에 비례한 벌금 부과가 상식입니다. 은행이 출범한 2015년 노키아 부회장 안시 반요키가 오토바이 과속 탓에 11만 6000유로(약 1억 3000만 원)의 범칙금을 부과받는 일이 있었어요. 그는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핀란드 사회가 1921년 합의한 자산·소득 비례 벌금제도의 원칙을 벗어날 수 없었죠. 독일이 1975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일수총액 벌금제'도 다르지 않아요. 벌금총액을 먼저 정하는 우리와 달리 노역일수를 정하고, 소득에 따라 하루 1유로에서 최고 3만 유로의 노역비를 계산합니다. 판사의 재량이죠."
한국 역시 벌금 액수와 노역 일수를 판사가 재량으로 정하지만 통상 하루 10만 원 정도로 고정됐다. 판사의 재량권은 하루 5억 원의 '황제노역' 판결이 나오는 등 유전무죄의 극명한 사례를 낳기도 했다. 부자에게 종종 적용되는 고무줄 잣대가 빈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지독한 불평등. 노역도 노동이다. 그런데 노동의 결과가 사회에 유용하고, 그 유용함으로 가벼운 죄일지언정 죗값을 치르는 효과가 있을까. 정 행장은 인권연대가 그동안 제안한 개선책으로 노역의 사회봉사 대체와 벌금 분납, 벌금 납부 유예제를 소개했다. 하나같이 현대판 장발장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사회봉사 대체-벌금 분납도 '그림의 떡'
사회봉사 대체는 현행법 제도에서도 가능하지만, 신청 절차가 까다로운 데다가 판·검사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 유명무실하다. "법원은 작년에 3000여 건의 사회봉사 명령을 내렸지만, 전체 노역형의 극히 일부분입니다. 유명무실하죠. 벌금 분납제 역시 최소 12개월 분납이 돼야 도움이 될 텐데 지금은 총액의 30~40%를 선납하게 하고, 2~3회 분납만 허용합니다. 역시 제도는 있지만 실제 도움이 되지 않아요." 2015년 제도를 갖춘 벌금형 집행유예 역시 지금까지 수천 건 정도에만 적용됐다. '법원의 소극적 태도'가 원인으로 지목된다.
'은행답지 않은 은행'은 담보나 상환능력을 심사하지 않는다. 이자도 없다. 가정 환경 및 생활 조건으로 미루어 얼마나 절실하게 돈이 필요한지가 대출 기준이다. 자료도 제출받지만 상환 기일은 본인이 정한다. 미상환 시 추심 절차는 없다. 다만 상환 의무를 면제하지는 않는다. 재계약, 계약 연장을 하는 방식으로 채무 관계를 유지한다. 물론 발뺌하는 사람도 있다. 인권연대 직원들 업무의 상당 부분이 상환 독촉인 이유다.
역경 속에서도 바라보는 대상에 따라 삶은 바뀐다. "미리엘 주교는 구덩이만 바라보는 슬픔을 별을 바라보는 슬픔으로 바꾸려고 노력했다…." 레미제라블의 한 대목이다. 느슨한 조건에도 지금까지 약 7억 6000여만 원(상환율 32.2%)을 돌려받아 다른 장발장에게 대출할 수 있었다. 빌린 돈을 갚은 뒤 후원금을 보내오는 분들도 있다. 희망의 근거다.
장발장은행 필요없는 합리적인 나라를
초대 행장이 '파리의 택시 운전사' 시절 톨레랑스를 접했다면, 2대 행장은 11년간(1979~1990) 유학한 독일에서 소득·자산에 따라 사람을 배려하는 합리적 인간주의를 체감했다. "학생도 방학 중 아르바이트 소득에 따라 온갖 지원을 해주었죠. 1990년 통독 당시 독일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만 2000 달러였어요. 지금 한국이 3만 5000 달러 정도죠. 놀랍지 않습니까? 독일은 지금의 우리보다 소득이 적거나 비슷했던 시절에 가난한 외국 유학생에게 그 많은 복지 혜택을 나눠줬어요."
흔히 홍세화 선생이 장발장은행을 작명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오래전부터 벌금제 및 환형노역제 개선 운동을 벌였던 인권연대의 논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작명이었다. 한 조각 빵 때문에, 감옥에 갔던 장발장의 이미지가 벌금 때문에 노역을 살아야 하는 분들의 처지와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2대 행장도 '톨레랑스의 전도사'와 마찬가지로 거창한 사회 정의를 외치지 않는다. 딱 장발장은행이 필요 없을 정도의 합리적인 나라를 희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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