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가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의 실체를 인정했다. 그동안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모욕해온 부끄러운 역사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공론의 장이 마련됐으면 한다."
베트남전쟁 중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피해자에게 사상 첫 국가배상 판결이 나왔다. 지난 7일 서울중앙지법 민사68단독 박진수 부장판사가 베트남 피해자 응우옌 티탄(63)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에서 대한민국이 3000만 100원의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것. 학살 자체를 한사코 부인해온 '피고 대한민국'이 명백하게 법의 심판을 받았건만, 정부는 여전히 승복하지 않고 있다.
시민언론 민들레는 10일 한국과 베트남전쟁에 대한 사죄와 성찰을 통해 평화로 나아가기 위해 2016년부터 활동해온 한베평화재단 권현우 사무처장(39)의 말을 통해 판결의 의미를 짚었다.
-이번 판결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국내에선 1999년부터 시민사회와 언론, 민간단체 연구자 차원에서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대통령과 정부를 상대로 진상규명 및 사과를 요구해왔다. 일부 대통령들이 유감을 표했지만, 정부는 학살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아 왔다. 피고 대한민국은 학살 피해자 증언과 각종 자료에도 불구하고 '사건은 한국군이 아닌 베트콩에 의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피해자 증언은 전쟁 당시 한국군 조사 결과와 맞지 않아 신빙성이 낮다'는 등 다양한 논리로 문제를 외면해왔다. 이번 판결은 학살의 실체를 국가 차원에서 인정한 것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에 남을 일이었다."
-시민사회는 정부의 억지 논리에 어떻게 대응해왔나.
"20대 국회에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발의됐지만, 공론화에 실패한 채 회기가 종료됐다. 이번 21대 국회에서도 강민정 의원(더불어민주당)의 대표 발의로 '베트남전쟁 시기 대한민국 군대에 의한 민간인 피해사건 조사에 관한 특별법'이 곧 발의된다. 이번 판결로 특별법안이 당위성을 얻게 된 만큼 고무적이다."
-이번에 승소한 퐁니·퐁넛 학살 사건 외에 다른 소송이 진행 중인가.
"아니다. 한국 언론은 판결 뒤 줄로 소송이 잇따를 것이라는 데 관심을 두고 있는 것 같다. 퐁니·퐁넛 학살은 가장 많은 증거가 발견된 사건이어서 피해자 소송이 가능했다. 다른 사건들은 소송에 제출할 증거가 많지 않다. 특별법이 필요한 까닭이기도 하다. (증거가 많고 적음을 떠나) 한국군의 모든 학살사건에 대해 한국 정부 차원에서 확인할 필요가 있어서다. 정부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조사를 진행하면서 피해 당사자들의 요구와 피해배상에 대한 바람을 청취해 종합적인 대책을 내놓았으면 한다. 그 과정에서 베트남 정부의 입장도 들어야 할 것 같다."
-정부(국방부)는 판결 뒤에도 "관련기관과 협의를 통해 후속조치를 검토하겠다"는 짧은 입장문을 내놓았다. 항소 여부도 검토한다고 한다.
"국가가 과거 다른 나라에서 저지른 전쟁범죄에 대해 정부 차원에서 대대적인 진상조사를 한 사례는 영국과 프랑스, 독일에도 있다. 한국도 2005년 12월 1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진화위)'가 설립돼 국내 민간인 학살 사건을 포함한 과거사 정리를 해온 내적 경험이 있다. 국내 학살 문제 역시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정부가 의지만 있다면 베트남전쟁의 과거사를 얼마든지 정리할 수 있다고 본다."
-베트남전쟁 학살 피해자 중에서 진실규명을 추진하는 다른 사건은 어떤 것이 있나.
"하미 학살 사건의 피해자 한 분이 2018년과 2019년 두 차례 방한해 정부에 진상규명을 요구한 바 있다. 이름이 이번에 승소한 퐁니 마을 응우옌 티탄과 같은 분이다. 응우옌 티탄을 비롯한 하미 마을 피해자 유가족 5명이 작년 4월 진실화해위원회(진화위)에 진상규명 신청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진화위로부터 어떠한 답변도 받지 못하고 있다. 진화위는 심의가 늦어지는 이유조차 알려주지 않고 있다."
-베트남 언론에서는 이번 판결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많은 보도가 나오고 있다. 한국 언론 또는 제3국 외신을 통해 간접 전달하고 있다. 한베 평화재단에도 취재가 들어왔다. 주로 한국 사회가 어떤 의미를 두고 있는지, 향후 소송에 나설 피해자들이 있는지, 궁극적인 해결책은 무엇인지에 관심을 두고 있다. 국영방송 브이티브이에서는 "1968년 꽝남 학살사건의 진실의 승리"라고 전했고, 전국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탄니엔(청년) 신문은 '법정이 한국에 퐁니 학살사건 피해자 배상을 요구하다'는 헤드라인을 달았다. 역시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전비엣 신문은 '퐁니학살 피해자 한국 정부에 승소, 고통이 경감되다'고 보도했다. 원고인 응우옌 티탄의 사진과 소감을 함께 소개했다."
-과거사 청산은 국가배상과 진상규명, 피해자 명예 회복 순으로 진행된다. 이번 판결이 특히 피해자 명예회복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하는가.
"피해자 모독은 굉장히 오래된 문제다. 2018년 퐁니·퐁넛 학살 및 하미 학살 사건을 놓고 시민평화법정을 열었었다. 당시 참전용사단체에도 서한을 보내 피해자의 목소리를 청취할 것을 제안했었지만 참석하지 않았다. 2021년 특별법 발의를 위한 4차 공청회에도 초청장을 보내 대화를 시도했지만 역시 성사되지 않았다. 계속 평행선을 그리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그렇지만 참전군인들이 피해자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만 볼 수는 없다. 이번 소송 과정에서 증언해준 분도 있었다. 앞으로도 참전자 단체와 소통 노력을 계속하겠지만, 흩어진 개인의 목소리도 경청할 생각이다. 그분들 한 분, 한 분도 결국 전쟁의 피해자가 아니겠는가."
(해병대 전우회는 9일 성명에서 "참전용사들의 명예를 무너뜨리지 않도록 신중한 판단을 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전쟁 중 해병대 1156명의 전사자와 지금까지 후유증으로 시달리는 수많은 참전용사의 아픔을 같이하며 그들의 명예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치는 어떠한 행위도 용납할 수 없다"고 밝혔다. 대한민국 월남 참전자회도 8일 자 입장문에서 "참전자회와 국가보훈처는 국방부와 법무부 변호사에게 관련 자료를 지원하는 등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월남 참전 전우들과 가족들의 명예가 심각하게 실추됐다"면서 "항소심에서 최선의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대한민국 고엽제 전우회는 10일 현재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흩어진 개인의 목소리를 경청한다고 했는데….
"그동안 단체 차원에서 참전군인들의 입장은 많이 나왔지만, 개인의 이야기는 단체의 목소리와 사뭇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실 공개를 고민하는 분, 반대는 하지 않지만 침묵을 지키는 분 등 다양한 입장이 있을 것 같다. 참전군인들의 증언은 문제 해결의 또 다른 종착점이라고 생각한다. 베트남전쟁의 과거사 문제들은 내적 다양성을 갖고 있다. 전시 성폭력 피해자가 있고 라이 따이한도 있다. 참전군인들 역시 상흔을 안고 있다. 전체를 자세히 들여다봐야 한다. 국내에서 자행됐던 내부의 전쟁범죄도 있었다. 아직도 해외파병을 하는 현실에서 종합적으로 성찰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한국과 베트남은 수교 30주년을 맞아 지난해 말 윤석열 대통령과 응우옌 쑤언 푹 베트남 국가주석이 서울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를 선언했다.
"과거사 문제는 조용히 잠복해 있다가 언제라도 튀어나올 수 있다.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작은 아씨들>이 베트남전쟁을 왜곡해 결국 베트남에서 상영금지가 되지 않았나. (극 중 베트남 전쟁 참전군인 원기선 장군의 "한국 군인은 베트콩 병사 20명을 죽일 수 있다. 어떤 군인은 100명까지 죽였다"는 대사가 있었다) 주목할 대목은 이 드라마를 시청한 베트남인들이 대부분 전쟁세대가 아니라는 점이다. 전쟁을 모르고 자란 젊은 세대가 많았다. 그들이 왜 분노했겠는가. 어느 나라나 전쟁은 그 나라의 정체성과 연결돼 있다. 타국 미디어가 전쟁의 역사를 왜곡하면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작은 아씨들> 방영금지 당시 베트남에선 어떤 반응이 나왔는가.
"관영언론에선 반응이 없었다. 다만, 소셜미디어(SNS)에서 영향력이 큰 인플루엔서들이 많은 문제점을 제기해 엄청 뜨거운 반응이 있었다. (과거사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기에) 우리는 아직도 무엇이 베트남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지 모르고 있다. 내부의 시각에 갇혀 있다."
-김대중 대통령부터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으로 이어지면서 과거사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었다. 이에 대한 베트남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베트남 정부는 어쨌든 자신들이 이긴 전쟁이기에 과거가 아닌 당장의 경제성장에 관심을 두는 실용적인 입장인 것 같다. 김대중 대통령의 유감 표명은 현지 언론에 소개됐지만 이후엔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경우 2017년 현충일 추념사에서 '베트남 참전군인들의 헌신과 희생을 바탕으로 조국 경제가 살아났다"고 언급한 대목이 역효과를 냈다. 베트남 외교부는 이례적으로 "베트남 국민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양국의 우호협력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발언과 행동을 삼갈 것을 요청한다"는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 청와대 수준이나 드라마의 수준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가 전해진 뒤 베트남 SNS에서는 "우리나라 사람을 죽인 대가로 경제성장 한 것도 영광스럽게 여기는가" "한국 제품 사지 말자"는 등의 거센 반응이 나왔다.)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 문제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결국은 기억의 문제라고 본다. 어떻게 기억을 남기고 교과서에 어떻게 실으며, 교육과정에서 어떻게 다룰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최소한 전쟁기념관의 베트남전쟁 관련 전시물도 변화가 필요하다. 참전의 근거가 '세계평화 수호'였다고 입구에 큰 글씨로 적어놓았다. 베트남 사람들이 이를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하겠는가. 매우 부끄러운 전시 내용이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베트남전쟁은 정당성이 없는 전쟁으로 평가하고 있다. 맥나마라 당시 미국 국방장관도 회고록에서 전쟁의 정당성이 없었음을 고백했다. 시민사회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해왔지만, 기폭제가 없었다. 작은 일부터 해나갔으면 한다."
"베트남 피해자 외면해온 역사, 함께 풀어갈 공론의 장을" < 사회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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