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소원은 평화 / 꿈에도 소원은 평화 / 이 정성 다해서 평화 / 평화를 이루자." 한반도 거주민이면 누구나 숙연해지는 동요. 정토회 합창단은 '통일' 자리에 '평화'를 심었다. 북이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를 선언하고, 남이 '(미국의) 힘에 의한 평화'를 내세우면서 길이 막힌 남북 관계. 이 마당에 목청껏 통일을 외치면 의도가 의심스럽거나 부조리가 되는 시대다. 떨칠 수 없는 미망일지언정 "통일은 미래 이익일 뿐. 현재 이익은 평화가 맞다."
아침부터 햇볕이 무척 따가웠던 13일 전북 장수군 죽림정사. 독립운동가 백용성 조사(祖師) 탄신 160주년을 맞아 '한반도 평화와 국민통합을 기원하는 만인 대법회'가 열렸다. 만인이 한자리에 모여 결사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죽림정사는 백용성 조사(1864~1940)의 생가 옆에 창건된 사찰. 결사의 출발점은 용성 조사가 84년 전 입적하면서 남긴 유훈이었다.
"사분오열의 과보를 되풀이하지 말라." "강대국의 종속국이 아닌 주인국이 되어라." 이날 수많은 깃발과 펼침막에 쓰인 말이자, 평화-국민통합이라는 두 개의 화두였다. 용성 조사의 법통을 물려받은 손상좌 도문 스님과, 도문 스님의 상좌 법륜 스님이 자리했다. 전국 곳곳에서, 또 해외에서 모인 이들의 얼굴은 하나 같이 밝았다. 30℃를 웃도는 무더위에도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외침이 위협적이기는커녕 편안한 인상을 준 까닭인 듯했다. 그러나 평화의 목소리가 높아지면, 역설적으로 전쟁의 그림자가 짙게 깔리고 있다는 방증.
분단 이후 어떤 시대보다 전운이 짙어지고 있다. 한반도 안에서는 남과 북이 대북 전단과 오물풍선을 날려 보내고, 유독 '힘'을 강조하는 윤석열 정부는 여기에 대북 확성기 방송을 보탰다. 밖에서는 기왕의 미‧중 갈등에 우크라이나 전쟁 뒤 전선이 뚜렷하게 형성된 미‧러 간 핵무력 대치가 심상치 않다.
정토회 지도법사 법륜 스님은 만인평화선언에서 "힘에 의한 평화만 고집하면 전쟁 위기가 높아진다. 대화를 통한 평화도 생각해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북한에 대해서도 "하루빨리 핵을 동결하고 대화의 장으로 나오라"고 일갈했다. 이어진 다섯 개의 만인의 다짐 중에서 아무리 급해도 당장 우리 안에서 다름을 이해하고 마음을 모으자는 다짐이 크게 들렸다. 3.1운동 민족대표 수와 같은 33인이 무대에 올라 평화를 가로막는 '사슬 끊기 퍼포먼스'를 벌이고, 통합을 위한 촛불을 점화했다.
평화에 국민통합이 더해진 연유
정토회 합창단의 '우리의 소원'은 2부 행사의 하이라이트. 경동교회 김홍태 장로가 합창단 지휘봉을 잡았다. 박남수 천도교 전 교령은 수운 최제우 교주와 해월 선사의 인연을 말머리로 축사를 했다. 종교 간 다름을 인정하고 통합의 모범을 보이려는 종교계, 정계, 사회운동가들의 참가가 눈에 띄었다. 김덕룡 김영삼 민주센터 이사장과 정세균 노무현재단 이사장, 정동영 더불어민주당 의원, 주호영 국민의힘 의원 등 원로 정치인과 소설가 김홍신, 작가 노혜경, 탤런트 조인성 씨 등이 그들이다. 김병조, 김제동 씨는 각각 1부와 2부 사회를 맡았다.
만인결사는 2017년 전쟁 위기 당시 정토회가 주최한 평화대회의 연장이었다. 그 새 한반도 정세는 몇 번의 굴곡을 거쳐 악화 일로를 걷고 있다. 법륜 스님은 진즉 "평화가 현재 이익"이라는 생각을 해 왔다. 그해 11월 5일 정토회는 서울 광화문에서 평화대회를 조직했다. '화염과 분노' 발언에 이어 "북한의 완전한 파괴"를 공언한 도널드 트럼프의 방한 일정에 맞췄다. 북한은 미국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위협으로 맞섰다. 일촉즉발의 정세 속에서 "전쟁만은 안 된다"는 한국민의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던 것.
보수와 진보, 연령과 종교를 초월해 한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진보단체는 '주한미군 철수'를, 보수단체는 '대북 제한적 군사작전'을 포함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각각 불참했다. 2차 평화대회(12. 23.)는 연말 분위기 탓에 주목을 받지 못했다. 국내외 수십 곳에서 평일에는 1인 시위를, 주말에는 전쟁반대 집회를 열었다. 만인결사에 국민통합이 평화와 함께 화두가 된 까닭은 당시 평화운동의 성취와 좌절에서 온 것으로 이해됐다.
'종교'가 증오와 갈등을 부추기는 시대, 많은 이들이 잊고 있던 독립-통일-평화의 굵직한 흐름을 보여주었다. 스승이 스승을 낳고, 그 스승이 또 스승을 낳아 염원을 대물림한 덕이다. 용성 스님은 "대한정국 800년을 예비하라"는 스승 해월 선사의 유훈을 이었다. '대한정국'은 민이 주인이 되는 행복한 나라. 용성 스님은 3가지 운동을 벌였다. 붓다의 가르침과 계율을 따른 수행을 위한 '불교의 지성화'와 누구나 쉽게 불교를 접할 수 있게 돕는 '불교의 대중화', 재가자 중심의 사찰 운영과 선(禪)·농(農)일치. 마지막 '불교의 생활화'의 중심에 독립운동을 놓았다.
장엄한 염원
한글 성경과 찬송가에 착안해 불경을 한글로 번역했고, 찬불가를 도입했다. 종교 간 구분을 넘었다. 사상 첫 한글 화엄경은 기독교 출판사에서 인쇄했다. 당대 최고의 선승이면서, 현실에선 독립운동가들이 기댈 언덕을 마련했다. 만해 한용운 스님과 불교계 대표로 3.1운동 민족 대표 33인의 일원이 된 것은 오히려 작은 실천이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 2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뒤 서울 종로에 대각사를 재창건하고 불교 개혁에 정진하면서 독립을 도모했다. 만주 용정에 대각교당을, 북간도 명월구 봉녕촌에 대규모 농장을, 경남 함양에 화과원(과수원)을 설립했다. 각각 독립운동가 가족과 후손의 생계를 돕는 한편, 군량미와 군자금을 대는 기지였다. 국권침탈(1910) 뒤부터 중국을 무대로 한 인삼 교역과 함경남도 북청에서 금광사업을 운영, 독립자금원으로 삼았던 스님이다.
1927년 용정 대각교당에서 홍범도 장군에게 삼귀의·오계 수계와 함께 법명 대염(大焰)을 주고, 1만 명의 대한의사군 결성을 추진했다. 3년 뒤 만해 한용운 스님의 소개를 받고 찾아온 윤봉길 의사에게 역시 삼귀의와 오계를 수계했다. 세간 오계의 첫 번째가 "나라에 생명 바쳐 충성하라"이라던가. 스님의 소개로 상해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을 만난 윤 의사의 가슴에 새긴 말이었다. 한반도와 만주에 구축한 독립운동 배후 거점들은 1939년 일제 밀정에 의해 정체가 드러나 모두 파괴됐다. 더구나 밀정은 애제자. 30여 년의 노고가 물거품이 된 이때 스님의 세수가 76세였다. "나의 할 바를, 도리는 다 마쳤도다. 기묘년(1939)에 절단이 나 버렸구나." 스님은 놀랍게도 그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파종했다.
"그러나 이 절단이 나버린 씨앗이 다음 기묘년(60년 뒤)에는 독립은 물론이고 아주 부강한 나라가 되고, 다시 25년 뒤에는 대한정국 800년의 대운이 열리는 해가 될 것이다." 또 "국운을 맞이하면 강대국의 종속국이 되지 말고, 주인국이 되라"는 말씀을 남겼다. 이듬해 종로 대각사에서 입적. 민족대표 33인의 태반이 일제 말기 신사참배의 굴종을 받아들인 것과 달리 마지막까지 독립 염원을 놓지 않은 장엄한 생이었다.
평화와 전쟁의 갈림길
법륜 스님은 "올해(2024)가 바로 용성 조사가 말씀하신 그 해다. 우리는 과거를 기념하는 데 머물지 말고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평화와 전쟁의 갈림길. 국운 800년의 원년에 평화·통합의 만인결사를 맺은 연유이다.
<우리의 소원>은 가사가 바뀌었지만 본래 '통일'이 그 자리 주인이 아니다. 1947년 당시 음대생이던 고 안병원 선생이 곡을 입힌 선친(안석주)의 가사에는 '통일'이 아닌, '독립'이었다. 해방이 됐어도 미군정 하에 놓인 처지였기 때문이다. 노래 제목부터가 <독립의 노래>였다. 용성 스님의 뜻이 도문 스님으로, 다시 법륜 스님으로 이어지는 동안 독립이 통일로, 통일이 다시 평화로 바뀌었다. 죽림정사 천변에 울려 퍼진 "평화" "통합"의 의미가 도저했다.
만인결사는 마지막 순서로 우리 역사 속에서 새로운 세상의 개벽을 꿈꾸던 민의 염원을 담은 수십 개의 깃발을 앞세우고 각계 대표들이 뒤따르는 행진을 벌였다. 먼 길을 달려 온 만인은 준비해 온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귀로에 올랐다. 죽림정사 천변의 넓은 행사장에는 휴지 한 장 나뒹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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