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북핵 억제와 대응을 위해 필요한 미국 핵자산에 전시·평시를 막론하고 한반도 임무가 배정될 것임을 확약했다. 이제까지 핵을 포함한 모든 범주의 역량을 대한민국에 제공할 것임을 선언해 왔으나, 이처럼 미국 핵자산에 북핵 억제와 북핵 대응을 위한 임무가 배정될 것이라고 문서에 명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미국이 동맹국 한국에 제공하는 특별한 공약이라고 할 수 있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제1차장)
한미 정상이 11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의를 계기로 워싱턴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한미 '핵 억제·핵 작전 지침'을 승인했다. 지침은 작년 4·26 워싱턴선언에 따라 설립한 차관보급 협의체 한미 핵협의그룹(NCG)이 논의해 온 것으로 지난 6월 문안에 합의해 놓고, 이날 오전 NCG 공동대표인 조창래 국방부 정책실장과 비핀 나랑 미 국방부 우주방위 담당 차관보 대행이 서명한 문서다.
백악관과 대통령실이 발표한 정상회담 공동성명은 "두 정상이 2023년 4월 '워싱턴선언' 발표 이후 확장억제에 관한 한미 안보협력의 진전을 재확인하기 위해 만났다"는 문장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지침 서명에 대한 설명과 간략한 의미 외에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차관보 수준의 문서 승인 외에 정상급 의제가 전혀 없었던 '정상회담'이었음을 방증한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제1차장은 현지 브리핑에서 지침 승인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했다. 지침 자체가 기밀로 분류됐기에 전체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백악관과 대통령실이 게시한 공동성명에 없는 내용을 우정 소개했다. 특히 "미국이 자국 핵무기에 한반도 임무를 특별히 배정했다"는 지침의 구체적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한국은 엄청난 합의라고 호들갑떨지만 미 국방부는 지침 서명 사실을 간락하게 밝힌 언론 성명을 내놓았을 뿐이다. 12일 펜타곤 정례 브리핑에서도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공동성명은 "양국 정상이 지침 문서가 한미 확장억제 협력을 (통합적인 방식으로) 제고하는, 견고한 기초를 제공한다고 강조했다"고 기술했다. 또 "믿음직하고 효율적인 핵 억제 정책과 핵 태세를 유지, 강화하는 데 있어 동맹 정책과 군 당국에 지침이 될 것"이라고 적시했다. 두 정상은 NCG가 신속하게 진전을 이뤄야 할 분야로 △안보 규약(protocol)과 정보공유 확대 △위기 및 유사시 핵 협의 과정 △핵·전략 계획, 유사시 미국의 핵 작전에 대한 한국의 재래식 전력을 동원한 지원 △전략적 소통, 연습, 모의 연습(시뮬레이션) △훈련 및 (국방자산에 대한) 투자 활동 △위험 감소 관행 등이 포함된다. 대통령실이 게시한 한글본은 더 난해하다. 수식어를 걷어내고 요약하면, 미국이 핵무기를 전개할 때 한국이 재래식 무기로 지원한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핵협의그룹(NCG)이 벤치마킹의 대상으로 삼은 나토의 핵공유프로그램을 보면, 내용은 더 간단해진다. 미국이 유럽 5개국에 배치한 전술핵(B-61) 핵폭탄을 회원국의 이중용도 항공기(DCA)로 운반해 사용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 과정에 나토 회원국의 재래식 전력이 지원 임무를 맡는다. 나토의 핵무기 사용은 핵계획그룹(NPG)의 정치적 결정이 있어야 가능하다. 지금까지 세 차례 회의를 한 NCG의 발표내용 어디에도 핵무기 사용 결정권에 관한 언급은 없다.
한미 NCG와 결정적인 차이는 두 가지다. 첫째 미국은 한국은 물론, 일본, 괌 등지에 핵무기를 상시 배치하지 않고 있다. 김 차장 말대로 '한반도 임무'를 부여하더라도, 부여할 특정 미국 핵무기가 없다는 말이다. 둘째 대통령실의 장황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한미 차관보급 협의기구인 NCG는 핵무기 사용에 관한 어떠한 정치적 결정권도 없다. 미국이 일단 사용을 결정하면, 보조적인 역할을 논의하는 협의체일 뿐이다. 윤석열 정부가 강조하는 공동계획, 공동협의의 실체는 이처럼 별 내용이 없는 것이다. DCA는 재래식 항공기이지만 핵폭탄 적재가 가능한 항공기를 뜻한다. 한국 공군이 보유한 F-35A가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나토의 핵공유프로그램이 핵무기를 적재할 항공기로 '동맹국 DCA'를 명시한 것과 달리, 미국 핵무기를 한국 공군기에 실을지는 적어도 공개된 문서에는 명시돼 있지 않다.
군사 실무 차원에서 필요한 차관보급 합의, 서명 문서를 한미 정상이 승인했다는 걸 장황하게 설명할 정도로 내용이 없는 정상회담을 과대 포장하는 건 단순히 여론을 호도에 그치지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 핵자산의 동아시아 전개에 민감한 반응을 보여온 중국과 러시아의 심기를 거스를 뿐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한반도이건, 북대서양이건 미국 스스로 핵무기 사용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방한한 원조 네오콘, 폴 월포위츠 전 국방부 부장관(전 세계은행 총재)은 "한반도 분쟁에 핵무기가 포함된다면, 미국민은 한국을 그냥 버릴 것"이라고 단언했다. 대표적인 대북 대화론자, 로버트 칼린 미들베리 국제관계연구소 교수 역시 "우리는 핵무기 없이도 북한을 지도에서 지워버릴 수 있다"며 핵무기 무용론을 역설했다.
한미 동맹을 한반도 안보의 '절대 반지'처럼 여기는 윤석열 정부지만 정작 대미 정상외교는 양적, 질적으로 일본과 크게 대비된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한미일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의 1년 뒤인 지난 4월 재방미, 미일 정상회담 및 미·일·필리핀 정상회의를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격자형 전략구조' 구도를 확대했다. 물론 한국이 일본처럼 미국의 동아시아 군사전략에 깊숙히 들어갈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일본 총리가 미국과 인도태평양 전략을 공동협의, 공동기획하는 것을 지켜본 국민에게 차관보급 회의체인 NCG의 지침을, 그것도 내용이 확정, 서명된 것을 정상회담 성과라고 홍보하는 건 웃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한국 대통령이 사상 처음으로 나토 정상회의에 3년 연속 초청 받은걸 '우승 트로피' 처럼 한껏 들어 올리지만, 올해 나토 정상회의도 우리에게 별다른 의미를 찾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다. 정상외교의 실익과 명분이 희미한 가운데 홍보 기술만 나날이 발전 또는 퇴보하고 있음을 거듭 확인시켰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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