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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미 테리 사건' 대통령실 "전 정부 탓" 본질 흐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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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요원이) 사진에 찍히고 한 게 다 문재인 정권에서 일어난 일이다. 정권을 잡고 전문적인 외부 활동을 할 수 있는 요원들을 다 쳐내고 아마추어 같은 사람들로 채우니까 그런 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다. 관련자들에 대한 감찰과 문책을 검토하겠다." (18일, 대통령실 고위관계자, 연합뉴스)

워싱턴에서 활동하는 미국 한반도 전문가 수미 테리(김수미)가 작년 11월 서울 도렴동 외교부에서 열린 탈북 다큐멘터리 '유토피아 너머(Beyond Utopia)' 상영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테리는 영화 제작자로 참가했다. 2024.7.17. 연합뉴스

미국 연방 검찰이 16일 한국계 한반도 전문가 수미 테리(김수미·54, 뉴욕)를 전격 기소한 것은 한미 관계의 냉엄한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는 사건이다. 미 법무부 보도자료와 기소장을 읽어보면, 단언컨대 테리의 활동이 미국 안보를 위협했거나, 한미 관계에 악영향을 미친 행적이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런데도 연방수사국(FBI)이 10년 간의 관찰, 조사 끝에 기소 결정을 내린 배경은 아직 추측의 영역이다. 검찰의 기소장은 테리의 행적을 매우 구체적이고 악의적으로 기술했지만, 혐의는 외국대리인등록법(FARA) 위반에 국한했다. 역사적으로 한미동맹이 가장 굳건하다며 샴페인을 터뜨려 온 윤석열 정부의 잔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건 분명하다. 동시에 미국이라는 나라의 유전자(DNA)와 한미 관계의 본질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준다. 이번 사건의 성격과 추이를 추적해 그 결과를 소개한다.

미국 법무부(DOJ) 누리집의 외국대리인 등록 사이트. 수미 테리에 대한 미국 검찰의 기소내용은 장황했지만, 혐의는 외국대리인법(FARA)  위반에 국한됐다. 2024.7.20. [DOJ 누리집] 시민언론 민들레

수미 테리 사건은 기소장 31쪽의 행간에 담긴 의도를 톺아보고 향후 재판 과정을 지켜보면서 관찰해야 할 영역이다. 국가 차원에서 무겁고, 진중하게 대해야 할 사안을 두고 정파적 이익을 도모하는 건 최악의 선택이자, 가장 질이 낮은 대응이다. 정권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국가의 수준을 좌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실의 한 마디는 대한민국을 한없이 가벼운 존재로 돌리는 '자학적 개싸움'을 유도한 꼴이다.

중앙정보국(CIA)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에 10년 동안(2001~2011) 몸담았던 테리가 퇴직 뒤 뉴욕에서 처음 국가정보원 요원을 만난 건 2013년 6월이다. 이후 테리가 두 차례 자진 조사에 응하고, FBI가 테리의 자택 압수수색을 벌인 작년 6월 5일까지 그와 주미 국정원 책임자 간 10년의 행적이다. 박근혜-문재인-윤석열 정부 집권 기간이다. 정파 별로 '네 눈의 들보'를 들춰내 다투는 건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자칫 국민의 시야에서 사건의 진실을 흐린다고 본다.

수미 테리가 남편이자 칼럼니스트인 맥스 부트와 공동집필한 '한국이 일본과의 화해라는 용감한 발걸음을 내딛었다'는 제목의 워싱턴 포스트 칼럼. 기소장에는 주미 한국 대사(조현동)과 국가안보실장(조태용)이 각별한 감사의 뜻을 전했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2024.7.20. [워싱턴 포스트 누리집] 시민언론 민들레

대통령실의 '도발'은 국민의힘당의 지원사격과 더불어민주당의 반박으로 이어지면서 정쟁화 양상을 보인다. 호준석 국민의힘 대변인은 "문재인 정부 국정원의 역량 악화와 한미동맹 균열의 여파임이 명확해진다"라며 "문재인 정부 시절 국정원의 기강과 역량이 무너졌던 게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더불어민주당 고민정 최고 의원은 2022년 8월 윤석열 정부 출범 100일을 맞아 테리가 포린 폴리시에 게재한 기고문(제목 '윤 대통령 외교 정책의 힘찬 출발')을 대통령실이 영문 누리집에서 대대적으로 소개한 점을 들어 반박했다. 또 작년 11월 6월 테리가 제작한 탈북 다큐물 '비욘드 유토피아' 상영회에서 박진 외교부 장관과 테리가 나란히 앉은 사진을 공개했음을 상기시키며 "(테리는) 윤석열 정부가 긴밀하게 활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선원 의원도 비슷한 취지에서 기소장에 언급된 혐의는 박근혜 정부 8개 항, 문재인 정부 12개 항, 윤석열 정부 첫 1년 동안에만 20개 항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 수미 테리 박사가 6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열린 탈북 다큐멘터리 '비욘드 유토피아' 상영장에서 박진 외교부 장관과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2023.11.6. 연합뉴스

국정원 제1차장(2021~2022) 출신인 박 의원은 더 무거운 행보를 보일 필요가 있다. '먼지가 가라앉은 뒤' 논평과 분석을 내놓아도 늦지 않는다는 말이다. 다만 10년 동안 테리를 감시해 온 FBI가 하필 미국 정보기관의 용산 대통령실 사건이 불거진 작년 4월 이후 본격 조사에 착수한 의도에 의문을 제기한 대목은 주목된다. "한미 간에 충분히 외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는 지적도 유의미하다. 국정원 직원들의 활동 노출과 관련해 감찰, 문책을 검토하겠다는 대통령실 방침에 "국익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하지하책"이라는 국정원장 출신 박지원 의원의 지적도 울림을 갖는다. "국정원을 갈라치기 해서 정보역량을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분단과 한미동맹의 굴레 안에 있는 대한민국은 정권을 불문하고 미국 조야의 동향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주미 대사관과 유엔 대표부 소속 외교관이나 국정원 직원들이 미국 싱크탱크나 전문가들과의 접촉면을 넓히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업무 활동이다. 이를 두고 우리 안에서 남탓을 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고 본다.

2023년 4월 27일 한국일보에 실린 수미 테리의 기고문. 같은달 26일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정상회담이 동맹에 많은 의미가 있으며, 한국과 동맹에 좋은 것이라는 취지로 글을 써달라"는 주미 한국 대사관 관계자의 제안으로 작성한 칼럼이다. 기소장 50항에 따르면 대사관 관계자는 500달러의 원고료를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2024.7.20. [한국일보 누리집] 시민언론 민들레

"문재인 정부 국정원이 종전선언을 위해 무리한 대미 외교를 했다"는 조선일보 보도(19일)도 정략적 갈라치기라는 점에서 도긴개긴이다. 일례로 윤석열 정부 국정원은 한일 관계 개선과 전략핵잠함(SSBN) 및 전략폭격기 등 미국 전략무기의 정기적 순환 배치, 한미 핵협의그룹(NCG) 관철을 위해 지속적, 반복적으로 수미 테리의 지원을 요청했고 결과에 탄복했다. (기소장 41~42항)

국정원 요원의 제안을 받아들여 테리가 남편이자 워싱턴 포스트 칼럼니스트인 맥스 부트와 공동 집필한 2023년 3월 7일 자 워싱턴 포스트 기고문('한국이 일본과의 화해라는 용감한 발걸음을 내딛었다')이 게재된 뒤 '칼럼이 마음에 들었냐'는 테리의 문자메시지에 주미 대사관 관계자(외교부)는 "당신의 열정과 노력에 너무 감사한다! 대사(조현동)와 국가안보실장(조태용)이 당신의 칼럼에 너무 행복했다"라는 감사 인사를 보냈다. (49항)

수미 테리 미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이 지난 5월 29일 서귀포시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주포럼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4.5.29. 연합뉴스

테리 사건은 미국 국내 사법 관행과 절차가 출발점이다. 외교 문제로 해석하는 것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 테리라는 한 명의 미국 시민과 두 개의 국가가 연관된 관련돼 있다. 미국 법무부는 17일 테리를 체포하면서 그가 "한국 첩보기관 요원들에게 (미국 의회, 정부 관계자에 대한) 접근 기회를 제공하고, (한국 정부 입장) 지지의 대가로 명품을 선물받았으며, (소속 싱크탱크에) 자금을 지원받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은 모두 검찰 측 주장이다. 어차피 실체적 진실은 재판 과정에서 객관적으로 규명된다.

테리의 변호사 리 월로스키는 성명을 통해 "(검찰의) 이러한 주장은 사실무근일 뿐 아니라 공직에 근무한 여러 해와 자신의 독립성으로 이름난 학자이자 뉴스 분석가의 작업을 왜곡한 것"이라고 밝혔다. 성명의 나머지 내용은 이렇다. "테리 박사는 비밀취급 허가를 10년 이상 받지 않았고(비밀에 접근하지 않았고), 한반도와 관련한 견해는 오랫동안 일관됐다. 사실 그는 기소장이 밝힌바, 자신이 대신해 활동했다는 한국 정부에 대해 거칠게 비판적이었다. 진상이 분명해진다면, (미국) 정부가 심각한 실수를 했다는 사실이 명백해질 것이다." 

 ☞ 수미 테리 스파이로 모는 미국, 무슨 이런 동맹 있나?  ☞ 한미, '수미 테리 사건화' 덮을 시간 13개월 있었다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스 2014년 1월 18일 자에 실린 수미 테리의 기고문. '완전하고 자유로운 하나의 코리아'라는 제목으로 한반도 통일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역시 국정원 간부의 제안으로 쓴 글이다. 테리의 언론 기고문은 그러나 미국 국가안보에 위해가 되는 요소나, 한미 관계, 한반도 문제에 악영향을 끼칠 내용이 없다. [포린 어페어스 누리집] 시민언론 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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