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북풍과 북서풍이 예고돼 있어 북한군의 활동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한국전쟁 발발 73주년을 하루 앞둔 24일 합동참모본부가 정례브리핑에서 내놓은 말이다. 언제부터인지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와 일반 국민이 하늘을 쳐다보며 바람의 방향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방북이 20일 밤 끝나자마자 도돌이표가 된 '하늘 걱정'이다. 이번에도 일개 탈북자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가 걱정의 출발점이다. 자유북한운동연합(대표 박상학)이 이날 밤 경기도 파주에서 전단 30만 장과 K-드라마와 가요가 담긴 USB, 미화 1달러 지폐 등을 대형 풍선 20개에 띄워 보냈다고 21일 밝혔다. 이들이 전단을 다시 살포한 시간은 푸틴 대통령이 평양을 떠난 시점과 거의 일치한다. 지난 5월 28~6월 9일 네 차례에 걸쳐 오물풍선을 띄워 보낸 북한은 삐라가 다시 분계선을 넘으면, 몇십 배의 보복을 공언해 온 터.
김여정 당중앙위 부부장은 21일 담화에서 "국경 부근에 또다시 더러운 휴지장과 물건짝들이 널려졌다. 분명 하지 말라고 한 일을 또 벌였으니 하지 않아도 될 일거리가 생기는 게 당연하다"면서 오물 풍선 살포를 예고했다. 풍향이 다시 중요해진 까닭이다. 정부가 '표현의 자유'를 운운하며 탈북자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를 사실상 방관하면서 끝 간 데 없이 계속될 것으로 보였던 전단-오물의 더러운 싸움이 주춤해진 것은 지난 10일 새벽부터다. 정부는 2018년 이후 처음으로 대북 확성기를 다시 트는 것으로 기름을 부었다. 상황이 잠잠해진 것은 혼돈의 3축이 모두 한발 물러선 덕분. 통일부는 11일 "상황 공유를 위해" 대북 전단 살포 단체들과 소통을 갖는다고 발표했다. "전단 살포 자제를 요청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통일부의 공식 입장이었다.
탈북자단체들과 공유할 '상황'이 무엇인지 아리송할 따름이다. 지난 4일 기세 좋게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한 합참은 불과 2시간 방송 뒤 스위치를 껐다. 긴장 고조를 걱정한 '미국의 손'이 작용한 결과다. 필립 골드버그 주한 미 대사가 11일 워싱턴의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대담에서 '표현의 자유'를 원칙적으로 지지하면서도 "긴장을 고조시킬 게 아니라 완화할 필요가 있다"라고 한마디 한 게 주효한 게 분명하다.
한미 동맹을 맹신하는 정부에 미국의 한마디는 힘이 세다. 유엔사령부 모자를 쓴 주한미군이 13일 오물풍선과 대북 확성기 방송에 대한 동시 조사에 착수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5월 31일 자 '정부 입장'을 통해 "북한이 감내하기 어려운 상응 조치를 취하겠다"라면서 내놓은 확성기 카드가 쏙 들어갔다. 덕분에 찾아온 분계선의 평화는 채 열흘을 지탱하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역할은 보이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더러운 싸움'의 재연 조짐에도 정부의 역할은 보이지 않는다. 기껏해야 통일부 공무원들을 동원해 탈북자단체들과 '상황'을 공유케 하는 정도가 예상될 뿐이다.
남북으로 뻗은 한반도에서 바람의 방향은 공평하다. 1~6월 주로 북에서 된바람이 불고, 7~12월엔 주로 남에서 마파람이 분다. 정부가 지금처럼 엉거주춤한 자세를 유지하면 머잖아 시작될 남풍의 계절에 탈북자단체들의 대북 전단 살포는 더 잦아질 수밖에 없다. 후원자들에게 활동을 입증하기 위해 북풍이 부는 계절에도 무리해서 전단을 살포한 그들이다. 이처럼 무엇 하나 해결하기는커녕 악재를 쌓아가기만 하는 게 윤석열 정부의 특징이다.
북러 '포괄적 전략 동반자 조약' 뒤 적극적인 대러 외교로 러시아의 정확한 의도를 파악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장호진 국가안보실장이 23일 "만약 러시아가 북한에 고도의 정밀무기를 제공한다면, 살상무기든 비살상무기든 우크라이나에 공급할 것"이라고 경고한 게 전부다. 이 역시 주권국다운 주도적 행동이 없이 러시아의 동향을 바라만 보겠다는 말이다. 해서 바라볼 게 많아질 수밖에. 푸틴 대통령은 미국과 서방의 대우크라이나 정밀무기 제공을 대북 군사-기술 협력의 전제로 내건바, 앞으론 우크라 전선에서 날아 오는 뉴스까지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국민은 대책 없이 하늘을 쳐다보고, 정부는 러시아의 행동에 더해 우크라 전황까지 살펴야 한다. 국민도, 정부도 '천수답 신세'가 된 것이다.
주체적 결정이나 행동이 없는 정부일수록 검토할 게 많아진다. 파주 경찰서는 경기도가 자유북한운동연합의 대북 전단 살포에 대해 항공안전법 위반 혐의로 21일 의뢰한 수사에 대해 이틀이 지나서도 "법리 검토가 선행돼야 할 상황"이라는 한가한 입장을 내보이고 있다. 국가안보실에서부터 합참을 거쳐 일선 경찰서까지 관망하고, 검토하고, 살펴보는 꼴이다. 중간단계를 생략하면 탈북자단체와 국가안보실이 협업하는 구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통령과 국방장관은 "즉, 강, 끝"이니, "(미국의)힘에 의한 평화"니 목소리만 높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 대북 전단 살포는 성공적인 사업이 되고 있다. 전단 살포 단체들은 후원자들의 재정 지원과 언론의 관심을 먹고 산다. 언론 관심이 높을수록 활동 홍보가 되는 만큼 재정 지원도 튼실해진다. 자유북한운동연합의 전단 살포가 북한의 오물풍선 부양으로 이어져 국내외 관심을 끌자, 탈북자단체 간에 경쟁 양상마저 보인다. 겨레얼통일연대(대표 장세율)가 지난 7일 밤 전단 20만 장을 또 살포한 게 그 징후였다. 22일 또 다른 탈북자단체 '큰샘'은 강화도에서 쌀과 1달러 지폐, 구충제, USB 등을 담은 페트병 200개를 북으로 향하는 조류에 맞춰 방류했다. 지난 7일에도 페트병 500개를 방류했던 단체다. '남풍의 계절'이 시작되는 7월 이후에 더욱 기승을 보일 대북 전단 살포 또는 방류 붐이 예상되는 대목이다.
그러잖아도 6월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연초부터 서해 경계선 사수 방침을 하달하고 처음 맞는 꽃게잡이 철이기도 하다. 북한 인민군이 4월부터 군사분계선 부근에서 벌이는 '특이동향'의 목적은 군사적으로 방어책인 동시에 정치적으론 남한과의 단절이다. 불모지 조성, 전술도로 개·보수, 대전차 방벽 건설을 하면서 세 번이나 분계선을 넘어 우리 군의 경고 사격과 경고 방송 뒤 복귀했다. 남북이 벽 쌓고 따로 살자는 북한을 자극하는 가장 효율적인 비군사적 도발이 대북 전단 살포다. 그럼에도 이를 제지하지 않는 것은 국내 정치적 난관의 돌파구로 삼으려는 '정략적 꼼수'가 아니라면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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