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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8.15 통일독트린' 익숙하더니... 김일성 흡수통일론 판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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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국내의 통일 가치관과 역량을 확고히 하고, 둘째 북한 주민으로 하여금 변화를 이끌어 내며, 셋째 국제사회와 연대해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광복절 제79주년 경축사에서 내놓은 이른바 '8.15 통일 독트린'의 골자다. 우리 안에서 준비를 해서, 북한 체제를 붕괴시키고, 국제사회와 함께 흡수통일을 하겠다는 선언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15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79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2024.8.15 [대통령실 제공] 연합뉴스

김일성 "북한 혁명 역량 강화하고, 남한 내 인민혁명 유도"

윤석열 "국민 자유통일 역량 강화하고, 북한 내 변화 유도"

한반도 거주민에게 8.15는 일제 식민지의 연대기가 끝난 날이자, 분단의 암울한 연대기가 시작된 날이다. 환희와 비탄을 하루에 소화해야 하는 날이다. 민족의 숙적 '일제'를 최소화하고 '북한'을 최대화한 대통령의 한마디는 전복적 역사관을 고스란히 노출한 데 그치지 않는다. 통일 담론을 꼬박 60년 전 수준으로 퇴행시켰다.

1964년 2월 27일 북한 당중앙위원회 제4기 제8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이 내놓은 '3대 혁명역량 강화'론과 판박이기에 하는 말이다. 북한판 흡수통일론이었다. 그는 "첫째, 공화국 북반부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잘하여 우리의 혁명기지를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더욱 강화하는 것이며, 둘째 남조선 인민들을 정치적으로 각성시키고 튼튼히 묶어 세움으로써 남조선의 혁명역량을 강화하는 것이며, 셋째 조선 인민과 국제혁명역량과의 단결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내부의 준비-남한 내부의 정치적 각성 유도-국제적 연대의 구조가 60년 뒤 남한 대통령이 내놓은 통일 전략의 얼개와 판박이다. 흡수통일의 대상이 남한에서 북한으로 바뀌었고, '혁명'이 '자유'로 대체됐을 뿐이다. 윤석열 정권이 '자유의 북진'을 노래한다면, 김일성 정권은 '혁명의 남진'을 되뇌었다.

남이나 북이나 각각 상대방을 정치적으로 각성시키겠다는 둘째 과제가 중요하다. 대통령은 "북한 주민들이 자유 통일을 강력히 열망하도록 배려하고 변화시키는 과제"로 △'연례 북한 인권 보고서' 대내외 전파 △북한 인권 국제회의 추진 △북한 자유 인권 펀드 조성을 다짐했다. 마지막은 북한 주민이 자유의 가치에 눈을 뜨도록 각성시키기 위한 '정보접근권' 확대다. 남한 라디오, TV 방송을 최대한 북한 주민에 전달하도록 지원하겠다는 말이다. "북한 주민의 자유와 인권을 추진하는 민간활동을 적극지원하기 위해 조성하겠다"고 밝힌 게 '북한 자유 인권 펀드' 조성이다. 북한 내부의 체제 이반 세력을 일떠세우려는 의도가 노골적이다.

북한 조선중앙TV가 김일성 생일(4월 15일)을 기념해 방영한 다큐멘터리. 김일성 주석이 '사향가'를 부르는 장면이다. 2005.4.15. [조선중앙TV 촬영] 연합뉴스

60년 퇴행한 담론, 모든 흡수통일기도는 실패했다

김일성은 남한 내부의 모순을 최대한 첨예화시키고 지하당 조직의 확대, 다양한 형태의 통일전선 형성으로 사회 혼란을 유도, 남한 내부에서 인민혁명이 일어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한 방면으로는 남조선 인민들에게 꾸준히 우리 당의 영향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미제와 이승만 역도를 반대하여 궐기하도록 해야 하며, 다른 방면으로는 북반부 민주기지를 더욱 철옹성같이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셋째 국제사회의 지원 대목에 접어들면 착잡해지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의 말대로 "분단이 국제정치의 산물이었듯이 통일은 우리 혼자 이뤄내기 쉽지 않다." 통일 독트린이 삼천포로 빠진 건 이 지점에서다. "통일 대한민국이 세계 평화와 번영에 기여하는 나라가 될 거라는 믿음을 국제사회에 널리 확산시켜야 한다"는 게 요지였다. '국제한반도포럼'을 창설, 동맹과 우방국과 자유의 연대를 공고히 하겠다는 게 방책 아닌 방책. 포럼이 통일을 앞당길 거라는 구상이 참으로 담대(?)하다. 물론 대통령이 빙빙 돌려서 말한 대목의 요체는 동맹과 우방으로부터 통일 지원을 받겠다는 말일 게다.

김일성 역시 우회적으로 말했지만, 통일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국제적 평화 역량이 성장하고 평화운동이 강화될수록 조국통일 사업에 더욱 유리할 것이기에 세계 평화옹호운동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립통일교육원 북한지식사전은 이를 "한반도 공산화 통일을 용이하게 할 수 있는 국제적 여건을 조성하려는 외교적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는 말"이라고 해석했다.

일본 패전일인 15일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도쿄 지요다구 야스쿠니신사에서 남색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욱일기와 일장기를 들고 있다. 2024.8.15. 연합뉴스

반대세력을 사회 교란하는 '무서운 흉기'로 매도  

김일성의 3대 혁명역량 강화전략은 실패했다. 누구도 아닌, 손자의 손에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김정은은 작년 말 당중앙위 전체회의에서 김일성의 유훈을 내버리고 남북관계를 '적대적인 두 국가'로 규정했다. 김일성의 통일 전략이 추진되는 동안 수많은 북한 주민들이 고통을 겪었다. 북한붕괴를 전제로 한 흡수통일론에 취해 남북관계를 악화키고, 한반도 안보상황의 주도권을 잃었던 이명박근혜 정부도 실패했다. 남한 대통령의 3대 통일 추진 전략은 성공할 것인가?

성공 여부를 차치하더라도 남한 주민들 역시 고난의 세월을 앞에 둔 건 분명해 보인다. 대통령은 습관적으로 국민을 분단시켜 왔다. 이번에도 "가짜 뉴스에 기반한 허위 선동과 사이비 논리로 자유 사회를 교란시키는 사이비 지식인"을 '무서운 흉기'이자 '반자유, 반통일 세력'이라고 규정했다. '자유통일'을 하겠다면서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폭탄선언이다. 늘 그렇지만 그가 말하는 '자유'가 무엇인지 당최 이해가 안 된다. 이번 경축사에 50번이나 외쳤다던가. 뒤죽박죽임을 본인만 모르는 것 같다.

'8.15 통일 독트린'에서 가장 생뚱맞은 대목은 대화 제안이었다. 둘째 전략, 즉 북한 주민에 정보접근권을 허용, 대놓고 북한 내 체제 이반 세력을 지원하겠다고 다짐해 놓고 곧이어 남북 당국 간 실무차원의 '대화협의체' 설치를 제안했다. "남북대화의 문을 활짝 열어놓겠다"면서 긴장완화를 포함해 경제 협력, 인적 왕래, 문화 교류, 재난과 기후변화 대응까지 어떠한 문제라도 다루자고 했다. 그런데 "남북대화는 보여주기식 정치 이벤트가 아니다"라는 주장은 대선 유세 과정에서 화해협력을 추진했던 전정부를 비난할 때 쓰던 말. 역시 뒤죽박죽이다. 아이들이 장난삼아 허공에 띄운 비누방울처럼 곧 소멸될 제안이 아닐 수 없다. 북한은 17일 저녁 현재 일언반구도 없다. 물론 제안자조차 반응을 기다리지도 않았겠지만.

북한 청년학생들이 15일 평양 개선문광장에서 불꽃놀이를 보며 야회를 열고 있다. 북한은 광복절을 '8.15'나 '조국해방기념일'이라고 부른다. 2024.8.16.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하필, 남북이 하나되어 일본 규탄하는 광복절 택일 

흡수통일론은 경제적, 군사적 자신이 있을 때 나온다. 제2의 한국전쟁이 전제에 깔려 있다. 북한은 1970년대 초까지 경제적, 군사적으로 남한에 앞섰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김일성조차 광복절에 "대남 사회혼란을 유도하여 남한 내부에서 인민혁명이 일어나도록 하겠다"는 주장을 내놓지는 않았다.

이날이 어떤 날인가. 함께 일제의 군홧발에 짓밟히고, 함께 해방의 희열을 맛보았으며, 함께 분단 속으로 갈라진 날이 아니던가. 각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으로서가 아니라, '민족'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는 날이 아닌가. 그리하여 식민지배의 원흉이자, 분단의 원흉을 하루만이라도 목청껏 지탄하는 날이 아닌가. 남한 대통령은 하필 이날 대북 흡수통일론을 펼쳤다. 반민족적 택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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