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는 과연 정보기관 통제할 수 있나, 근본적 의문
국가정보원은 수미 테리 사건을 미국 연방검찰이 기소한 이후에나 통보받았다, 고 한다. 작년 4월 폭로된 미국 정보기관의 용산 대통령실 도청에 대해선 그게 도청이었는지 또 다른 방식이었는지 확인해 줄 수 없고, 확인할 지에 대해서도 한 번 짚어봐야 한다고 말했다, 고 한다. 국군 정보사령부 비밀 요원(블랙) 명단 누출 사건에 대해 방첩사령부는 "수사 중인 사건엔 일체 말할 수 없다"는 말로 침묵을 지켰다, 고 한다. 지난 29일 국회 정보위는 단순히 허탈감을 준 게 아니다. 존재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대민외교 타격 간과한 ’외교관 출신 국정원장‘
미국 연방검찰의 수미 테리 기소로 주미 대사관에 배속된 국정원 화이트 요원들의 활동이 위축된 데 더해 국군 정보사령부 블랙 요원들의 명단이 누출됐다. 나라 안팎에서 공개, 비공개 정보활동이 모두 난관에 부딪힌, 전례를 찾기 어려운 '정보 참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이날 정보위는 '봉숭아 학당' 수준에 머물렀다. 특히 명백한 정보 실패에도 책임을 자임하기는커녕 태연하기 그지없는 정보기관 수장들의 태도가 말문을 닫게 한다.
정보위 야당 간사 박선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이날 "가장 논쟁적인 부분"은 수미 테리 사건이었다. 연방수사국(FBI)이 2013년부터 꼬박 10년 동안 동향을 감시하고, 두 차례 조사를 거쳐 테리의 자택 압수수색을 했으며, 국정원 요원과 수시로 전화와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은 휴대전화도 압수했는데 기소 뒤에나 통보받았다는 말이다. 기소는 작년 6월 5일 조사 종료 뒤 13개월이 지난 이달 16일 단행됐다. 한미 정보당국이나 양국 정부가 나서 '사건화'를 막을 수 있었던 기간이었다.
그런데도 조태용 국정원장은 기소 뒤에나 인지한 사실에 대해 별다른 해명이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면서 내놓았다는 말이 "수미 테리 건으로 한미 동맹 훼손은 일절 없다. 안보 협력에도 전혀 문제 없다"였다. 여당 간사 이성권 국민의힘 의원은 "만에 하나 안보협력에 문제가 있다면 안보협력이 축소되거나, 파기될 수 있는 데 전혀 그런 점이 없다고 국정원장이 강조했다"고 전했다. 더불어 "이 건과 한미 간 안보협력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동문서답에 적반하장이다. 사건의 핵심은 한미 정보협력에 문제가 없는데도 미 사법당국이 수미 테리를 기소한 것이다. 또 안보협력은 정보 분야에서 주로 북한의 위협에 맞서기 위한 협력을 말한다. 안보협력은 한반도 안팎에서 벌어지지만, 수미 테리 사건의 여파가 미칠 장소는 미국이다.
수미 테리 기소 전 미 국가정보국장 방한은 묻지도 않아
주미 대사관에 배속된 국정원 화이트 요원의 활동만 위축되는 게 아니다. 정상적인 대민 외교(public diplomacy)도 제동이 걸릴 수밖에 없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외교관 출신 국정원장'이 "문제 없다"고 둘러대는 건 단순히 무능과 무책임의 증거가 아니다. 정보활동과 대민외교, 정보협력의 공간적 무대를 혼동한 것은 물론, 수미 테리 사건이 한미 관계에 미칠 지속적인 악영향에 대한 문제의식이 결핍됐음을 만천하에 고백한 꼴이다.
한 정보 소식통은 "미국 측에서 국정원 핸들러(요원)에게 경고가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 같다. 테리에게도 몇 차례 경고가 있었던 걸로 안다"고 전했다. 미국의 의도를 간파했건 하지 못했건, 그 자체가 중차대한 '정보 실패'다.
미 연방검찰이 기소를 결정하기 18일 전인 지난 6월 28일 애브릴 헤인스 미 국가정보국장이 은밀히 방한, 윤석열 대통령과 용산 접견을 한 사실은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의원들의 질의가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문재인 정부 시절 헤인스 국장의 두 차례 방한 당시 대통령 접견 내용 및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을 공개했다. 정부가 유독 이번 방한 행적을 비밀에 부친 이유도 확인할 수 없었다. 정보위 소속 의원 모두에게 실망스러운 대목이다.
테리 사건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지, 한미 간 진행 중인 논의 내용은 무엇인지 등 무엇 하나 밝혀진 게 없다. 수미 테리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적인 정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윤석열 정부 국정원은 테리에게 주로 △핵협의그룹(NCG)과 관련한 여론 조성 △한일 화해 △미 전략핵잠함·전폭기 등 전략무기 수시 배치 △한미 동맹의 중요성 강조 등을 집중적으로 주문했다. 한미 안보협력이 좋은지도 의심스럽지만, 정말 좋다면 테리의 기여분도 있다. 이를 위해 미 싱크탱크에 3만 7000달러의 거액을 희사하면서까지 테리를 활용한 주체도 윤석열 정부 국정원이다.
한미 논의나 향후 대책도 깜깜이
하다못해 박정희 유신독재 정권도 1970년대 코리아 게이트 와중에 박동선 씨를 보호, 두둔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박 씨의 하원 청문회 증언을 조건으로 연방검찰의 기소를 취소시켰다. 9년을 복역한 로버트 김 사건의 경우 더 많은 정성을 기울였다. 우리 국회 여·야 의원들이 탄원서를 제출한 건 물론, 노무현 대통령이 미국 방문 길에 직접 석방을 탄원했다. 역대 어느 정권도 재미동포를 이용만 하고, 나 몰라라 한 적이 없단 말이다. 이제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 가운데 누가 한국 정부의 입장을 옹호할 것인가.
폭로 1년 3개월이 지난 미국 정보기관의 대통령실 도청 사건에 대한 국정원장의 태도 역시 가관이다. 미국 스파이가 대한민국 국가안보실장(김성한)과 대통령실 외교비서관(이문희)의 통화 내용을 감청한 사실은 새삼 진위를 따질 일이 아니다. 미 행정부 스스로 인정한 일이다. 그렇기에 폭로 직후 워싱턴을 방문한 김태효 국가안보실 제1차장의 전언대로 "만나는 미국 당국자마다 유감을 표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항의는커녕 되레 미국을 두둔했음에도 미 정보기관은 테리를 기소한 뒤에나 이를 통보했다. 웃는 낯에 침을 맞았으면서도 "그게 도청이었는지 확인해 줄 수 없을 뿐 아니라, 확인할지도 짚어봐야 한다"는 국정원장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더 중대한 안건은 국군 정보사령부 군무원의 블랙 요원 신상 및 개인정보 누출이다. 신분을 숨긴 채 중국을 상대로 정보활동을 해 온 요원들이 무더기로 위기에 처했다. 수미 테리 사건이 국정원과 외교부의 대미 활동에 지장을 초래한다면, 정보사 사건은 대중 활동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밖에 없다. 중국 공안은 연전에 신분이 노출된 우리 정보 요원들을 대낮에 길거리에서 구타하면서 끌고 다닌 적도 있다. 명단 누출 뒤 "중국 내 정보사 블랙 요원들이 사실상 도륙됐다"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중국 내 정보사 블랙 요원 신변 위기
특히 2018년 정보사 간부들이 100건이 넘는 군사기밀과 함께 비밀 요원의 명단을 해외에 판 사건이 발생한 지 6년 만에 다시 재발한 것으로 정보기관 관리에 구조적인 문제를 남겼다. 문제는 방첩, 특히 군 내 방첩 업무를 담당하는 국군 방첩사령부의 태도다. 이날 정보위에 출석한 여인형 방첩사령관은 "수사 중"이라는 이유로 의원들이 던진 5~6개의 질문을 무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여느 언론 브리핑에서나 할 말을 국회 정보위 소속 의원들 앞에서 한 꼴이다.
국정원이 FBI에 뒤통수를 맞고, 정보사 블랙 요원들의 신변이 위기에 처했으며, 방첩사의 방첩 기능이 허점을 노출한 전대미문의 위기다. 미국과 중국 내 정보활동이 동시에 위기에 처한 것 역시 유례를 찾기 어렵다. 이런 정보기관, 이런 정보위가 과연 국가 안보와 국민 안위를 지키는 역할을 해낼 수 있을지, 국회의 정보기관 통제가 과연 가능한지, 심히 걱정된다. 총체적인 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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