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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핵독트린 개정, 핵 전쟁의 문턱 다시 낮췄다

시민언론 민들레(Dentdelion)

by gino's 2024. 10. 4.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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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핵 독트린(교리) 개정을 마무리하고 있다. 몇 가지 전제조건을 달았지만, 핵전쟁의 문턱을 상당히 낮췄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3달여 임기를 남긴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에 '공'을 넘겼다. 분명한 사실은 미국이 우크라이나의 요청을 받아들여 서방이 제공한 장거리 미사일로 러시아 공격을 허용한다면 '실제 상황'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5일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열린 안보협의회 핵 억제력 상임 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이날 회의에서 핵독트린의 개정을 결정했다. 2024.9.25. AFP 연합뉴스

전술항공기, 무인기도 포함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29일 국영 TV에 "(핵교리) 개정 내용이 준비됐고, 공식화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지난 25일 크렘린궁에서 열린 안보협의회 '핵 억제력 상임 회의'에서 푸틴 대통령이 밝힌 핵교리 개정 작업이 완료됐음을 뜻한다. 푸틴은 이날 회의 모두 발언에서 "핵보유국이 (러시아 공격에) 포함되거나, 핵보유국의 지원을 받는 비핵국가가 공격할 경우"를 핵무기 사용의 전제조건으로 추가했다. 또 △(러시아를 겨냥한) 대규모 공중 또는 우주 공격무기 발사나 △그러한 무기가 국경을 넘을 것이라는 믿을만한 정보를 확보하는 순간 핵무기 사용을 고려할 것이라고 밝혔다. 푸틴은 공중 공격무기의 종류로 전략 및 전술 항공기와 순항 미사일, 무인기(UAVs), 초음속 및 다른 항공기를 예시했다. 러시아와 연방국(the Union State)을 이루는 벨라루스에 대한 침공 시에도 핵무기를 사용할 권리가 있다고도 강조했다. 연 2회 열리는 이날 회의에서 이 같은 내용의 개정 방침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개정 내용은 모두 러시아나 동맹국이 핵무기나 대량살상무기(WMD), 국가 존립을 위협하는 규모의 재래식 무기의 공격을 전제로 대응 목적으로 핵무기 사용을 규정한 과거 교리의 문턱을 대폭 낮춘 것이다. 서방이 제공한 무기로 러시아 본토 공격을 추진하는 우크라의 움직임을 위협으로 규정, 핵사용 대상에 포함한 게 핵심이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 대통령은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들을 상대로 지원 무기의 대러시아 사용 허가를 거듭 요구하고 있다. 대표적인 무기는 영국제 스톰섀도 공대지 크루즈 미사일, 프랑스제 SCALP 미사일, 미국제 전술미사일시스템(에이태큼스) 미사일이다. 크림반도를 비롯해 우크라 전쟁을 수행하는 러시아 군기지와 대도시를 타격할 수 있는 무기들이다.

러시아 전승기념일인 5월 9일 모스크바 도심에서 벌어진 군사퍼레이드에 등장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야르스(Yars). 러시아의 대표적인 전략무기의 하나다. 2024.5.9. AFP 연합뉴스

'미국 수준' 벗어난 핵태세 강화

2020년 러시아의 핵교리는 핵무기 사용 조건으로 △러시아를 겨냥한 탄도미사일이 날아오는 경우 △러시아나 동맹국을 겨냥해 핵무기나 다른 대량살상무기가 사용됐을 경우 △중요한 정부 또는 군사시설에 대한 피격으로 러시아의 핵 대응능력이 저해될 경우 △러시아 국가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재래식 무기 공격 등 4가지를 명시했었다. 이번에는 무기의 종류를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비핵국가도 핵보유국의 지원 하에 러시아를 공격할 경우를 모두 핵 공격 대상으로 삼겠다는 경고를 담았다.

미국과 나토는 일제히 러시아의 핵교리 개정을 비난하고 나서면서 우크라에 대한 지원 의지를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우크라의 지원무기 사용 범위 변경에 대한 결정은 미루고 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25일 미 MSMBC 방송에 "전적으로 무책임한 결정"이라고 비난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피터 스타노 대변인도 "러시아 지도자가 무책임하고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을 계속하고 있다"라면서 푸틴의 의도를 '핵 도박'이라고 규정했다. 이번 개정은 2022년 2월 24일 우크라 침공 이후 그가 몇 차례 제기했던 '핵 언급'과 궤를 달리한다.

러시아 대통령의 수행원이 항상 휴대하는 핵가방 체게트(Cheget). 유사시 총사령부에 핵무기 발사를 지시하는 통신수단이다. 위키페디아

푸틴은 우크라 전황이 위기 국면에 처하거나, 서방의 지원이 강화될 때마다 '미국 수준'에 맞춘 핵 운용 지침 변경을 시사했었다. 2022년 12월 "미국은 (핵무기) 선제 타격 개념에서 (상대방 핵무기의) 무장 해제를 위한 타격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고 지적, 선제타격을 교리에 포함할 것을 암시했다. 작년 2월 21일 국정연설에선 미·러 신전략핵무기감축협정(START2)의 핵심 요소인 미국 측의 러시아 핵시설 사찰을 중단시킴으로써 협정의 효력을 정지시켰다. 같은 해 3월엔 벨라루스에 7월까지 전술핵을 배치할 것이라고 발표하고, 배치 뒤 전술핵 사용을 가정한 연합훈련을 했다. 미국이 벨기에·독일·이탈리아·네덜란드·튀르키예 등에 각 20개씩 모두 100개의 전술핵(B61 중력탄)을 배치하고, 나토 차원에서 연합훈련을 벌여 온 전철을 되밟은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 수준'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이번 개정에선 러시아에 대한 공격 주체와 공격무기의 범위를 대폭 늘림으로써 '미국 수준'을 넘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국경에서 약 60km 떨어진 러시아 브리얀스크 지역의 원유 저장소가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을 받고 화염에 휩싸였다. 2024. 01 19 [AP=연합뉴스]

비억제 목적 핵사용 가능성 열어놓은 미국 NPR

미국 역시 '선제사용 금지(NFU)'와 '단일 목적(SP)' 원칙을 배제하면서 공격적인 핵태세를 유지하고 있다. SP는 적성국의 핵 공격을 억제하거나, 반격 목적을 위해서만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원칙. 적성국의 핵 공격 조짐과 무관한 목적에도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2022년 11월 8일 발표된 바이든 행정부의 핵태세(NPR)보고서는 △적의 공격 억제 △동맹과 우방에 대한 안보 공약 △억제 실패 시 미국의 목적 달성 등 3가지를 핵무기의 역할 및 목적으로 규정하면서 NFU와 SP 원칙을 배제했다. 미국과 동맹, 우방에 '전략적 수준의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적성국의 '비핵능력(재래식 전력)'이 제기하는 '용납하기 어려운 수준의 위협'이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푸틴이 밝힌 러시아 핵교리 개정 내용은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대상에 '핵보유국의 지원을 받는 비핵보유국'을 명시, 우크라와 나토 회원국을 모두 공격 대상으로 지목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재래식 무기에 의한 위협에 대한 대응도 포괄적이다. 2020 핵교리는 미국 NPR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중요 정부·군사시설 타격으로 러시아의 핵 대응능력이 저해될 경우와 국가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수준의 공격으로 적시했다. 푸틴이 연설에서 강조한 공중·우주 공격무기는 광범위하다. 특히 공중 공격무기에 적성국의 전술 항공기와 순항 미사일, 무인기 등을 포함한 것은 이번 핵교리 개정이 서방 장거리 미사일로 러시아를 타격하려는 우크라를 정확하게 겨냥한 것임을 확인하게 한다. 그러나 2024 핵교리 전문이 공개되지 않아 정확한 내용은 확인할 수 없다. 러시아가 모호성을 유지하려 한다면 비공개할 가능성이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 21일 미국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에 앞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상원의장, 왼쪽)과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에게 우크라이나 국기를 전달하고 있다. 국기에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최근 방문한 최전선에서 받아온 우크라이나 병사들의 서명이 가득 적혔다.  2022.12.21  로이터연합뉴스

미국, 대선 전까지 현상유지할 듯

오는 11월 대선을 앞둔 바이든 행정부는 미국이 간접적으로 개입해 온 우크라 전쟁과 중동 전쟁의 현상 유지를 바라는 것으로 관측된다. 유엔 총회 참석차 미국을 방문한 젤렌스키 대통령의 장거리 미사일 사용 요청을 승인하지 않았다. 러시아와 미국의 핵 태세 강화는 세계가 핵 벼랑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간다는 점에서 지역 분쟁의 범위를 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윌리엄 번스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이미 2022년 9월 9일 러시아가 우크라 전쟁에서 결정적 패배의 순간을 맞게 되면 저준위 전술 핵무기를 사용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푸틴은 작년 2월 START2를 효력 정지하면서 핵실험 재개를 시사했고, 바이든 행정부는 2021년 9월 이후 처음으로 지난 5월 핵실험(임계 이하)을 실시했다.  중국은 2030년까지 1000여 개의 전략 핵탄두를 배치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은 러시아가 우크라 전쟁 뒤 중국에 고농축우라늄 원료를 공급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비핀 나랑 미 국방부 우주방어정책 담당 차관보 대리는 공직을 떠나면서 지난 8월 1일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서 한 연설에서 START2 재개는 물론, 핵 감축협상의 전망이 흐릿한 상황에서 미국은 전략핵무기 배치를 늘려야 할지도 모른다고 밝힌 바 있다. 갈수록 '핵 구름'이 짙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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