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문제에 일본이 또 고개를 돌리고 필요한 말을 하지 않으면 거기에 대해서 엄중하게 따지고 변화를 시도해야겠지만, 중요한 건 일본의 마음이다. 마음이 없는 사람을 다그쳐서 억지로 사과를 받아낼 때 그것이 과연 진정한가. 또 한일관계에 도움이 되는가." (김태효, 16일 KBS 인터뷰)
"우리가 말할 것은 말하고 일본 측이 해야 될 행동을 촉구하되, 한일 간 협력으로 우리가 얻어낸 성과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확보를 하고 우리가 리더십을 행사하겠다." (김태효, 16일 자 조선일보 인터뷰)
두 전과자의 '의리'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이 4번이나 바뀌어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실세, 김태효 국가안보실 제1차장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범죄 행위를 반성하고 묵묵히 국가를 위해 일했으면 굳이 헤집을 필요가 없었을 게다. 하지만 관대하게 보아주기엔 왜곡된 역사관에서 비롯된, 아니 역사관이 없는 안보기술자의 손때가 도처에 묻어난다.
대법원이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유죄가 확정된 건 2022년 10월 27일. 정확히 두 달 뒤인 12월 27일 윤석열 대통령이 사면했다. 이미 외교안보 정책과 관련, 대통령의 귀를 붙잡고 있는 실세를 신년 사면·복권 대상에 보란 듯이 포함했다. 군사기밀법은 '군사기밀을 보호하여 국가안보보장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청와대 대외전략기획관 시절 획득한 기밀을 갖고 나온 혐의가 인정됐다. 기밀을 다룰 권한이 해제된 뒤에도 기밀을 점유한 점이 처벌대상이 됐고, 고의성도 인정된 것.
그나마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던 국가정보원 생산 문건 2건과 국군기무사(현 방첩사) 작성 문건 1건을 외부로 반출한 혐의(대통령기록물관리법 위반)는 2심과 확정판결에서 제외됐다. 본인만 빠져나온 후안무치는 아니었다. 주군으로 모시던 이명박 전대통령(MB)에겐 같은 날 더 큰 은사(恩赦)가 베풀어졌다. 뇌물 및 횡령이라는 파렴치 혐의로 2020년 징역 17년 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던 그는 남은 징역 형기 14년 6개월을 면제받았다. 덕분에 MB 부부는 지난 12일 대통령 관저에 초대받아 저녁을 얻어먹었다. 게다가 국정 훈수까지 뒀다. 김 차장의 의리가 작용했을 거라는 추측을 하게 되는 대목이다. 미담 아닌 미담은 여기까지다.
'MB의 남자'에서 '윤석열의 남자'로
전과자에서 대통령의 존경과 총애를 받는 주인공으로 변신한 건 MB뿐이 아니다. 'MB의 남자'도 범죄자에서 국가안보의 실체로 날씬하게 변신했다. 대통령이 광복절에 발표한 통일 독트린을 작성하고, 16일에는 조선일보와 KBS 뉴스라인에 잇달아 얼굴을 내밀며 국정 설명을 주도했다. 지난 12일 안보라인 인사에서 국가안보실장으로 영전한 신원식 국방장관이 버젓이 있음에도 일개 차장이 국가 대사를 도맡은 것. 하다못해 통일부는 장관이 브리핑을 했다. 지난 4월과 6월, 잇달아 KBS에 출연해 현정부의 국가안보정책을 설명한 주체는 실장(장호진)이었다. 정권 출범 2년여 동안 김성한-조태용-장호진-신원식으로 실장 4명이 교체됐지만, 끄떡없던 '외교안보 사령탑'의 위세가 대단함을 새삼 일깨웠다.
그는 KBS 인터뷰에서 윤석열 정부에 쏟아지는 '친일' '매국' 비판에 종주먹을 흔들었다. 그러면서 내놓은 게 모두에 소개한 '마음론'이다. 조선일보 인터뷰에선 '친일 비판'이 분한 듯 성과론을 내놓았다. 한미일 협력으로 얻은 안보, 경제적 이익과 혜택을 함께 보아달라는 주문이다. 마음론과 성과론은 그의 오랜 주장이지만,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일본은 여전히 과거사 문제에 대해 고개를 돌리고, 필요한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를 엄중하게 따지고 변화를 시도했으며, 그리하여 변화를 이뤄낸 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죄진 이가 먼저 실토하는 경우를 보았는가. 다그치고, 억지로라도 단죄를 해야 한다. 그런데 그는 억지로 받아낸 사과는 의미가 없다고 단언했다. 일본이 진정한 마음으로 사과할 생각이 없으니, 굳이 사과를 구하느니 현실적 성과를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고 우긴다.
'일본의 마음'이 피곤하다?
죄수가 죄를 인정할 마음이 없으니, 다그치지 말고 그냥 넘어가자는 말과 다름없다. 피해자의 마음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해자의 마음을 챙겨주는 게 바로 친일이자 매국이다. 발언 내용이 물의를 빚자 18일 '대통령실 고위관계자'가 나서 "1965년 한일 국교수립 이후 수십 차례에 걸쳐서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가 있었기에 피로감이 많이 쌓여 있다"고 두둔한 것 역시 '일본의 마음'만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그런면서도 친일이라는 비판에는 발끈하며 그게 아니라고 종주먹을 들이댄다. 일제가 한반도 거주민에 범한 죄는 그와 MB가 저지른 일반 범죄가 아니다. 시효가 없는 반인도적 범죄다. 이러니 "용산에 일제 밀정 같은 존재의 그림자가 있다(이종찬 광복회장)"는 말이 나오지 않겠나. 이 회장의 아들이자, 대통령의 죽마고우인 이철우 연세대 교수는 "대통령 주위에서 이상한 역사의식을 부추기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19일 자 동아일보 인터뷰)
'일본의 마음'을 챙기는 그의 생각은 고질적이다. "한국인의 감정은 몇 년을 주기로 커다란 변화를 보이는 반면, 일본인의 마음은 한번 바뀌면 몇십 년을 간다"라면서 사과받을 한국인이 화가 나 있는 이유보다 사과해야 할 일본이 화가 나 있는 이유를 더 무겁게 봤다. 그가 성균관대 교수로 '자연인'이던 2015년 8월 쓴 조선일보 칼럼 '사과받는 나라와 사과하는 나라'의 한 대목이다. 요설일수록 디테일에 코를 박는다. 한일이 강제징용자 표기를 '강요된 노동(forced to work)'이라고 합의했는데 한국이 회의장에서 '강제노동(forced labor)'이라고 썼다고 질타했다. '강요된 노동'이건, '강제노동'이건 그 피해자의 마음에 대한 배려는 밤톨만큼도 없었다.
돌변한 MB, 외길 가는 윤석열 정부
그가 윤석열 정부에서 '지체된 성과'를 마음껏 달성하고 있다. 작년 8월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의에서는 북한 미사일 정보 실시간 제공을 문서화했다. '강요된 노동'과 '강제노동'의 차이를 따졌던 일본의 역성을 들었던 조선일보 칼럼은 한일 수교 50주년에 즈음해 쓴 글이다. '진격의 김태효'는 내년 6월 22일 한일 수교 60주년을 보고 있을 게다. 한일 상호군수지원협정(ACSA)과 한반도 돌발상황 공동대처 방안도 마련, 한일 관계를 사실상의 동맹으로 만들려는 게 최종 목표일 것.
나란히 전과자가 됐다는 점에서 동지애가 있을지 모르지만, MB와 김 차장이 늘 동지였던 건 아니다. 그가 이명박 정부에서 한일 정보보호협정(GISOMIA) 밀실 추진이 탄로나 사직하자마자 MB는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 독도를 방문하면서 역진을 시작했다. 그의 친일도, MB의 반일도 모두 한일관계에 악재가 됐다.
과거사 극복을 하지 않는 한 진정한 파트너는 되기 어렵다. 특정 정권이 진도를 나가봐야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 한반도와 일본의 마음과 마음이 만나기 전, 한일관계의 진정한 발전은 한낱 꿈에 불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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