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전역에서 긴장이 고조되고 폭탄이 떨어지면서 바이든 대통령의 외교관들은 모든 당사국에 진정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불명예스러운 종말을 향해 비틀거리는 문제적 대통령직의 역설이다. 바이든은 외교를 사랑할지 모르지만, 외교는 바이든을 사랑하지 않는다." (23일, 월스트리트저널 칼럼니스트, 월터 러셀 미드)
상황은 더 나아진다?
모든 인간이 시대의 산물은 아니다. 하지만 난세를 만나면 자신에게 익숙한 시대로 회귀하는 경우가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그랬다. 지나간 시대의 흑백 논리로 난세를 규정하고 되레 더 휘저어놓았다. 그 결과 세계는 더 혼란해졌지만, 본인은 "상황은 더 나아진다"라는 덕담을 남기고 퇴장한다.
4개월 뒤 백악관을 떠나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국제사회에 작별을 고했다. 지난 24일 바이든 대통령의 유엔 총회 연설은 일종의 고별 의식. 바이든은 공직에 몸담았던 52년의 세월이 두 개의 변곡점 사이에 있었다고 회고했다. 29세로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됐던 1972년, 세계가 직면했던 변곡점은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고, 미소 간 핵무기 경쟁 탓에 불확실성이 짙어졌던 냉전의 한복판. 세계는 자본주의-공산주의 진영으로 분열됐고, 중동은 전쟁으로 치달았으며, 미국은 베트남과 전쟁 중이었다.
객관적으로 두 번째 변곡점도 큰 차이가 없다. 유엔 연설 당일 이스라엘이 레바논 전역에 공습을 퍼부어 수백 명이 사망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고, 미·중 전략적 경쟁은 세계를 줄 세우고 있다. 그런데 바이든은 "세계가 '중심'을 잡고 있다"고 우겼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중심을 잡을 수 없으며, 세계에 무정부 상태가 만연해 있다"라는 아일랜드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1919년 세계에 대한 묘사일 뿐 아니라 2024년에도 유효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지금 세계엔 중심이 있다"고 주장했다. 중심의 실례로 코로나19 극복과 유엔 헌장에 따라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보장한 점, 또 기후변화와 청정에너지에 대한 미국의 사상 최대 투자 등 세 가지를 들었다.
"여러분도 자리에 연연하지 마라"
연설 24분 동안 유일하게 웃음을 자아낸 말은 "나는 내가 고작 마흔 살로 보인다는 걸 안다"라며 초반에 던진 아재개그였다. 그리곤 자신의 외교적 업적을 지루하게 나열하면서 중심론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가 지난 7월 대선후보 사퇴 순간을 돌아보는 대목에 유독 박수가 이어졌다. 바이든은 "대통령직을 사랑하지만, 국가를 더 사랑하기에 사퇴 결정을 내렸다"라고 회고했다. 엉뚱하게 좌중의 각국 지도자들에게도 자리에 연연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이어 세계의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나오면서 청중은 조용해졌다.
자신이 내린 주요 결정 중에서 우크라 지원을 단연 앞세웠다. "좋은 소식은 우크라 파괴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약화라는 푸틴의 전쟁, 그 핵심 목표가 실패했다는 점'이라고 자평했다. "우크라가 승리할 때까지 지원을 계속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우크라 전쟁은 세계를 민주주의 진영과 권위주의 진영으로 양분한 바이든 시대의 상징이었다. '냉전의 산물'인 그가 냉전시대의 양분된 세계로 회귀한 증거의 하나다.
이날 연설에서 두고두고 회자될 말은 중동 사태에 대한 언급이었다. 이스라엘군의 '반인도적 범죄' 탓에 4만 1000여 명의 가자지구 주민이 숨지고, 다시 레바논에서 수백 명이 죽어가고 있다. 그런데 바이든은 "상황이 악화됐지만, 외교적 해결이 여전히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이번에도 바이든-해리스 행정부의 중동 관련 발언은 늘 2단계론이었다.
작년 10.7 하마스 기습공격의 야만성과 피해를 장황히 늘어놓은 뒤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한껏 강조했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고통은 이스라엘의 자위권이 확고하게 난 뒤 고려할 사항으로 돌렸다. 미국이 카타르, 이집트와 함께 정전 및 포로석방 협상을 진행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국제사법재판소가 이스라엘군의 가자 침공을 '제노사이드(대량학살)'로 규정하고, 유엔 안보리에서 상정된 여러 개의 휴전결의에 미국이 거부권을 행사한 사실은 숨겼다. 미국은 그 와중에도 이스라엘에 전쟁자금과 무기를 건네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후보 역시 '닥치고 이스라엘 편'이기에 대선 결과와 상관없이 계속될 미국의 맹목이다.
불바다 속에서도 외교는 가능하다?
가자지구 전쟁에 하마스 원죄론을 지적한 바이든은 레바논 확전에선 헤즈볼라 원죄론을 강조했다. 10.7 뒤 헤즈볼라의 로켓 공격을 원인으로 든 것. 지난 9월 초까지 이스라엘-헤즈볼라의 교전 9600건 중 이스라엘이 자행한 공격이 7800여 건이었다는 사실(알 자지라)은 가렸다. 그냥 이스라엘-레바논 접경지역에서 너무 많은 이들이 피란을 가야 했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불특정 다수를 살상한 이스라엘의 호출기 및 휴대폰 폭탄 테러나 무차별 공습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외교적 해결이 가능하다고 우기니 누가 귀를 기울이겠나.
선 이스라엘 안보, 후 팔레스타인 주민의 안전 주장은 미국 스스로 사태 악화의 책임을 합리화하는 논리일 뿐이다. 오죽하면 대표적인 보수 칼럼니스트 미드조차 '바이든 외교의 마술적 사고'라고 꼬집었겠나. 미드는 역사상 어떤 미국 행정부도 이처럼 중동 외교에 전념한 적도, 이처럼 실패한 적도 없다고 질타했다.
이란을 핵 협정에 복귀시키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새로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대화를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의 수교를 추구했지만, 실패했다. 예멘 후티 반군의 홍해상 선박 공격도 외교적 해결책을 모색하다가 다시 실패했다. "바이든 임기 안에 중동 평화협상은 사실상 물 건너갔다"라는 내부의 목소리도 전했다. 우방국이건 적대국이건 갈수록 미국의 바람과 경고를 모두 무시하고 있다. 미국 외교관들은 자국의 중동 정책이 맹목적이라는 거의 보편적인 글로벌 인식과 싸워야 할 처지가 됐다는 진단이다. '외교에 정통한 미국 대통령'이라는 말은 농담이 된 지 오래다.
군사주의 확대한 '외교 대통령'
기실, 바이든은 세계사의 변곡점에 취임한 게 아니라 자신의 결정으로 변곡점을 열어갔다. 바이든이 취임한 2021년 1월 20일로 시계를 되돌려 보면 자명한 사실이다. 미-러 관계는 관리가 가능했다. 그해 12월 우크라의 나토 불가입을 보장하라는 러시아의 최후통첩을 묵살, 사실상 침공을 유도했다. 2022년 2월 말 침공이 시작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대러시아 경제제재를 가동했다. "오늘의 우크라는 내일의 대만해협"이라는 논리로 동아시아에 군사주의를 강화했다. 중동은 다시 화염에 휩싸였다.
"바이든이 세계를 뒤에 두고 떠나는 게 아니라, 세계가 바이든을 뒤에 두고 떠난다." 포린 폴리시 칼럼니스트 마이클 허쉬의 촌평은 정확한 말이 아니다. 오는 11월 미국 대선의 결과에 따라 '바이든2 행정부'가 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들고 있는 2024년 민주당 정강은 모든 공약의 주어가 바이든으로 돼 있다. 해리스는 특히 외교와 관련, 바이든의 말을 그대로 복창하고 있다.
미국과 세계는 트럼프 행정부(2017~2021)의 4년을 에피소드로 돌렸었다. 그러나 트럼프가 재집권한다면 되레 '바이든의 4년'이 한때의 에피소드가 될 수 있다. 바이든은 긴 연설 중 단 한 번 '한국'을 언급했다. 세계의 25%가 선거를 치르는 올해 평화적으로 미래를 선택한 나라의 하나로, 가나와 인도에 이어 한국을 언급했다. 그런데 지금 미국이 다른 나라의 '평화적 선거'를 상찬할 처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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