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의 미국도, 오바마의 미국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신줏단지처럼 모시는 자유민주주의의 미국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한국이 처한 정치, 경제, 안보의 모든 구조가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남북관계도 무너졌죠. 동맹의 틀 안에서 뭘 해보겠다구요? 미국과 뭘 공유하겠다구요? 트럼프가 경제적으론 실용적이라구요? 워싱턴은 이미 우파 민중주의가 장악했는데 (기왕의) 뻔한 채널을 만나봐야 뭐 합니까? (한미) 동맹에서 시작하면 답이 안 나옵니다. 거꾸로 접근해 총체적, 근본적 성찰을 할 때입니다."
8년 전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선 승리가 우발적 '사고'였다면, 이번 승리는 세계사적 '사건'이다. 통상 미국 대선이 끝나면 안보와 경제를 중심으로 한국에 미칠 영향을 따진다. 그 속에서 기회와 위기를 찾는다. 그러나 이혜정 중앙대 교수(61)가 전하는 지난 5일 미국 대선의 의미는 하나하나 떨어진 조각 그림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축적돼 대세가 된 '큰 그림(Big Picture)'이었다. 지난 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미국 대선 결과와 한반도 질서 변화' 현안토론회에서 이 교수의 발표와 곧이어 서울 마포구 공덕동 <시민언론 민들레> 사무실에서 가진 인터뷰 내용을 전한다. 트럼프의 귀환에 대해 한국 사회 일각에서 막연히 품고 있는 긍정적 기대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 돋보였다. 그의 토론회 발언도 문답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미국과 공유할 걸 찾는다고? 그게 없을 수도 있다
"기성언론 못 믿는다" 일본은 왜 경합주 찾아다녔나?
-한국 사회에는 미국 대선 결과를 위기로 보면서도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시각이 있다. 한국이 트럼프의 미국과 공유할 이익망을 촘촘하게 만들어 워싱턴에 전달하자는 제안도 있다.
"우리가 여전히 미국과 공유할 게 있다는 전제에서 나온 한 제안들이다. 다 좋은 얘기인데 이제 워싱턴은 '우파 민중주의'가 장악했다. 바이든의 미국도, 오바마의 미국도 돌아오지 않는다. 레이건의 미국도 아니다. 윤석열이 신줏단지처럼 모시는 자유민주주의의 미국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뭘 워싱턴에 전달한다는 생각을 하기 전에 할 일이 있다. 과연 우리가 트럼프의 미국과 공유할 이익이 있는지부터 돌아봐야 한다. 없을 수도 있어서 하는 말이다. 공유할 게 있다고 치자. 그런데 민중이 워싱턴을 다 장악했는데 빤한 채널에 전달해 봐야 뭐 하나. 일본 정부는 2016년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이번엔 경합주에 직접 나가서 유세를 지켜보았다. 기성 언론을 통해서는 변화를 읽을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우리가 그렇게 했나? 미국 민중이 어디로 가는 지를 지금이라도 현장에서 직접 봐야 한다. 우파 민중주의 미국과 어떻게 살 수 있는지 모색하는 첫걸음이다."
-우파 민중주의가 점령한 미국과 대한민국 사이에서 어떤 공존이 가능하다고 보시는가.
"질서는 관계의 패턴이다. 정치질서의 핵심은 좋은 삶에 대한, 무엇이 좋은 삶인가에 대한 비전이다. 이제 한국이 기대왔던 발전의 조건, 경제의 조건, 이념의 조건이 다 무너졌다. 남북관계도 무너졌다. 서구 중심주의도, 인간중심주의도 무너졌다. 총체적, 근본적 성찰을 통해 우리에게 가능한 삶은 무엇인지를 살펴봐야 한다. (한미) 동맹에서 시작하면 답이 안 나온다. 거꾸로 접근해야 한다. 한반도 정치질서는 우리의 관심이지 미국의 관심이 아니다. 우리에게 가능한 삶을 먼저 찾고, 그걸 실행하기 위한 대외정책 전반에서 미국의 위치를 설정한 뒤 그 미국과 살기 위해 미국 민중과 통화를 할지, 트럼프와 통화를 할지, 협박할지, 타협할지 생각해야 한다."
'싱가포르 합의'는 잊어라, 미국도 핵경쟁 나섰다
워싱턴 선언-캠프 데이비드 합의도 축소 불가피
-진보 진영에서는 트럼프가 적극 뛰어들었던 2018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부활에 대한 기대가 있다.
"미국 민주당의 이번 대선 정강에서 비핵화의 목표가 사라졌다.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의(SCM) 공동성명에도 빠졌다. 윤석열 정부도 비핵화 대신, 군사적으로 북한을 억제하고, 이념적으로 '자유의 북진'을 하자는 거였다. 이미 비핵화를 실질적으로 날렸다. 이제는 비핵화냐, 아니냐를 놓고 소모적인 논쟁을 하기보다 북한과의 핵 군축협상을 진지하게 생각할 때다. 정치권도 군축협상을 우리가 먼저 꺼낼 수 없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또 하나 난관은 전 세계 핵규범(미·러 간 전략무기감축협정, 중거리핵전력협정 등) 이 모두 깨졌다는 점이다. 미국 스스로 핵 군비경쟁을 하고 있다. 비핀 나랑 미국방부 우주정책 담당 차관보 대리가 지난 8월 퇴임 직전에 말하지 않았나. '바이든 행정부 들어 핵 군축협상을 하자고 했는데 중국과 러시아가 다 깼다. 해서 미국도 핵 군비경쟁 한다'고 했다. 이 상황에서 북미에만 (북한의 핵포기와 관계정상화를 맞바꾼) 싱가포르 합의로 돌아가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싶다.
트럼프가 애매한 점은 한편으로 힘을 있는 대로 올리고(힘에 의한 평화), 다른 한편 타협(deal)을 해서 평화를 만들겠다고 한다. 두 가지 목표가 모순적이다. 핵규범이 붕괴된 상황에서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한 것 같다. 비핵지대를 만들든지, 중국이 핵 군축협상에 나오게 하든지. 그 전에 (북한 또는 한반도) 비핵화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트럼프의 평화 방정식은 '군사적 위협→공포→평화'
"정부서 전쟁광 추방할 것"…대만 문제도 흥정 대상
-윤석열 정부의 안보정책은 한미 동맹과 한미일 군사협력에 매몰됐다. 한미 정상의 '워싱턴 선언'과 한미일 정상의 캠프 데이비드 공동성명으로 요악된다. 트럼프 시대, 그 운명이 어떻게 될 것으로 전망하시는지.
"워싱턴 선언과 캠프 데이비드 합의 자체를 파기하지는 않을 것 같다. 다만 현재 상태로 유지할 가능성은 적다고 본다. 트럼프 행정부가 얼마나 활용할지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워싱턴 선언은 한국의 핵포기와 미국과의 핵협의그룹(NCG)을 교환한 거다. 또 전략핵잠함(SSBN)과 전략폭격기 등 미국 전략자산의 정기적인 한반도 기항, 기착을 명문화했다. 트럼프 1기 행정부 때 주한미군 방위비분담금협상(SMA) 과정에서 제기했듯이 한국이 전략자산 전개 비용을 내라고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다만, 윤석열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거론했듯이 조선산업을 비롯해 한국의 방위산업 역량을 활용할 가능성은 남아 있다.
한미일 군사협력 중에서 대만 관련 부분은 제외하거나 대폭 축소할 거다. 한미일 삼각체제는 바이든 시대에도 가치와 경제적 측면이 취약했다. 트럼프는 특히 대만 문제를 거래주의적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약화가 불가피하다. 중국 견제를 위한 잠재적 군사적 수단으로 활용할 수는 있다. 트럼프가 말하는 '힘에 의한 평화'는 막강한 군사력을 동원한 '위협→공포→평화의 방정식'이다. 전쟁광과 글로벌리스트(세계주의자)는 트럼프 지지층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의 적이기도 하다. 트럼프는 '우리는 전쟁광(warmongers)'을 정부에서 추방할 것'이라고 다짐한다."
경제적 실용주의? 통제 불가능한 상황도 전제해야
중국처럼 타협 과정 못 들어갈 한국, 타격 더 클 듯
-한국 증시가 출렁였다. 경제 전망은 어떤가. 트럼프는 모든 수입품에 10~20%의 보편관세를, 중국산 제품에는 최고 60% 관세를 매긴다고 말한다. 그런데 한국 내에서는 트럼프 집권이 방산 수출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낙관적 기대를 내놓는다. 특히 1기 행정부 취임 뒤 미·중이 관세전쟁을 벌이다가 2019년 10월 '1단계(Phase I) 합의'에 이른 것을 예로 들어 트럼프가 실용적인 면이 있다는 분석(임원혁 KDI 교수)도 있다.
"전망이 엇갈리는 게 사실이다. 트럼프의 일방적인 관세 부과 뒤 관세전쟁으로 가면 인플레와 소비자 물가가 올라가고 생산성이 떨어지면서 결국 모두가 어려워질 수 있다. 경제학 교과서에 적힌 원칙이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도 트럼프의 관세 정책에 반대한다. 그러나 관세 탓에 문제가 발생하면 트럼프가 조정에 나설 것이라는 기대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부작용이 있더라도 통제 불가능한 상태까지 갈 수 있는 게 트럼프이기 때문이다. 또 한국은 중국과 달리 타협 과정에 들어갈 수 없기에 직접적인 타격이 될 거다. 트럼프의 경제 실용주의는 크게 믿기 어렵다." (미·중 1단계 합의는 중국의 미국 농산품 구매와 미국의 중국 금융시장 진출을 맞바꾼 합의였다)
트럼프 우선순위는 이민·무역·글로벌 주의 파괴
충성도 높은 MAGA 인물 약진…세계 뒤흔들 것
-트럼프 아젠다의 최우선 순위는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가.
"아무래도 미국 국내 문제가 될 것 같다. '하루만 독재자가 되겠다'면서 취임 첫날(Day One) 과제로 불법이민자 집단추방과 남부 국경 폐쇄를 예고했다. 법무부를 비롯한 행정부 장악도 서두를 것 같다. 2020년 대선에 불복한 1·6 의사당 폭동 가담자들에 대한 사면·복권을 정말 시행할지도 관찰 지점이다. 트럼프가 생각하는 미국의 정체성과 제도권 엘리트를 뒤집으려는 관점에서 중요한 사안들이다.
1기 행정부와 달리 이번에는 MAGA 사람들의 기용 폭이 넓어질 것이고, 이들이 맡을 분야가 바로 트럼프가 직접 챙기는 분야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충성심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벌써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로 로버트 라이트하우저를 내정했다는 보도가나온다. 트럼프는 관세를 산업정책과 소득세 대체 수단으로 여기는 만큼 본인이 직접 밀어붙일 것 같다. 공화당이 다인종 노동자 정당의 기반을 갖췄다는 평가가 많다. 그 맥락에서 관세는 일종의 '필살기'가 될 거다.
1기 때 외교·안보는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존 켈리 비서실장,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 등 이른바 '어른그룹(Adults)'에 맡겼지만, 이번엔 로버트 오브라이언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엘브리지 콜비 전 국방부 부차관보 등이 요직에 거론된다. 오브라이언은 정통 매파로 분류되고, 콜비는 2018년 국방전략을 기초한 MAGA 인물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대외적으론 가자전쟁 종식이 우선…해결 어려울 듯
우크라·중동서 벌써부터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
-트럼프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가자 전쟁의 조속한 종전을 공언했다. 대외정책의 우선순위는 뭐라고 보시는가.
"1기 행정부(2017.1.~2021.1.) 때 트럼프가 노벨 평화상을 받을 분야로 한반도가 거론됐지만, 이제는 아니다. 벌써부터 중동지역과 우크라에서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하겠다'는 말이 나온다. 미국 국내 정치적으로 더 비중이 있는 이슈는 가자전쟁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네타냐후 정권과 바이든 행정부의 그간 논의 내용을 보면 해결이 쉽지 않을 것 같다. 아마 레바논의 평화가 최저선이 아닐까 싶다. 바이든은 초기에 '미국이 실패한 테러와의 전쟁에서 교훈을 얻어라'고 권했지만, 네타냐후는 '미국은 이라크에서 가가호호를 뒤지면서 테러용의자를 찾지 않았느냐'면서 거부했다. 민간인 지역 폭격을 문제 삼자 미국이 2차대전 당시 독일 드레스덴과 도쿄의 민가를 불바다로 만들었던 점을 들춰냈다."
☞ [이혜정 교수 인터뷰 ② ] '트럼프의 미국' 어디로 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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