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의 백악관 입주일은 내년 1월 20일이다. 투표일(5일)로부터 치면 76일의 기간이다. 남았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낡은 권력이 힘을 잃어가고 미래 권력이 으름장을 놓는 '간절기'이다.
세계가 벌써부터 트럼프가 퍼뜨리는 '공포 바이러스'에 포획된 것 같다. 안보와 경제를 중심으로 유독 미국 의존도가 높은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주가가 춤을 추고 언론은 공식, 비공식 하마평에 널뛰기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2016년 대선일로부터 약 3개월간 벌어졌던 일이 되풀이되는 인상이다. 윤석열 정부의 허둥거림은 유독 심한 것 같다. 더 이상 자유민주주의 미국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트럼프를 상대로 '가치 동맹'이라는 흘러간 레코드판을 틀고 있다. 그 와중에 대통령이 골프채를 다시 잡았다는 뉴스가 실소를 자아낸다.
트럼프 1기 행정부(2017.1.~2021.1.) 4년 동안 그의 말과 결정, 정책을 들여다보면서 얻은 트럼프를 읽는 방법 두 가지를 소개한다. 우선 '트럼프는 반드시 약속을 지킨다'는 단정과 '트럼프는 물 때보다 짖을 때 더 위험하다'라는 경험칙이다. 상충하는 것 같지만, 그 어간에 트럼프가 실재한다고 본다. 우파 대중주의 정치인 또는 극우 포퓰리스트의 드문 장점(지지자 입장에서)은 공약을 반드시 지킨다는 점이다.
트럼프의 아젠다는 미국에서 시작해 미국에서 끝난다.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의 요체다. 대외전략도 세계의 경찰 노릇과는 거리가 멀다. 미국의,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경제적 타산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트럼프는 취임 첫날(Day One) 아젠다로 불법이민자 대량 추방과 남부 국경 폐쇄를 예고하고 있다. 2020년 대선 패배에 불복해 연방 의사당에 난입했던 폭동 주모자들에 대한 특별사면도 공언했다. 규제를 철폐하고 작은 정부를 추구하는 조치도 예상된다. 모든 수입품에 10~20%의 보편관세를 부과하고, 중국산 제품에는 최고 60%의 관세를 매기겠다는 다짐도 핵심 공약이다.
대외적으론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헤즈볼라-이란 전쟁의 종식도 다짐하고 있다. 한반도 관련 의제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1기 행정부에서 드러났듯이 트럼프는 말과 행동이 다르고, 아침저녁으로 말을 바꾸기도 한다. 이중 무엇이 어떠한 어려움이 예상되더라도 트럼프가 막무가내로 밀어붙일 아젠다인지 가려내는 '선구안'이 필요하다.
이민정책과 멕시코와의 남부 국경 폐쇄, 연방정부 규제 철폐, 대중국 관세 전쟁 등을 핵심 아젠다로 꼽아볼 수 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수장으로 지명된 신설 부처 '정부효율부'가 주도할 규제개혁 작업도 1기 행정부에 비해 박차를 가할 걸로 예상된다. 트럼프 시대 가장 경계해야 할 말은 '설마…'이다. 일반적인 상식 또는 자유민주의 가치에 충실했던 '오바마, 바이든의 미국'을 읽던 관점에서 보면, 비상식이 새로운 상식이 된다. 야구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들이 어떤 포지션에 있건, '베이스'를 바라보듯이 트럼프는 지지층을 늘 바라보며 '베이스 정치(Base Politics)'를 한다. 해바라기에도 비유할 수 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군중에 수없이 다짐한 아젠다는 반드시 한다고 전제하는 게 좋다.
트럼프는 선거 때 말만 번지르르하다가, 집권하고 나면 슬그머니 딴소리하는 기득권 엘리트 정치인과 유전자가 다르다. 핵심 아젠다는 미국과 세계를 혼란속에 밀어 넣더라도 저돌적으로 추진할 게 분명하다.
미국이 아무리 초강대국이더라도 세상을 다 휘저어놓을 수 없듯이, 트럼프가 아무리 정력적이라도 세상만사를 일거에 뒤집을 수는 없다. 본격적인 협상에 나서기 전 트럼프가 접근하는 방식은 '공포 몰이'다. 이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무는 트럼프보다 짖는 트럼프가 더 나쁘다 (Trump’s bark is worse than his bite)"이다. 파이낸셜 타임스가 트럼프 1기 당시 미국의 중남미 정책에 대해 논평하면서 내놓은 사설 제목(2017년 6월 26일 자)이다. 트럼프 시대, 여전히 유효한 경구다. 트럼프가 의도적으로 놓은 공포의 덫에 걸리면 허둥지둥하다가 자충수를 두기 십상이다.
트럼프는 흥정의 달인이다. 사업가답게 댓바람에 상대를 공포에 몰아넣고는, 언론이 사실 확인에 들어가거나, 실제 협상이 시작되면 얼버무리거나 둘러댄다. 거짓말의 능수이기도 하다. 그에게 중요한 건 결과(deal)이지 과정이 아니다. 2년여 동안의 유세 과정에서 내놓은, 특히 당선 뒤 내놓는 말이 모두 현실이 될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도 위험하다. 트럼프의 현란한 말이 되레 '제눈 찌르기'식으로 미국 국익에 역행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일례로 멕시코 국경을 폐쇄하면 미국 자동차 업계의 부품 조달에 심각한 장애가 생기고, 어떤 방식으로든 보완해야 한다. 1기 행정부에선 중국과의 관세 전쟁을 통해 미국도 2년여 동안 내상을 입은 뒤 미국 농산물과 중국 금융서비스 시장 진출을 거래하는 1단계(Phase I) 합의를 맺은 바 있다. 중요한 건 그 합의에 이르는 시간 동안 트럼프의 압력에 대응하는 방식이다.
한반도는 이미 실감한 바 있다. 2017년 트럼프의 '화염과 분노' '북한의 완전한 파괴'와 같은 험악한 경고가 한반도 전쟁위기설을 불지폈다. 남이건, 북이건 한반도 거주민들은 당시 얼마나 전쟁 공포에 휩싸였던가. 트럼프가 쓸데없는 곳에 미국 젊은이들을 보내 영원한 전쟁을 벌여 온 기성 엘리트를 혐오한다. 추체험한 사실이다. 트럼프 장광설의 특징은 실제인 듯 몰아간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짖는 소리'였지만, 당시에는 트럼프가 댓바람에 무력을 동원해 전쟁을 덜컥 물 수도 있다는 공포가 확산됐었다. 차분히 생각하면 북한 역시 '너 죽고, 나 죽자'라는 결심을 하기 전엔 전면전에 나서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적지 않은 이들이 긴급 구호물품을 사들이고, 적금을 깨지 않았었나. 윌리엄 페리 전 미 국방장관을 비롯한 한반도 전문가들이 제기했던 최악의 시나리오는 말의 전쟁이 우발적 충돌로 이어지고, 군사적 충돌이 핵전쟁으로 치닫는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혹여 트럼프의 강경 발언을 믿고 '자유의 북진'을 도모한다면 파멸적인 자충수가 될 수 있다.
트럼프가 제기하는 위협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속속 발표하는 파격적인 인사는 훨씬 더 견고해진 '트럼프 2.0 시대'를 예고한다. 지금은 구 권력과 신 권력이 겹치는 간절기(間節期). '트럼프의 입'만 바라보고 있기보다 그를 만들어낸 '우파 민중주의'의 본질을 깊이 이해하라는 지적(이혜정 중앙대 교수)이 주목되는 까닭이다. 지레 공포 바이러스에 감염되기 전에 저항력을 키워 두는 게 유용할 것 같다. 그래야 제대로 된 '거래'가 가능하다. 옷을 갈아 입듯 '낡은 사고'를 서랍에 넣어두는 게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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