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더 이상 추상적 가치에 충성하지 않습니다. 부통령 당선자 J. D. 밴스의 말에 미국의 현주소가 담겨 있어요. 트럼프는 쓸데없는 곳에 가서 전쟁, 영원한 전쟁을 벌이는 글로벌주의(세계주의) 엘리트를 혐오합니다. 오랜 세월 엘리트층에 배반당해 온 '잊힌 사람들(Fogotten People)'의 대변자를 자처하죠. 2008년 이후 16년 세월의 대부분을 집권한 민주당은 고장난 시스템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조 바이든은 오만했고, 카멀라 해리스는 무능했습니다. 백인 남성뿐 아니라 유색인종 여성들에게도 낙태권보다 먹고사는 문제가 더 중요했어요. 이제 미국은 우파 민중주의가 장악했습니다."
8년 전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선 승리가 우발적 '사고'였다면, 이번 대선 승리는 세계사적 '사건'이다. 이혜정 중앙대 교수(61)가 전하는 지난 5일 미국 대선의 의미는 하나하나 떨어진 조각 그림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축적돼 대세가 된 '큰 그림(Big Picture)'이었다. 지난 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이 교수가 주제발표를 한 '미국 대선 결과와 한반도 질서 변화' 현안토론회와 곧이어 서울 공덕동 <시민언론 민들레> 사무실에서 가진 인터뷰 내용을 전한다. 이 교수의 토론회 발언도 문답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엘리트는 가라" 이제 '잊힌 사람들'이 미국의 주역
성장신화도, 아메리칸드림도 박탈당한 민심의 반격
-'트럼프 시대'를 반글로벌리즘과 경제적 일방주의로 정의하셨다. 두 가지 개념을 중심으로 트럼프 귀환의 의미를 짚어달라.
"트럼프주의는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이다. 글로벌리즘의 대칭 개념이다. 트럼프는 쓸데없는 전쟁, 영원한 전쟁을 벌이면서 진짜 미국 사람들의 이익을 팔아먹은 글로벌리즘(세계주의) 엘리트를 혐오한다. 동맹은 미국에 무임승차 하는 존재로 본다. 트럼프의 '경제적 민족주의'를 두고 미국 주류에선 '고립주의'라고 하지만, '일방주의'로 규정하고 싶다. 미국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거래주의적 접근이 핵심이다. 그러면 미국은 무엇일까? 한때 '세계에는 두 개의 국적(자국과 미국)이 있다'는 말이 있었다. 베트남전쟁 당시 북베트남은 미국과 싸웠지만, 마음속에는 '보편적 개념을 실현한 나라'로 미국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거다. 지금은 그게 깨졌다."
-그렇다면 트럼프에게 '미국'은 과연 무엇인가.
"2015년 트럼프 타워에서 내려와 정치를 시작할 때부터 '멕시코 사람들은 강간범'이라고 했다. 이번 대선에선 '아이티 사람들이 오하이오주에서 개와 고양이를 잡아먹는다'고 했다. 기본적으로 배외주의적이다. J. D. 밴스 부통령 당선자가 말하는 미국은 '추상적 관념에 충성하지 않는 나라'이다. 엄청난 주장이라고 본다. 이때 말하는 미국은 백인 남성과 기독교 문명의 역사적 공동체이다. 잊혀가는 미국이자, 복원할 수 없는 미국이다. 엘리트들이 이끌어 온 글로벌리즘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주류가 주장하는 보편적 자유와 인권, 근대성의 체현으로 드러난 미국을 트럼프는 부정한다. 그러면 이 엘리트들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트럼프는 '엘리트들에게 평생 이용만 당한 '잊힌 사람들(Forgotten People)'을 대변하겠다고 다짐한다."
( '잊힌 사람들'은 우파 민중주의 또는 극우 포퓰리즘이 기세를 올리는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개념이다. 자유무역과 시장경제에서 튕겨져 나간, 기성 정치가 품지 못한 사람들을 뜻한다. 보수정당이건, 진보정당이건 제도권 기성정치에서 배반당한 사람들이다. 프랑스에선 같은 뜻으로 '레주블리에(les oubliés)' 라고 한다. )
도덕적 결함보다 미국 사회 '시스템 결함'이 더 문제
주류 사회로부터 '핍박'받는 트럼프에 쏟아진 지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를 비롯해 이번 대선에서 내놓은 주장은 2016년 대선 당시와 거의 비슷했다. 그런데도 미국민 두 사람 중 한 명 이상이 지지했다.
"트럼프는 4년간 집권했으면서도 아웃사이더의 권위를 잃지 않았다. 2008년 버락 오바마의 승리부터 따져보면 지난 16년의 대부분을 민주당이 집권했다. 2008년이 중요한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로 미국 중산층의 쇠퇴가 분명해지고, 미국식 자본주의 모델이 안정적이지 않다는 인식이 시작된 시점이기 때문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경제적 불평등이나 정치적 양극화가 덜 심했고, 성장신화가 남아 있었다. 낙수효과가 됐건, 뭐가 됐건 전반적으로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에 기존 시스템을 공격하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부인하는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반미주의자로 취급했다. 2008년은 그게 뒤집힌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그럼에도 오바마 케어(보건의료개혁)는 제한적 성과에 그쳤고, 기존 시스템은 살아남았다.
힐러리 클린턴이 만든 2016년 대선의 틀은 '트럼프는 도덕적으로 흠결이 많은 사람'이라는 규정이었다. 그러나 개인의 흠결보다 시스템의 흠결이 크다는 점에서 미국민은 트럼프를 선택했다. 트럼프는 재임 중에도 끝없이 주류의 공격을 받았다. 두 번의 탄핵 시도가 있었고 연방수사국(FBI)과 검찰의 기소가 이어졌다. 바이든 행정부에서 트럼프에 대한 사법적 기소가 있을 때마다 폭발적 지지 현상이 있었다. '내가 당신들, 잊힌 사람들을 대변하다 보니까 기득권 엘리트 집단(Deep State)으로부터 핍박을 받고 있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는 트럼프의 주장이 먹힌 거다. 이번엔 MAGA 운동을 반드시 성공시키겠다고 다짐했다."
사상 최악의 대선후보, '바이든의 아바타'론 역부족
미국 경제수치 좋아졌다고? 서민들의 삶은 무너졌다
-트럼프의 성공은 카멀라 해리스에 앞서 바이든의 실패에서 비롯된 것 같다.
"바이든은 기득권 엘리트층에 쏟아진 시스템 실패의 책임을 인정했다. 다만 민주주의로 경제를 안정시키고, 중산층을 보호함으로써 성과를 내놓겠다고 약속했다. 세계를 민주주의, 권위주의 진영으로 나눴지만, 내용은 민주주의가 실질적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거였다. 오판이었다. 전혀 내놓지 못했다. 밖으로 자유주의 패권이, 안으로 아메리칸드림이 모두 깨졌다. 고등학교만 나와도 열심히 일하면 가족을 부양할 수 있다는 믿음, 일종의 사회계약이었던 아메리칸드림이 흔들렸다. 해리스는 돌아가지 않겠다(We are not going back)고 했지만, 서민들 처지에선 코로나19 팬데믹 직전의 트럼프 집권 시기가 가장 좋았다. 경제 사정도 좋았고, 인종별 소득도 늘었다.
아메리칸드림이 깨진 이유는 복합적이다. 자유무역과 중국 탓이기도 하고, 기술 발전 탓이기도 하다. 중요한 건 이게 무너진 상황에서 서민들 사이에 '기성 엘리트 주류는 안 된다'는 믿음이 굳어졌다는 사실이다. 2020년 대선에서 바이든의 승리는 트럼프가 대처에 실패한 팬데믹과 광범위한 '반트럼프' 진영을 만든 덕이었다. 그 성공이 지금의 실패를 낳았다."
-팬데믹과 '반트럼프 연합'에 덕에 가능했던 바이든의 4년 전 승리가 이번에 패배로 귀결된 이유가 뭐라고 보시는가.
"무엇보다 코로나19 대응을 하면서 돈을 너무 풀었다. 중국 견제를 명분으로 부활시킨 '산업정책'도 정부지출을 늘렸다. 그 돈이 다 물가 인상 요인이 된 거다. 여성, 특히 흑인이나 히스패닉 여성이 어떻게 낙태권 보호를 약속한 해리스가 아니라, 트럼프를 찍을 수 있느냐고 하지만 가난한 이들에겐 먹고사는 문제가 더 중요했다. 인플레가 너무 높아 집세와 장바구니 물가가 올랐다. 외형적으로 미국 경제는 너무 좋다. 완전고용 상태고, 인플레도 2% 대로 떨어졌다. 기업도 많이 생겨났다. 바이든은 '역사상 이렇게 좋은 적이 있느냐'고 말하지만, 임금상승률보다 물가상승률이 높으면서 저소득층의 생계가 엉망이 됐다. 두 번째로 바이든과 민주당의 오만 때문이다.
바이든의 독단, 뒤늦은 사퇴에 후보도 멋대로 지명
경제·이민 문제 심각성 외면, 이념적 가치만 앞세워
'반트럼프 연합'은 온건 공화당 지지자들부터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 등 진보세력까지 포함했다. 바이든은 2020년 대선에서 국내 정책 공약을 아예 샌더스 측과 공동 작성했다. 당시 주요 이슈가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s)'였지 않나. 인종차별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경찰 예산을 아예 없애라(Defunding the Police)는 급진적 운동이 시작됐다. 중도층이 돌아선 결정적 계기였다. 불법이민자를 범죄자로 보지 말자는 운동도 있었다. (그 결과 2023년 미국 내 불법이민자가 300만 명으로 사상 최대가 됐다) 패배할 것으로 예상했던 2020년 중간선거에서 거둔 절반의 승리(상원 다수, 하원 소수)도 바이든의 오만을 키웠다. 낙태와 인종 문제 등 문화적 이슈가 결과를 좌우한 중간선거는 교외에 사는 백인 여성들이 지지하면서 결과가 좋았다. 바이든은 느닷없이 '다음 세대 정치인을 키우는 가교 역할을 하겠다'던 약속을 버리고, 자신이 계속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섰다. 중간선거 결과는 트럼프가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바이든은 팬데믹이라는 역사적 우연에 의해 얻은 승리를 자신의 리더십 덕분이라고 착각했다. 그러다 트럼프와 한 차례 TV토론을 한 뒤 돌연 후보를 사퇴했다."
-지난 7월 21일 바이든의 갑작스러운 사퇴 뒤 해리스가 2달여 동안 전국 여론조사 지지율에서 트럼프를 앞서는 '반짝 효과'가 있지 않았나.
"해리스를 대선후보로 지명하는 과정에도 바이든은 오만했다. 민주당 내에서 미니 경선을 하거나, 최소한 순회 타운홀 미팅을 통해 해리스를 소개하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무시했다. 그 과정에서 뉴스를 지배하고, 언론과의 험난한 과정을 치르게 함으로써 해리스의 정치적 근육이 커지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낸시 펠로시 전 하원의장은 선거 뒤 바이든의 뒤늦은 사퇴와 공개 예비선거가 없었던 점을 한탄했다.) 더 큰 문제는 해리스가 사상 최악의 대선후보였다는 점이다. 여성이기 때문에, 유색인종이기 때문에 떨어진 게 아니다. 2019년 당내 경선 과정에 중도 탈락한 해리스는 2028년 대선의 잠재적인 후보군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정치인으로, 부통령으로 한 게 없었다. 정치철학도 전공 분야도 없었다. 선거 전략도 잘못 짰다.
민주당 패배 뒤 지난한 '부검 과정' 돌입, 혼돈 불가피
유일한 저항 수단은 상원서 의사진행 지연·방해 밖에
-해리스 선거 전략의 결정적인 패착은 무엇이었나.
인플레와 이민 문제를 가치와 이념의 관점만으로 접근했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불법이민자들의 망명 신청을 받아들이면서 시카고나 (콜로라도주) 덴버 등 이른바 '리버럴 도시'에 불법이민자가 넘쳐났다. 합법적 이민도 줄여야 한다는 여론이 60%를 넘었지만, 해리스의 방어논리는 트럼프 탓이었다. 초당파적 이민법안을 트럼프가 좌초시킨 게 문제였다는 말이다. 민주당조차 이민정책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해리스는 이를 깡그리 무시한 채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말만 반복했다. CNN과의 첫 언론인터뷰도 혼자 못하고, 팀 월즈 부통령후보와 함께 나섰다. 오죽하면 '바이든의 아바타' '움직이는 찰흙인형(playing doll)'이라는 비아냥이 나왔겠나. 가자전쟁과 관련, 이스라엘의 권리도, 팔레스타인의 권리도 다 인정하겠다는 최종 목표를 강조했지만, 그 목표에 어떻게 도달할지 하나도 설명하지 않았다."
-공화당이 8년 만에 백악관과 상, 하원을 장악했다. 대선 뒤 미국 정치가 어떻게 전개될 거라고 보시는가.
"여론조사 정당 지지도를 보면 공화당 지지자가 최근 더 많아졌다. 의제를 공화당이 다 장악했다. 중국 견제에 대해서는 민주, 공화당 일정한 수렴이 있지만, 바이든의 탈위험화(de-risking)과 트럼프의 최고 관세 60%를 통한 전면 압박 및 탈동조화(de-coupling) 사이에 접점이 없는 상태다. '백인 우선주의'에 기초한 미국의 정체성 관련해서는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민주당은 '파시스트 트럼프' '트럼프 우선주의'와 관련, 결사적으로 저항할 것으로 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민주당이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상원에서 의사진행을 지연시키는 필리버스터링에 그칠 것이다. 공화당이 필리버스터링을 막을 수 있는 60석(Super Majority)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단 상원에서는 민주당이 필리버스터링을 통해 트럼프-공화당을 저지할 수 있다. 물론 공화당은 예산 관련 법안에 대해서는 과반수 표결로 밀어붙일 수 있다.
민주당의 미래에 대해서는 '부검'을 실시하려는 데 누가 부검자가 돼야할지 합의가 없다. 싹슬이 패배의 후유증으로 민주당은 한동안 향후 진로를 놓고 백가쟁명이 난무하는 가운데 표류할 것으로 보인다. 문화적 좌파 급진주의를 반성하고 중도로 갈지, 샌더스가 주장하듯 노동자 정책을 강화할지가 가장 큰 쟁점이다. " <끝>
☞ [이혜정 교수 인터뷰 ① ] 트럼프의 귀환과 한반도·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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