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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 최제우 선생 탄신 200년, 6대 종단은 왜 함께했나

시민언론 민들레(Dentdelion)

by gino's 2024. 12. 5.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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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순례 ① ] 천도교 성지 경주-남원으로 간 그들

10월 28일은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 대신사 탄신 200년이 되는 날이다. 이를 기념해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모임'과 평화재단이 11월 25~27일 경주와 남원, 공주를 거쳐 서울 종로 천도교 중앙 대교당까지 순례 행사를 했다. 6대 종단 종교인이 함께 밟은 길이기에 의미가 깊었다. 세 차례의 대화마당(세미나)을 통해 수운의 뜻을 되새기고 동학이 3.1운동과 이후 한국 민주주의에 끼친 영향을 되돌아보았다. <시민언론 민들레>는 전 일정을 함께 했다. 그 대강을 전한다.

수운 최제운 대신사 탄신 200년 기념 순례에 나선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 회원들과 사회인사들이 25일 경주 용담정에 함께 자리했다. 2024.11.25. 김진호 에디터
동학 순례단 참가자들이 용담정 앞 용담교를 건너고 있다. 2024.11.25. [평화재단 제공] 시민언론 민들레

"이곳이 수운 대신사께서 1980년 경신년 4월 5일 최초로 종교체험을 하시고 한울님으로부터 무극대도를 받은 곳입니다. 우리가 용담정을 답사하는 이유는 대신사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하면 직접 체험하고 실천할 것인지, 그 신념을 다지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만추의 화창한 날이었다. 지난 25일 오후 경주 용담정. 노란 은행잎과 단풍이 어우러진 깊은 가을의 화창한 날이었다. 넓지 않은 방 안에 20여 명이 앉았다. 의식에 필요한 것은 향과 물, 마음뿐이었다. 청수를 올리고, 심고한 뒤 주문을 세 번 연송했다. 심고(心告)는 눈을 감고 내면의 한울님에게 고하는 것. 6대 종단 종교인과 평화재단, 사회 인사들이 모였다. 수운 최제우 대신사(大神師) 탄신 기념 순례에 나선 천도교, 대한성공회, 개신교, 원불교, 천주교, 불교도들이 박남수 전 천도교 교령(82)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구미산 주변에 선생의 삶과 죽음이 있었다. 일행은 경주시 현곡면 가정길, 수운 최제우 대신사(大神師)의 생가를 방문하고, 인근 태묘를 참배한 뒤 용담정에 올랐다. 생가와 태묘, 용담정에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없었다. 삶이 그랬듯 죽음 뒤에도 순탄치 않았기 때문이다. '좌도난적', 유교가 아닌 사교로 나라를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처형된 선생의 흔적은 오랫동안 방치됐다. 생가는 유허비만 있던 것을 2014년에야 복원했다. 박 전 교령은 "생가 복원 때는 제문에 적힌 하인과 밥그릇, 수저 수로 규모를 가늠했다"고 전했다. 태묘도 최근 '동학 창도주 수운 최제우 스승님 묘'라는 비석을 세우고 말끔히 단장했다. 

박남수 천도교 전 교령이 25일 경주시 현곡면 가정길의 수운 최제우 대신사 생가 앞에서 설명을 하고 있다. 2024.11.25. 김진호 에디터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모임' 회원들과 사회인사들이 25일 경주 수운고택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24.11.25. [평화재단 제공] 시민언론 민들레

타협의 연속이었다. 동학을 모태로 한 다른 교단을 고려해 '천도교'가 아닌 '동학'으로 적었다. 동학혁명이냐, 농민혁명이냐를 둘러싸고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동학'과 '농민' '혁명'을 다 아울렀다. 그 사이 '난(亂)'이 혁명이 됐고, '동비(東匪)'가 혁명군이 됐다. 100주년이던 1994년 유족회가, 2010년엔 기념재단이 설립됐다. 2004년 '동학농민혁명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속도가 붙은 덕이다. 2018년 황토현 전승일(5월 11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됐고, 혁명 관련 185점의 기록물이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게 빠졌다.

바로 수운이다. 오랫동안 동학이 동학농민혁명과 동일시되면서 정작 수운 정신이 우리 곁에서 사라졌다. 법을 제정하고, 단체와 기념시설을 만들어도 수운 정신이 깃들지 않으면, 빈 껍데기다. 수운 정신은 천도교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전근대 조선에서 자유와 평등, 형제애의 근대를 처음 열었다. 정토회 법륜 스님은 순례 행사의 취지를 두 가지로 요약했다. 우선 "국가가 주관해야 할 행사인데 현 정부가 이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조촐하게나마 마련한 것"이고, 또 "수운 대신사님은 민족의 어르신이니까 종교를 떠나서 함께하는 게 필요했다"고 말했다.

수운 최제우 선생 성지순례에 나선 종교인모임 회원들과 사회인사들이 25일 경주 구미산 자락의 태묘에서 박남수 천도교 전 교령의 제안으로 참배를 하고 있다. 2024.11.25. [평화재단 제공] 시민언론 민들레

박경조 대한성공회 주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달리 군대를 앞세워 땅을 정복한 뒤 십자가를 꽂은 교회 역사에 참 부끄러웠다"라면서 "수운 대신사는 이 땅의 민중에게 자신의 존엄을 일깨워주셨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가 믿는 종교의 지혜를 모아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수운 대신사의 가르침을 깊이 새겨 제가 몸담은 기독교가 새롭게 되는 일에 제 한 몸을 바쳐야겠다는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박종화 경동교회 원로목사는 "종교인이 모였지만 종교 모임이 아니라 화해, 상생, 평화를 위한 모임"이라면서 "각자 믿고, 함께 하자"라는 말로 종교인모임의 취지를 설파했다. 수운을 돌아보고, 지금 우리를 살펴보며, 미래를 내다보는 '3관'의 여정이었다.

윤석산 천도교 교령은 세미나 첫 발제에서 수운이 밝힌 '시천주(侍天主)'의 뜻을 풀이하면서 "한울님(천주)을 내 안에 모셨다는 뜻이며 이는 천주를 모신 존재로서 임금이나 천민이나 본원적으로 동등한 존재로 봤다"고 말했다. "하층민도 시대 위기를 극복할 주체가 돼야 한다는 자각을 심어 서양의 영향을 받기 전에 자생적으로 근대화와 민주주의를 열어가는 역사적 사건이었다"라며 민중의 주체성을 일깨운 동학의 혁명성을 강조했다. 김용휘 대구대 교수는 "시천주는 신의 내재성을 깨닫는 것을 넘어 한울의 본성을 온전히 구현하며 자아실현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며 "동학은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우주와 생명,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제시하는 학문이자, 실천철학"이라고 말했다.

경주시 천도교 교육수련원에서 열린 대화마당에서 박경조 대한성공회 주교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말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용휘 대구대 교수, 김홍진 신부, 윤석산 천도교 교령. 2024.11.25. [평화재단 제공] 시민언론 민들레

천도교는 "동학을 믿는다"고 하지 않고 "동학한다"고 한다. 수양이나 신앙에 머물지 않고 행함으로 이어졌다. 그 행함이 우리 역사에 선한 영향을 끼쳤다. 농민혁명만 있었던 게 아니다. 이후에도 항일투쟁을 행했고, 3·1운동의 주춧돌이 됐으며, 세계 최초의 어린이 운동이 됐다. 천도교가 1920년대 전후에 펼친 교육과 출판 문화 운동이 없었다면, 정신의 근대화는 더 늦어졌을 게 분명하다. 주영채 동학농민혁명유족회장은 "동학농민혁명군으로 공주 우금티(치) 전투에 참전했던 대장 9명이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됐다"고 전했다.

김 교수는 2019년 정부가 처음 주도한 동학농민혁명 125주년 기념사의 한 대목을 인용, 동학이 근현대 시민사회에 끼친 영향을 정리했다. "동학농민혁명은 3.1운동으로 이어졌고, 3·1운동은 10년 후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계승됐다. 해방 이후의 4·19혁명도, 5·18 민주화운동도, 6월항쟁도 동학정신에 뿌리를 두었으며, 2016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계속된 촛불혁명도 잘못된 권력을 백성이 바로잡는다는 동학정신의 표출이었다." 동학은 3대 의암 손병희 선생에 이르러 1905년 '천도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1947년 창당한 천도교 청우당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도, 소련식 인민민주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을 제시했다. 조선식 민주주의였다. 남한의 청우당은 2년 뒤 백색테러 속에 미군정에 의해 해산됐지만, 북한에는 지금도 건재하다.

경주 대화마당이 끝난 뒤 순례 참가자들이 모여 소감을 나누고 있다. 고경빈 평화재단 연구위원장이 마이크를 잡고 있다. 2024.11.25. [평화재단 제공] 시민언론 민들레

노란 은행잎과 붉은 단풍잎이 절정을 이뤄 추색이 만연했던 경주를 떠나 남원에 가까이 가면서 차창 밖으로 가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박 전 교령이 버스 안에서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수운 대신사는 1860년 용담정에서 득도를 하시고 이듬해 11월 전라도 남원 덕밀암 은적당을 향해 가셨다. 그 길은 피신의 길이었고, 마무리 짓지 못한 일을 마무리 하기 위함이었으며, 동학의 종교적 체계를 갖추고자 준비하기 위해 가신 길이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동학이) 동에서 났지만, 서로 가지 않으면 세상에 퍼지지 않기 때문에 나선 길이었다. 동학은 남원 은적당에서 거의 완성됐다. 동경대전 8장 중 2장, 가사 4편 중 2편을 집필하셨다. 후계자 최경상(해월 최시형)을 만날 길도 여셨다. 제2의 성지를 제대로 복원하지 못한 게 안타깝다. (덕밀암 은적당은 터만 남아 있다)."

용담정 청수봉전에서 천도교 교인들이 연송한 주문은 이렇다. "한울님 모셨음을 깨달아 그 덕과 마음을 회복하여 평생 잊지 않고 모든 일을 깨닫는 지혜를 주소서. (侍 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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