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8일은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 대신사 탄신 200년이 되는 날이다. 이를 기념해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모임'과 평화재단이 11월 25~27일 경주와 남원, 공주를 거쳐 서울 종로 천도교 중앙 대교당까지 순례 행사를 했다. 6대 종단 종교인이 함께 밟은 길이기에 의미가 깊었다. 세 차례의 대화마당(세미나)을 통해 수운의 뜻을 되새기고 동학이 3.1운동과 이후 한국 민주주의에 끼친 영향을 되돌아보았다. <시민언론 민들레>는 전 일정을 함께 했다. 그 대강을 전한다.
"살아남은 이들은 도망자 신세가 됐다. 전투할 때는 총알이 빗발쳐도 싸웠겠지만, 패한 뒤 이 잡듯이 찾아내니까 고향을 등지거나, 족보를 불태우거나, 개신교나 불교, 가톨릭으로 갔다. '반란군의 후손'이라는 누명을 쓰고…. 선발대로 섰던 분들은 대개 16세 안팎의 총각들이었다. 전사한 분들은 후손을 남길 수 없었을 것이다. 나머지 후손이 어딘가 살아 있겠지만 많은 이가 사라져 버렸다."
후손들은 대부분 선대의 행적을 모르고 있었다. 기억 한 자락을 간직하고 있는 분들도 꺼내기보다 안으로 밀어 넣는 데 익숙해 있었다. '동학'이라는 말에 손사래부터 치기 일쑤였다. 세월이 흐를수록 유족을 찾기는 더 어려울 터. 지난 26일 수운 탄신 200년 기념 순례길에서 만난 주영채 동학농민혁명 유족회 이사장(76, 교명 선원)이 전한 어려움이다. 인터뷰는 순례단의 숙소인 남원 시내 한 호텔 1층 커피숍에서 26일 진행했고, 이후 보완했다. 유족의 현황을 듣고자 대화를 청했지만, 그의 말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이어졌다. 주 이사장 본인이 유족이다. 증조부가 당시 61세의 고령으로 봉기에 가담했다가 무안 진등고개 전투에서 전사하신 주경노 선생.
"2년 전 나주 진등고개와 고막포 똑다리(현 함평군)를 현장 답사할 때 인근의 90대 노인들로부터 마을에 전해오는 말을 들었다. 진등고개 전투에서 밀린 혁명군이 똑다리에 이르렀다. 대포와 개틀링 기관총, 무라다 소총을 쏘아대는 일본군과 관군의 화력에 다리를 건너다가 영산강 샛강으로 추락했다. 강물 위로 흰옷을 입은 혁명군 시체가 흰 쌀뜨물처럼 흘러갔다고 한다." (나주 수성군을 지휘한 총포사는 나주 목사 민종렬이었다. 진압군 사령관이던 일본군 독립후비보병 대대장 미나미 고시로 소좌의 하수인 노릇을 톡톡히 한 이다.)
주 이사장뿐이 아니었다. 천도교 관계자들의 말은 순례 기간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이어졌다. 결코 끝나지 않는 이야기다. 혁명군이 얼추 30만 명이었다고 하지만, 현재까지 확인, 등록한 참여자는 3800여 명. 이 중 400여 명만 유족을 남겼다. 전체 유족의 규모는 1만 3700여 명. 유족 찾기는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만들어지면서 본격화됐다. 영호(嶺湖) 도회소가 있던 순천, 광양, 하동, 진주에서는 최근 모임을 만들어 함께 후손들을 찾고 있다.
"유족 신청을 할 때 족보도 올리는 데 이름을 두세 개 가진 분이 많아 분간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일단 관변 기록에 효수 또는 처형의 기록이 있는 분들을 참여자로 등록했다. 참여했지만 후손이 모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신문 광고를 하고 46개 정도의 전국 관련 단체 관계자들 수소문하고 있지만, 유족 등록이 된 분들도 매년 30여 명씩 줄어든다."
전투, 전쟁이라기보다 제노사이드(대량 학살)에 가까웠던 100년 전을 복원하는 것은 지난한 작업이다. 유족회를 중심으로 애면글면 유족을 찾아내는 이유는 법의 이름대로 '명예회복'을 위한 것.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명의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후손이라는 증서 한 장을 달랑 쥐여준다. 주 이사장은 "진정한 명예회복을 하려면 서훈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은 순국선열을 '일제의 국권침탈(1895년)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항거하다가 그 항거로 인하여 순국한 분'으로 제한한다. 척양척왜(斥洋斥倭)를 내걸고 일본군과 싸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가 교묘하게 배제돼 있다. 1894년 7월 청일전쟁이 발발 뒤 총봉기한 혁명군은 11월 11일 공주 우금티 전투 뒤에도 토끼몰이하듯 쫓아온 일본군과 관군에 밀려 전라도 바닷가까지 밀려가며 죽임을 당했다. 기념재단은 1895년 1월 24일 대둔산 전투를 최후항전으로 기록한다. 전봉준,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등 지도자들은 같은 해 3월 30일 처형됐다. 혁명의 대부분이 진행된 1894년이 빠진 이유가 무엇일까. 주 이사장은 친일 역사학자들을 탓했다.
"1961년 제정된 보훈법(독립유공자법)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예규를 이병도를 비롯한 친일 역사학자들이 만들었다고 한다. 서훈 대상 시기를 1895년 을미사변(8월) 이후로 못박았다. 해서 을미의병은 되고, 갑오의병은 제외됐다. 양반 출신 을미의병 200여 명이 서훈을 받았다. 유족회는 혁명군이 봉기한 1894년 10월로 기준을 옮기는 노력을 하고 있다."
후손 등록은 고손자까지 한다. 그나마 법이 만들어질 당시 손자에서 증손자, 고손자로 확대됐다. 유족임에도 서류를 갖추지 못해 탈락한 분들이 부지기수다. 심의위원 7명에는 주로 역사학을 전공한 학계 인사가 포함되지만, 아직 동학 연구자는 없다. 역시 주 이사장이 안타까워하는 점이다. 독립유공자법 개정안은 21대 국회에서 국민의힘의 반대로 무산돼, 22대 국회 정무위에 다시 상정돼 있다.
올해는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이기도 하다. 국가가 안 하는 일을 일부 지자체가 챙기고 있다. 정읍 시의회는 관내 유족에게 매달 10만 원을 지원해 왔고, 전북 특별자치도 의회는 지난 9월 관련 조례를 통해 유족에 대한 수당 지급 근거를 마련했다.
"장기판에서 궁(宮)이 떨어지면 나라가 망한 거다.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심야에 경복궁을 기습해 왕과 왕비를 인질로 잡으면서 조선은 사실상 끝났다. 이후 군국기무처라는 괴뢰 정권이 생겼다. 청일전쟁도, 동학농민군 진압도 고종의 명으로 이뤄졌다. 해월 최시형 2대 도주는 '호랑이가 집안에 들어왔으면 참나무 몽둥이로 내쫓아야 한다. 일제히 일어서라!'면서 총기포(봉기)령을 내리셨다. 일본 놈과 싸웠는데 왜 독립유공자가 아닌가."
생존자들은 이름을 바꾸거나 고향을 등졌고 종교도 바꾸었다. 아직 남아 있는 동학 접주의 집을 찾아가면 교회가 들어선 곳이 많다고 한다. 살기 위해 '가면'을 썼고, 100년 세월이 지나면서 가면이 들러붙어 '딴 얼굴'이 됐다. 동학과 천도교의 유래를 쫓다 보면 의외로 '박정희'를 만난다. 그의 선친 박성빈이 동학의 접주였다는 사실이다. 주 이사장은 "박성빈은 원래 경상도 성주 사람으로 알고 있다. 죽임을 면하고 선산으로 피해 수원 백씨 문중의 산지기로 살았다"고 전했다.
그가 건넨 박정희의 친필 회고록 원고에는 모친에게 들은 말이라면서 "선친께서는 무과에 급제해 벼슬을 받았지만, 20대에는 동학혁명에 가담했다가 체포돼 처형 직전에 사면됐다고 한다. 어릴 때 어머니께서는 가끔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그때 아버지가 처형되었더라면 너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셨다"라고 적었다. '척왜'를 위해 싸운 동학 접주의 아들이 덴노에게 충성을 맹세한 일본군이 된 기막힌 역사의 아이러니다.
역사의 대하(大河)에는 '딴 얼굴'의 그들이 무수히 떠 있었을 것. 역사를 매조지지 않은 민족의 숙명이겠다. (박정희 회고록의 자필 원고 작성 시기는 5.16 군사 쿠데타 직후 이후로 추정된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1963년 정읍에서 처음 열린 동학 기념식에서 기념탑을 세웠고, 이후 수운회관 건립에도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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