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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탄핵 앞서 '쿠데타 군인'부터 배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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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3일 저녁 비상계엄을 선포한 가운데 4일 밤 서울 국회의사당에서 계엄군이 국회 본청으로 진입하고 있다. 2024.12.4. 연합뉴스

역사만 반복되는 게 아니다. 헌정질서를 깡그리 무시한 이들의 행동도 반복될 수 있다. 헌정질서 파괴나 군사반란의 주모자들은 그다지 창의적이지 않다. 과거의 나쁜 사례에 의존하는 사고구조를 갖고 있다.

4일 새벽 세계를 놀라게 한 '윤석열의 밤'의 '여진'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지진은 큰 지진 뒤 여진이 오지만, 군사작전 차원에서 접근하는 이들은 얼마든지 반대 수순을 밟을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긴급 담화 발표 뒤 시시각각으로 전개된 계엄군의 국회 난입을 보면서 많은 국민이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악몽을 떠올렸다. 친위쿠데타 기도가 6시간 만에 무산됐을지언정 대한민국 민주주의에 가할지도 모르는 '2차 가해'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1980년 당시에도 신호탄은 계엄령이었다. 전두환과 노태우, 정호용 등 한줌도 안 되는 정치군인들은 1980년 5월 18일 박정희 대통령의 피격 뒤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전국으로 확대해야 정치활동을 전면 금지하고, 대학에 휴교령을 내림과 동시에 총칼로 정국을 주도할 법적 근거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최규하 대통령 서리를 겁박했다. 이번엔 대통령이 중심에 섰다.

 

김용현 국방장관 후보자가 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2024.9.2. 연합뉴스

윤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발표하면서 생뚱맞게 '북한 공산세력의 위협'을 운운한 뒤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겠다"라면서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말했다. 발표에는 제주도의 포함 여부는 분명하지 않았다. 이어진 조치는 판박이였다.

계엄사령관에 임명된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은 못난 육사 선배들의 행적을 좇았다. 5월 17일 오전 11시쯤 신군부는 전국 주요 지휘관회의를 개최해 이른바 '시국수습방안'을 마련, 정권 찬탈 작전을 개시했다. 계엄포고 제10호를 발령, 모든 정치활동과 정치목적의 집회, 시위를 그지하고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은 사전에 검열을 받도록 조치했다. 박안수 사령관은 3일 밤 11시 23분쯤 대통령 긴급 담화 뒤 즉각 '계엄 포고령 1호'를 발표했다. 제1항이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 금지"였다. '국회'를 가장 앞에 배치한 건 시작부터 국회를 상대로 군사작전이었음을 분명히 한 것. 또 2항과 3항에서 가짜뉴스, 여론조작, 허위선동을 금했고,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 통제를 받도록 했다.

신군부는 최규하 대통령을 압박, 5월 17일 밤 9시 42분쯤 중앙청 내부에 250여 명의 무장병력을 1.2m 간격으로 배치해 놓은 상태에서 국무회의를 열도록 했다. 계엄군은 대통령의 비상계엄 해제요구안 처리가 논의된 국회 의사당 유리창을 깨거나 창문을 넘어 난입, 헌법에 따른 의정활동을 압박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6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여인형 국군방첩사령관에게 삼정검 수치를 수여하고 있다. 2023.11.6. 연합뉴스 

4일, 새벽 1시쯤 국회의 비상계엄 해제요구안이 재적의원 190명의 전원 찬성으로 의결된 뒤에도 대통령은 미적거렸다. 새벽 4시쯤 다시 담화를 내놓고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가 있어 계엄 사무에 투입된 군을 철수시켰다"라면서도 국무회의를 소집, 해제해야 하는데 아직 의결정족수가 충족되지 않았다는 핑계로 긴장을 이어갔다. 짧은 담화문을 통해 외려 국회를 향해 "탄핵 농단"을 되풀이 지적하며 위협한 것이다. 국회 의사당에 들어왔던 계엄군은 청사에서 철수했지만, 일부 병력이 인근의 한강 고수부지에 남아 있는 것으로 목격됐다. 대통령이 비상계엄 해제 담화를 발표한 것은 오전 4시였지만, 군이 투입한 병력에 본대 복귀명령이 떨어진 건 4시 22분쯤이었다. 그 '22분 동안' 비상계엄을 건의하고, 계엄사령관의 임명에서부터 계엄 사무에 개입한 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신군부의 핵심이 전두환이었다면 친위쿠데타 모의는 대통령에게 비상계엄을 건의한 김용현 국방장관이었다. 그는 4일 새벽 4시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해제하라고 한 직후 국방부 관계자들에게 소집해제를 지시하며 "중과부적이었다. 수고했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겨레신문이 4일 국 내부 상황에 밝은 소식통의 말을 빌려 전한 내용이다. 보도에 따르면 그는 비상계엄이 선포 즉시 국회에 통보해야 하고, 국회의 요구안이 통과되면 해제하도록 규정한 헌법 제77조의 위반이었다는 법적 사실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중과부적(衆寡不敵)'은 말 그대로 숫자가 부족해 많은 적을 상대할 수 없었다는 뜻. 지극히 군지휘관다운 말이었다. 예비역 육군 중장으로 민간인 신분인 그를 '정치군인'으로 명명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2019년 5월 18일 오전 광주 국립5·18민주묘지 희생자 조사천의 묘역에서 유가족이 관련 사진을 들고 서 있다. 유가족이 들고 있는 사진은 조사천씨의 영장을 그의 아들이 들고 있는 모습으로, 5·18의 참상을 알린 사진으로 유명하다. 2019.5.18. 연합뉴스

'정치군인'은 못난 선배들을 모방한다. 그 선배들의 행적에서 12.3 비상계엄 발령과 관련, 불온하기 짝이 없는 '선례'는 그해 5월에 있었던 '상무충정작전'이다. 정치군인들은 5월 21일 광주 시내 주요 시설에 배치했던 계엄군을 전남도청 집단 발포 사건 이후 시 외곽으로 철수시켰다. 그러나 물러간 게 아니었다. 이날부터 시 외곽 봉쇄작전을 펼쳤고, 곳곳에서 사상자가 발생했다. 22일 시민수습위원회가 활동에 나섰지만, 신군부의 의중에는 역심이 작동되고 있었다. 기어코 5월 27일 새벽 특전사를 앞세운 47개 대대 2만 317명의 계엄군을 일제히 투입, 민족사의 비극을 자행했다.

국내외 시선은 일제히 비상계엄 해제 이후의 정국에 쏠리고 있다. 여러 가지 시나리오 중 최악은 바로 일단 해산된 계엄사가 언제라도 다시 등장해 군사작전을 할 경우다. 1차 비상계엄 선포 과정에서 국회 통보는커녕 되레 계엄군을 국회 청사에 난입시켜 의정활동에 위협감을 조성하려 했던 그들이다. 언제든지 여진, 아니, 본 지진의 진앙이 될 수 있다.

검사 시절부터 "내가 군인이었다면 쿠데타를 했을 것"이라고 했던 대통령이다. 여기에 군사작전의 '노하우'를 제공한 게 정치군인들이다. 이번에 만천하에 입증했다. 김용현 국방장관을 필두로 정치군인들부터 제거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 장관과 함께 충암고 인맥을 대표하는 여인형 방첩 사령관의 거취는 또 다른 불안의 싹이다. 대통령 탄핵은 그다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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