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의 난'으로 어수선한 와중에도 세계 곳곳은 분쟁과 갈등으로 신음하고 있다. 낡은 분쟁의 상처에 딱지가 앉을 무렵 새로운 상처가 겹친다. 현실은 냉혹하고 희망이 아득하지만, 난민촌에도 생로병사의 삶이 있다.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그나마 유지되던 국제사회의 도움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면서 그나마 제공되던 온정이 줄었다. <시민언론 민들레>가 지난달 2일 정토회 (지도법사 법륜 스님) 구호단체 JTS와 함께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의 로힝야 난민촌을 찾은 연유다.
"인간다운 삶의 최소 조건"
지난달 2일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의 '우키야 캠프 4'. 뜨거운 햇볕 아래 검게 그을린 아이들이 실밥 터진 축구공 하나로 즐거운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난민촌 하면 떠오르는 텐트는 없었다. 얼핏 평화로워 보이지만, 경사지에 위태롭게 자리 잡은 임시 쉼터(shelter)가 밀집된 곳이다. 대나무와 방수천으로 지붕을 엮고 벽을 세웠다. 얼기설기 빈약한 건축자재는 부유하는 로힝야의 처지를 반영한다. 방글라데시 당국이 영구 거주를 원천 봉쇄하기 위해 벽돌과 시멘트 사용을 엄격히 금지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폭우로 집마다 지붕에서 빗물이 들어오고, 도로와 기간시설 부족 탓에 산사태가 발생, 1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LPG 가스 보관소를 비롯한 일부 유엔난민기구(UNHCR) 관리시설에 시멘트 사용이 허용된 건 그 이후.
끝이 보이지 않는 분쟁 속에서도 구호의 손길은 '작은 기적'을 일으킨다. JTS는 2019, 2022년 두 차례에 걸쳐 20만 개의 취사용 가스스토브를 지원했다. 이번 방문은 UNHCR 요청에 따라 비누 636만 개의 1차분(212만 개)을 건네는 것이 목적. UNHCR이 관할 하는 캠프 16곳에 거주하는 45만 명이 6개월 동안 사용할 분량이다. 3차분까지 전달되면 1년 6개월 사용분.
UNHCR 한국대표부가 JTS 서울 사무실을 방문, "국제사회의 관심이 우크라이나와 중동에 몰리면서 로힝야 난민촌 예산이 대폭 삭감된 탓에 기본적으로 제공하던 위생용품 공급이 어려워졌다"면서 지원을 청했다. 이후 박지나 JTS 대표가 여러 번 방글라데시 현지 시장조사와 업체 탐색을 한 뒤 지난 10월 비누 주문계약을 하고, 그 첫 생산분을 전달하는 자리였다. 지원을 결정한 뒤 후원자들에게 모금하는 과정을 병행한 것은 물론이다.
온정이 퍼뜨리는 '울림'
세숫비누와 빨랫비누를 한 달에 식구 수 대로 각 1장씩 제공한다. 피부병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아 항균성 비누로 준비했다. 여성에게는 6개월에 한 번씩 비누 6개가 추가로 제공된다. 로맹 드클루 UNHCR 방글라데시 대표부 선임대외협력관은 "이 비누는 단순한 위생용품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제공한다"라며 JTS 후원자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국제사회가 로힝야 난민 문제를 잊지 않고 있다는, 큰 울림을 주었다"는 치사가 뒤따랐다.
비누 전달식을 마친 대표단은 UNHCR 직원들의 안내로 JTS가 제공한 가스스토브를 사용하는 쉼터를 방문했다. 몰려든 아이들은 낯선 방문객을 호기심이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습관적으로 카메라를 들이댔지만, 사전에 촬영을 허락한 가정이 아니면, 촬영이 안 된다는 유엔 측의 주의가 있었다. 자칫 사파리 하듯 난민을 바라보는 시선에 상처받을 것을 염려한 조치. 골목길마다 도로포장과 최소한의 하수로 정비가 돼 있었다. 취사 공간과 생활 공간으로 나뉜 쉼터에 수도꼭지는 없었다.
-가스스토브를 사용해 보니 어떤가요?
"요리하는 게 굉장히 편해졌어요. 스토브가 있어 너무 행복합니다."
-빨래와 샤워는 각자 집에서 해요? 공동시설에서 해요?
"모두 공동시설에서 해요."
-비가 많이 올 텐데 천장에서 물이 새지 않나요?
"조금씩 샙니다.“
법륜스님과 박지나 대표가 아이를 안은 아주머니와 주고받은 문답이다. 식수도 곳곳에 마련된 물탱크에서 길어오게 돼 있었다. 샤워도, 빨래도 같은 장소에서 한다. UNHCR은 "여성들의 불편을 감안해 여성 공동 목욕 시설을 마련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JTS가 지원한 가스스토브는 UNHCR 난민촌에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사람과 자연을 살렸다. 처음엔 "난민촌에 무슨 LPG 가스?"라면서 부정적으로 대했지만, 이로운 점에 주목했다. 그전까지 땔감을 연료로 사용했기 때문에 주로 여성과 아이들이 산길을 헤매야 했다. 성폭행과 아동 납치의 피해가 끊이지 않았다. 서울 시내 음식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스스토브지만, 취사의 편리함은 물론 산에서 일어나던 폭력의 두려움에서 해방됐다. 난민촌 부지는 '공유림 지역'이었지만, 나무가 많지 않았다. 그나마 긁어모아 취사용으로 태웠다. 가스스토브 도입 뒤 나그네들이 빈 산에 나무를 심기 시작했고, UNHCR도 나섰다. 폭우 피해도 줄였다.
식량, 연료 외 줄어든 지원
우후죽순으로 세운 경사지 가옥이 폭우로 붕괴 돼 1명이 숨지는 사고가 있었지만, 이후 배관 하수 시스템을 만들었다. 요코 아카스카 캠프 소장은 "JTS가 지원한 가스스토브 덕에 더 이상 나무를 베지 않게 됐다. 이제는 녹색 공간을 넓히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황폐했던 산이 녹색으로 변한 사진을 들어보이며, 고마움을 전했다. 현지 주민들에게 "난민도 도움이 된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도 있었다. 요코 소장은 "우크라이나 전쟁 뒤 구호물품의 양과 품목이 모두 줄었다"라며 "LPG 연료를 비롯해 감축이 불가능한 품목의 공급을 유지하면서, 2차 품목의 수량을 줄였다"고 전했다. 예산을 줄인 품목이 바로 비누와 같은 위생용품과 셸터(가옥) 수리비용이었다. 그러나 "2023~2024년을 돌아보면 다른 긴급구호 현장보다는 상황이 나은 편"이라며 "다만 방글라데시의 정치적 변화가 예상되는 2025년 이후 상황이 우려된다"고 덧붙였다.
(방글라데시는 15년 동안 권좌에 앉았던 셰이크 하시나 총리가 지난해 8월 5일 봉기한 민중에 의해 축출된 뒤 과도기를 보내고 있다. 무함마드 유누스 최고고문이 임시정부 수반을 맡아 선거제도 개혁이 완료되는 대로 총선을 시행할 예정이다. 유엔 측은 유누스 고문이 "난민 문제를 현실로 인정하라고 말하지만, 문제는 관료들"이라면서 "국경에서 로힝야 난민들을 여전히 돌려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인도로 도피한 하시나 전 총리는 방글라데시 법원의 두 차례 체포영장 발부에도 불응하고 있다. 하시나와 달리 대통령 관저에 머물면서 막무가내로 체포영장 집행에 불응했던 '한남동 그 사람'을 연상시킨다.)
'난민들은 생계를 어떻게 꾸리느냐'는 법륜스님의 질문에는 "많은 난민이 물품 지원에 기대어 살고 있다. 작년부터 직업 교육을 시작해 일단 수리할 것이 있으면, 난민 중 목수나 기술자들에게 일할 기회를 제공한다. 방글라데시 정부가 캠프 밖 노동은 허용하지 않지만, 캠프 안에서는 가능하다"고 답했다. 문제는 아이들 교육. 영구 거주를 우려한 당국은 방글라데시 교과 수업을 금지하고 있다. 2017년 이후 도착한 나그네들의 아이들에게 미얀마 교과과정을 가르치고 있다. 요코 소장은 그러나 일부 부모들이 미얀마 교육을 거부해 올해부터 영어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5~8학년 과정이지만, 교육 이수증을 주지는 않는다.
아시아의 아픈 손가락
로힝야 난민촌은 아시아의 '아픈 손가락'이다. 콕스바자르 해안 인근 국유림 지역에 방글라데시 정부가 땅을 제공하고, 유엔이 시설을 건립했다. 생필품과 각종 서비스는 유엔과 각국 구호단체가 울력으로 마련한다. JTS도 그중 하나. 1970년대부터 미얀마 정부의 '인종청소'와 종교박해를 피해 낯선 땅에 찾아든 이들만 약 30만 명. 2017년 8월부터 미얀마 군부가 마을을 통째로 불 지르고 대량학살을 벌임에 따라 이듬해까지 75만 명이 몰려왔다. 급한 대로 누울 자리를 마련한 건 방글라데시 정부가 전격적으로 받아들인 덕분. 그러나 집도, 사람도 대지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얼추 100만 명이 머무는 콕스바자르 난민촌은 도시에 가깝다. 집과 학교, 여성센터, 직업 훈련원이 들어섰고 의료 시설, LPG 가스 공급 센터, 난방 및 취사용 가스스토브 수리 시설도 있다. 전체 면적은 20㏊. 33개의 난민촌을 UNHCR과 국제이주기구(IOM)가 나눠 관리하고 있다. 나그네들의 영양상태는 좋지 않다. 진성(景松) UNHCR 운영조정관은 "2023년 1인당 한 달 식량 예산이 12달러에서 8달러로 줄었다. 2024년 초 12.5달러로 회복됐지만, 이미 난민들의 영양상태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고 전했다. 세계식량계획(WFP)의 예산 삭감 탓에 2023년 조사 결과 영양실조율이 15.1%로 기준치(15%)를 약간 초과했다는 것.
열악한 생활환경은 범죄의 온상이 되고 있다. 진 조정관은 "지난 2년간 캠프 내 범죄조직 간 충돌로 범죄율이 두 배로 증가해 치안환경이 악화되고 있다"라면서 "치안 악화 탓에 방글라데시 정부가 바산차르 섬에 새로 건설한 난민촌에 이주하는 난민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10만 명 수용을 목표로 했지만, 현재까지 이주자는 3만 6000명에 그친다.
난민촌 운영의 원초적인 난관은 인구통계 작성이 어렵다는 점이다. 매년 약 3만 명의 아기가 태어나고, 새로운 나그네들이 합류한다. 2023년에는 방글라데시 정부의 국경통제 강화로 신규 전입자가 없었지만 2024년에는 약 5만 명이 들어온 것으로 추정한다. 문제는 신규 캠프 거주민 등록이 원칙적으로 금지됐다는 것. 방글라데시 정부는 동공과 지문 등 생체정보 등록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등록된 이들에게는 토큰을 지급, 의료 서비스 등에 쓰도록 하는 시스템이지만, 운영이 녹록지 않은 이유다. 필연적으로 무등록 거주자가 늘었지만, 기존에 거주하던 가족이나 친척이 없으면 생활 여건이 더 열악하다. 쉼터의 면적은 4.13평(16.35㎡). 당초 5인 가족용 공간이지만, 10명까지 북적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나그네들은 등록 과정에서 다시 미얀마로 추방될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인다.
난민촌 지속가능성의 가장 큰 변수는 미얀마 내 분쟁 상황이다. 진 조정관은 "(2018년 이후) 방글라데시 정부의 강력한 국경 봉쇄 정책으로 신규 난민이 크게 줄었지만, 미얀마 분쟁 상황이 악화하고 있어 잠재적인 유입 가능성이 여전히 있다"고 말했다. 라카인주에는 여전히 64만 명의 로힝야가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국경을 넘으면 땅을 잃게 된다는 걱정에 국내 실향민(IDP)을 선택했다. 2021년 군부 쿠데타 이후 미얀마 국토의 40% 정도가 내란 상태다. 진 조정관은 "(라카인주 역시 내란 중이라) 로힝야가 정부군의 직접적인 표적이 아니지만, 최근 로힝야가 반군을 지원한다는 이유로 폭력에 다시 노출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떠나온 라카인주는 '내전 지옥'
난민촌 방문 전 사흘(11.29~12.1) 동안 인도 첸나이에서 참여불교국제네트워크(INEB) 국제 컨퍼런스에 참가한 법륜 스님은 "정부군이 반군에 밀리면서 상황이 더 안 좋다"라면서 "정부군은 사람이 모여 있으면 아예 비행기로 폭격하고 있다"고 전했다. 컨퍼런스에 참가한 미얀마 학생운동 지도자들도 10명 중 8~9명은 "우리가 죽게 됐는데 무슨 로힝야냐"라면서 "영국이 군대 하인으로 데려온 벵골인들"이라고 말하더라는 것. "본래 라카인주에서 살고 있었다"는 로힝야의 주장을 아예 무시하고 있다. 라카인주는 지난해 곡물 수확량이 종전의 20%밖에 안 돼 주민 50만 명이 식량 위기를 겪고 있다.
군부독재의 폭정은 라카인주 내 로힝야 주민의 안전을 위협한다. 그러나 독재가 끝나도 난민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요원하다. 대규모 난민 사태를 야기한 2017~2018년은 놀랍게도 아웅산 수치의 민간정부가 있던 기간이다. 군경은 로힝야 주민의 무장투쟁을 유도한 뒤 이를 빌미로 마을을 초토화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수치 역시 군경의 로힝야 학살을 방관해 국제사회에 실망을 주었다.
1945년 독립 이후 역대 미얀마 정부는 다른 소수민족과 달리 로힝야에게만 시민권을 주지 않는다. 인구조사 대상에서도 제외했다. 법륜 스님은 2017년 로힝야 사태가 벌어진 뒤 미얀마 불교계의 지원 의향을 타진했지만 "불교 간 연대도 통하지 않더라"며 안타까워했다. 일부 불교 스님들은 되레 국제 구호단체의 로힝야 물품 지원을 차단하는 데 앞장섰다. 군부가 라카인주에 계엄령을 선포한 2012년, 국제위기그룹(ICG) 심층 여론조사 결과 주내 비로힝야 주민들은 대부분 군경의 치안 유지에 감사를 표했다.
로힝야와 미얀마 주민 간에는 종족과 이슬람 대 불교의 종교 갈등에 더해 영국 식민지 시절 역사적 원한까지 뒤엉켜 있다. 10여 년 전부터는 경제적 이해타산까지 분쟁을 악화시켰다. 라카인 주도 시트웨 항구에 준설 및 대형 선박 접안 시설이 들어서고 있다. 시트웨~인도 콜카타를 잇는 항로의 기점. 군부 정부와 중국은 2022년 4월 윈난성과 미얀마 서해안을 잇는 중국-미얀마 경제회랑(CMEC) 계약을 체결했다. 국내외 로힝야 나그네들의 귀향의 꿈은 갈수록 희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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