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외전략은 돈과 직결돼 있다. 트럼프가 지나치게 솔직하게 속내를 드러낼 뿐이다. 조 바이든 행정부의 '중산층을 위한 외교정책' 역시 외국의 돈과 일자리를 최대한 빨아들여 미국 중산층을 돕겠다는 것이었다. 지정학적 관점에서 트럼프 2기 취임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스스로 '피스메이커이자 통합자(unifier)'를 자임한 것이다.
'제국'의 피스메이커?
전투의 승리보다 전쟁의 종식을 군사적 성공의 척도로 삼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방점은 전쟁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말에 두었다. 전쟁 불개입→전쟁 종식→전투 승리 순으로 성공을 평가하겠다는 말이다. "취임 하루 전 하마스가 억류하던 인질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기쁘게 전한다"며 극적 효과를 더했다. 한편 반가우면서도 우려를 자아낸다.
조 바이든 시대, 우크라이나와 중동에서 진행 중인 2개의 전쟁을 평화롭게 종식하고 대만해협과 한반도에서 발생할 수도 있는 2개의 미래 전쟁을 예방한다면 크게 반길 일이다. 실제로 그의 첫 임기 동안 미국이 직, 간접적으로 개입한 전쟁은 없었다. 그러나 만사를 돈으로 환산하는 트럼프의 거래주의 사고에서 전쟁을 피하겠다는 선언은 평화를 사랑해서가 아니다. 전쟁이 돈이 되기는커녕 되레 "막대한 국부를 낭비해 가며 미국 젊은이들을 위험에 빠뜨렸다"는 오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트럼프가 취임 직후 주한미군과 화상통화를 한 건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다. 여느 대통령보다 해외 파병된 미군 병사에 대한 안쓰러움을 표현해 왔다. 주둔국 정부에 높은 방위비분담을 요구하고, 가급적 본국으로 불러들이겠다는 '소신'에서다.
트럼프의 '전쟁 불개입' 선언은 국제질서의 지각 변동을 예고한다. "자유민주주의 미국은 돌아오지 않는다. 미국은 더 이상 추상적인 가치에 충성하지 않는다." 트럼프 귀환의 의미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이혜정 중앙대 교수의 촌철살인을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미국 외교협회(CFR)에 포진한 엘리트들은 '고립주의로의 회귀'라고 점잖게 규정한다. 미국 밖의 관점에서 보면 국제질서는 약육강식의 정글이 될 수도 있다. 2차대전 이후 미국이 주도했던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저물어 가지만, 이를 대체할 새로운 질서는 아직 윤곽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글로벌 사우스는 천천히 온다. 질서가 없는 시대가 장기화할 수도 있다.
국가비상사태1, 멕시코 국경
트럼프가 선택한 두 곳의 전쟁터는 모두 미국 국내이다. 취임사에서 두 개의 국가비상사태를 언급한 곳이다. 첫 번째가 멕시코와의 남부 국경에 대한 국가비상사태 선언이다. 226년 전 적성국 국민법(Alien Enemies Act·AEA)를 환기하면서 불법이민자 단속에 정부 역량을 총동원하겠다고 말했다. 출신국으로 보면 1기 때 이슬람권과 라틴아메리카 출신 이민자를 모두 겨냥했다면, 이번엔 리오그란데강을 넘어오는 라틴아메리카에 집중했다. AEA는 대통령에게 전쟁 중 미국 시민이 아닌 사람을 구금, 추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미·영 6년 전쟁이 벌어졌던 1812년과 1·2차 세계대전 등 세 차례만 발동됐다. '군통수권자의 권한'을 강조하며 불법이민을 두고 '침공'이라고 표현, 전시 아닌 전시임을 최대한 과장했다. 멕시코 마약 카르텔을 테러집단으로 지정, 불법이민자 전체에 대해 범죄자 프레임을 씌우려는 의도도 감추지 않았다. 이민법원의 제동을 우회, 불법이민자에 대한 즉각적인 구금, 추방의 근거로 AEA를 소환한 것. 시대착오적 발상으로 보이지만 트럼프에겐 전통의 연장이다. 트럼프의 말은 신호탄이다. 미국 국방부는 텍사스, 애리조나, 캘리포니아 등 남서부 국경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군병력 1500명을 추가로 투입, 전체 병력을 4000명으로 늘렸다. 취임 36시간 동안 국경에서 460명을 체포했다.
1기 행정부 출범 당시와 마찬가지로 상·하원은 공화당이 장악했다. 1기 때는 첫 2년의 상당한 기간을 행정부 곳곳에 포진한 전통적인 관료들과의 길항작용 속에 허송했지만, 이번엔 MAGA의 대의명분에 충성스러운 인물들로 고위 공직자를 채웠다. 1기에 비해 획기적으로 보폭을 획기적으로 늘릴 것으로 예상된다. 2026년 중간선거 전까지 2년은 트럼프에게 골든타임이다. 궁극적으론 건설하다가 중단한 국경장벽을 완성하기 좋은 기간이다.
국가비상사태 2, 에너지 또는 석유경제
두 번째는 에너지 국가비상사태였다. 생활물가 잡기와 자동차 산업 부흥, 제조업 국가 복귀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것. 각료들이 부여된 모든 권한을 동원, 기록적인 인플레이션을 잡아 비용과 가격을 빨리 낮추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플레이션 위기의 원인으로 과도한 정부지출과 함께 에너지값 인상을 들면서 유전을 '파고, 또 파라(drill, baby, drill)'고 지시했다. 지난 세기의 낡은 에너지원으로 21세기 번영을 지피겠다는 것. 지구온난화에 역행하는 것은 물론이다. '황금 액체'라고 극찬한 원유와 가스는 그에게 만능열쇠다.
값을 낮추고 전략비축유를 다시 채우는 동시에 전 세계로 수출을 늘리겠다고 약속했다. 전기 자동차 보급을 늘리려던 조 바이든 행정부의 '그린 뉴딜' 정책을 폐기, 소비자들이 원하는 자동차를 사도록 하겠다는 것. 몇 년 전까지 상상도 못 하던 속도로 자동차를 생산하겠다고도 역설했다. 자동차를 필두로 미국이 단순히 제조업 국가로 복귀하는 게 아니라, 다른 어떤 제조업 국가보다 앞서나갈 수 있는 자산으로 세계 최대 매장량의 원유·가스를 꼽았다.
트럼프의 석유 사랑은 연방정부 차원에서 기존 시스템을 뒤집는 데 그치지 않는다. 1기 때처럼 파리 기후협약에서 탈퇴, 글로벌 흐름과 벽을 쌓았다. 자동차 생산을 미국에서 하겠다는 다짐은 1기 취임사에서 밝힌 '미국 상품을 사고, 미국인을 고용하라(Buy American and Hire American)'의 연장이다.
이상한 '프론티어 정신'
트럼프가 개입하지 않으려는 전쟁은 우크라이나전처럼 미국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남의 전쟁'이다. 미국의 전쟁이 아니다.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트럼프는 주저없이 군사력을 동원할 것인가? 트럼프는 취임사에서 알래스카의 북미 최고봉 이름을 데날리봉(해발 6190m)에서 맥킨리봉으로 되돌리고 멕시코만을 아메리카만으로 고치겠다는 국가주의 성향을 드러냈다. 트럼프는 지명의 변경과 영토확장 의지는 생뚱맞게 그가 취임사에서 강조한 프론티어 정신과 맥이 닿아 있다.
존 F. 케네디가 1960년 민주당 대선후보 수락연설에서 밝힌 '뉴 프론티어'는 취임 뒤 아폴로 우주선의 달 탐사로 이어졌다. 트럼프는 "화성에 성조기를 꽂겠다"고 밝혔지만, 달탐사처럼 국가적 프로젝트가 될 것 같지는 않다. 항공우주국(NASA)을 대신해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X와 보잉 등 민간 기업들이 우주개발을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제국주의를 연상시키는 영토확장 의지다. 파나마 운하 환수 의지와 취임사에 밝히지 않았지만, 그린란드에 대한 '전략적 관심'은 묘한 긴장을 자아낸다. 관심의 핵심은 그린란드의 동토에 풍부한 희토류로, 중국의 희토류 공급망 장악을 염두에 둔 것. 파나마 운하 회수의 명분 역시 사실상 중국이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영토 욕심을 벗어나 중국 견제의 전략적 성격을 띠고 있다. 그린란드와 파나마의 변죽을 울려 중국을 때리는 셈. 트럼프는 지난 8일에도 "파나마 운하는 우리나라에 필수적이며, 우리는 전략적 목적에서 그린란드가 필요하다"라면서 군사력 사용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트럼프의 영토 발언은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있다. 안데르스 비스티센 덴마크 의회 의원은 23일 CNN과의 인터뷰에서 트럼프를 향해 "젠장, 꺼져라(Fuck off)"는 욕설을 내뱉었다. 호세 라울 물리노 파나마 대통령은 최근 X 계정에 "파나마 운하와 부속된 지역은 모두 파나마에 속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트럼프가 실제로 무력을 동원할 가능성은 극히 적어보인다. 무엇보다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트럼프는 취임사 맺음말에서도 "우리의 힘은 모든 전쟁을 멈추고 세계에 새로운 통합의 정신을 가져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짖는 트럼프'와 '무는 트럼프'는 다르다. 그의 말을 무조건 불신할 이유는 없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믿을 이유도 없다. 그 중간쯤 어딘가의 그의 속내가 있다.
상대의 충격과 공포를 최대한 끌어올려, 협상에 돌입하기 전에 협상을 이기려는 트럼프 특유의 거래 방식의 일환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트럼프는 취임연설 들머리에서도 "우리가 직면한 도전은 많지만, 그러한 도전은 세계가 지금 목격하고 있는 위대한 동력(moment)에 의해 사라질 것"이라면서 실제 행동에 나서기 전에 문제가 해결될 것을 기대하는 심리를 숨기지 않았다.
미국 주류 언론의 비판적 접근을 먼저 읽으면 많은 한국 언론이 그들의 관점에 따라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의 당선을 기대했던 것처럼 허방에 빠지기 십상이다. 트럼프의 첫 메시지에서 드러난 8가지 포인트는 각각 독립적인 변수가 아니다. 서로 촘촘하게 연결돼 있다. 트럼프의 말과 행동을 면밀히 비교하며 우리의 선택지를 결정할 시간이다. 트럼프와의 두번째 게임은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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