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레이니 전 주한 미 대사(81·에모리대 명예총장·사진)는 18일(현지시간)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국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의 횃불과 같은 존재였다”면서 “40년 지기인 그를 잃은 데 대해 비통함을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 미 군정 시절 육군 방첩대 일원으로 여운형·김구 선생의 암살사건을 수사했던 그는 김 전 대통령을 좌익이라고 매도하는 한국 내 보수인사들의 주장에 대해 “한마디로 웃기는 얘기”라며 일축했다. 햇볕정책 역시 조지 부시 전 미 대통령의 실책과 북한의 핵개발로 벽에 부딪혔을 뿐 당시로는 “한반도에 변화를 불러올 적절한 정책이었다”고 평가했다.
-김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언제 어떻게 시작됐나.
“그와 40년 동안 친구로 지냈다. 1970년대 박정희 정부에 의해 투옥됐던 그의 석방운동을 하면서 직접 관련을 맺기 시작했지만 그를 안 것은 더 오래전이다. 미 군정 방첩장교에 이어 60년대 연세대에서 5년간 교편을 잡으면서 ‘신예 정치인’ 김대중을 알게 됐다. 80년대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가까워졌다. 주한대사 재직 시절(1993~97) 한 달에 한 번씩 만났다. 노벨평화상 수상 기념행사가 열린 지난해 12월 아내와 두 손자와 함께 서울을 찾아 가족 동반 저녁식사를 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오랫동안 연락을 끊지 않고 지냈던 친구다.”
-정치인 김대중을 어떻게 평가하나. 일각에서는 지금도 그를 빨갱이라고 비판하는데.
“웃기는 이야기다. 그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려 했던 용감한 투사였다. 박정희와 전두환에게 살해위협을 받기도 했다. 매우 강한 사람이었다. 많은 한국인에게 그는 희망의 상징이었고, 국제적으로는 ‘아시아의 만델라’였다. 그러한 용기가 있었기에 햇볕정책을 내놓을 수 있었다. 햇볕정책에 얼마나 많은 반대가 있을지 그 역시 알고 있었다. 위대한 지도자는 과감한 발길을 내딛는다. 다른 모든 (한국) 대통령들은 대북 강경 방침을 표하는 것으로 끝났다. 방위만을 강조하는 데는 아무런 상상력도 필요없지 않은가.”
-햇볕정책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평가한다면.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과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이 재직하던 2000년 두 나라는 북한 문제 해결에 큰 진전을 이뤘다. 그런 양국 관계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햇볕정책은 결코 순진하지 않았다. 잘 짜인 정책이었다. 다만 북한이 핵실험을 한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은 이제 쌍둥이 목표를 갖고 있다. 미국이 북한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북한의 핵보유를 단호하게 반대하고 있다.”
-햇볕정책이 대북 퍼주기였다는 주장도 있다.
“비난은 할 수 있지만 사실관계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1994년부터 부시가 취임했던 2001년까지 영변 핵시설은 동결됐고, 한국은 그동안 놀라운 경제적 진전을 이뤘다. 햇볕정책이 실패한 것은 조지 부시가 취임하면서 클린턴과 김대중의 정책을 거부하면서 비롯됐다.”
-김 전 대통령의 가장 오랜 친구인 스티븐 솔라즈 전 하원 동아태소위원장 같은 사람은 북한 인권문제에 매달리고 있는데….
“모두가 북한의 인권상황을 통탄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전쟁을 피하는 것이 가장 큰 인권옹호라는 사실 역시 알고 있다. 평화로의 긴 항해 끝에 결국 인권을 지키는 길도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생애 마지막 몇 달간 자신이 평생을 바쳤던 한국의 민주주의와 대북 화해정책이 후퇴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어쨌든 이명박 대통령이 병문안을 통해 존경감을 표해 기뻤다. 관대한 제스처였고 한국사에서 김대중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인식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전두환의 병문안 역시 오랜 정적이었지만 존경을 표한 것으로 본다.” 워싱턴│김진호특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