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서울 현저동의 독립문을 처음 본 감격은 오래 남는다. 남대문이나 동대문과 또 달랐다. 거대한 석문(石門)의 인상은 철들어 지구 반대편 파리 개선문의 웅장함을 목도하고도 흐려지지 않았다. 그 독립문이 박제된 문화재로 바뀐 것은 “싸우면서 건설하자”던 유신 말기 도시공학자들의 탓이다. 위치 자체의 역사성을 배려한답시고 직선으로 건설했어야 할 바로 옆 성산고가도로를 S자로 건설한 뒤, 결국 북서쪽으로 70m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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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로 경희궁의 정문, 흥화문(興化門)은 또 어떤가. 돌고돌다가 결국 제자리를 찾지 못하게 된 사례다. 일제가 1910년 경성중학(서울고등학교)을 지으면서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인 장충동 박문사 정문이 되더니, 해방 뒤 신라호텔 정문으로 쓰였다. 그나마 1988년 경희궁 근처로 이사왔지만 지형 변화 탓에 원위치를 찾지 못해 생뚱맞게 옛 서울고등학교 정문 자리에 놓였다. 도시 곳곳에 있는 구조물들은 단지 기능으로만 작용하는 게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기억과 역사, 주변 풍경이 어우러져 상상력의 공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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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서울시장이 청계천 재복원을 선언하면서 수표교를 제자리로 옮기는 것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반가운 이유다. 서울시장 시절, 임기 내에 거대한 콘크리트 인공어항을 만들겠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조급함에 2005년 청계천 ‘복원’ 당시 제자리로 돌아올 기회를 잃은 수표교다.
청계천 복개 뒤 1965년 아무 인연이 없는 장충단 공원으로 옮겨진 지 반세기가 다 되어간다. 복원된 청계천의 폭과 맞지 않아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없었다는 말은 제대로 된 복원이 아니었거나, 제대로 복원하기 위한 고민이 없었음을 말해준다. 청계천 자리에 건설된 인공물길이 본래의 천변풍경을 만들기는커녕 생경함마저 주는 까닭이다. 하긴 지극히 통속적인 상상력의 공간이던 피맛골 맛집들을 고층건물로 옮긴 것을 개발이라고 착각하는 얼치기 서울시장도 있었다.
<공간의 시학>을 쓴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집을 무한한 상상력이 태어나는 공간으로 생각했다. 특히 장소의 역사성과 연관된 구조물을 다른 장소로 옮겨놓으면 본래의 의미만 사라지는 게 아니다. 도시 공간에서 살아온, 또 살아갈 사람들의 상상력의 체계도 헝클어질 수밖에 없다. 상징의 강제이주가 더 이상 없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