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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審判)

칼럼/여적

by gino's 2012. 4. 12.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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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도 “심판”, 저기서도 “심판”이다. 심판이라는 단어가 유독 흘러넘쳤다. 19대 총선을 앞두고 여야가 벌인 유세전의 열쇳말을 꼽으라면 단연 심판일 게다. 어차피 선거는 투표로 심판하는 행위다. 하지만 이번엔 유독 풍성했던 심판 담론 탓에 좌판 위에 널린 ‘심판’ 중에서 골라잡기가 된 듯 하다.

유세과정에서 분출한 ‘심판’의 지적재산권은 정권심판론을 내세운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 등 야권에 있다. 야권은 한국 민주주의를 퇴화시킨 이명박 정부 4년의 실정을 심판 대상으로 했다. 4대강 사업은 물론 참여정부에서 수태했지만 기형아로 태어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제주 강정 해군기지도 심판 대상에 꼽혔다.

당연히 그 과정에 동참·지지·묵인해온 거대여당, 새누리당(옛 한나라당)도 포함됐다. ‘이명박근혜’라는 말이 나온 연유다. 여기에 ‘영포라인’의 깃털들이 벌인 민간인 사찰이라는, 민주화 이후 가장 죄질이 나쁜 범죄가 드러나면서 심판 대상은 더욱 넓어졌다.

 



하지만 유세가 종반으로 치달으면서 심판의 주체와 객체가 뒤엉켰다. 새누리당은 8년 전 막말로 파문을 일으킨 김용민 민주통합당 후보(서울 노원갑)를 심판 대상으로 규정했다. 민간인 사찰이라는 거악(巨惡)과 막말을 같은 피고인석에 앉힌 꼴이다. 새누리당은 그 정도로 안되겠다고 판단했는지, 야당 심판론이라는 희대의 아이디어를 내보였다. 지난 4년간 단 한차례도 의회권력을 잡지 못했던 야당을 느닷없이 ‘거대야당’으로 승격시키면서 유권자들에게 “거대야당의 위험한 폭주를 제어할 힘을 달라”고 호소했다.

이 와중에 선거판의 공식 심판 격인 선관위는 그렇지 않아도 심판이 난무했던 선거판을 더욱 헷갈리게 했다. 박근혜 위원장·손수조 후보(부산 사상)의 불법적 카퍼레이드를 두고 그 정도는 선거법 위반이 아니라 ‘인간의 도리’라는 이해할 수 없는 판정을 내리는 등 심판 역할은커녕 되레 심판의 대상으로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의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교도소 노튼 소장의 비밀금고를 가리는 그림에는 ‘심판의 날이 곧 오리라’는 성경 구절이 새겨져 있었다. ‘심판’이라는 말로 치부를 가려온 셈이다. 하지만 정작 심판을 받은 것은 그 자신이었다. 과연 누가 어떤 심판을 받게 될지 궁금하기 짝이 없는 투표일 아침이다.

입력 : 2012-04-10 21: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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