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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노인의 죽음

칼럼/여적

by gino's 2012. 4. 6.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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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거리를 찾아 쓰레기통을 뒤지게 되기 전에 (자살 말고) 존엄한 죽음을 택할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다.” 


지난 4일 아침 출근시간, 아테네의 신타그마 광장에서 권총으로 생을 마감한 77세 연금생활자의 죽음이 그리스를 흔들고 있다. 드미트리스 크리스툴라스란 이름의 노인은 총구를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기 전 “내 아이들에게는 빚을 남기지 않겠다”고 외쳤다고 한다. 약사 출신인 그는 우아한 노년을 꿈꿨을 법하다. 그러나 그는 유서에서 “35년 동안 연금을 부었지만 현 정부는 이 연금으로 생활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절규했다고 한다.



그리스 노숙인이 벤치에 누워 잠을 자고 있다. (경향신문DB)




월가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와 글로벌 금융위기. 1100억유로(약 174조원)의 구제금융과 가혹한 긴축정책. 유로존과 국제통화기금(IMF)…. 노인의 죽음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선 복잡한 고유명사와 숫자를 동원해야 한다. 하지만 쉽게 설명하자면 결국 사람이, 정치가 문제다. 제 일을 하지 않은 정치인들, 부패한 관료, 제 몫을 더 챙긴 기득권층이 노인에게 권총 방아쇠를 당기게 한 사람들이다. 


경제위기를 겪어온 지난 3년간 유럽에서 가장 낮은 자살률을 기록했던 그리스에서는 자살이 두 배로 늘었다. 노인이 생을 접은 소나무 밑에는 추모인파가 놓고 간 꽃다발들이 쌓이고 있다.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을 뿐,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사람들일 터이다. “자살이 아닌 정치적 살인”이라는 분노의 함성이 터져나오고 있다고 한다. 


남의 나라 이야기만은 아니다. 역시 구제금융에 기대 허위허위 넘겼던 외환위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살률 1위인 대한민국에서는 2010년 하루 평균 42.6명이 생을 포기했다. 노인들의 자살률은 특히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1998년 1165명이던 65세 이상 노인 자살자가 10년 새 2배로 뛰었다. 전 연령층에서 지난 3년간 자살을 기도했거나, 자살한 사람이 1500명에 불과하다는 그리스보다 심하다. 


극심한 양극화 속에 ‘88만원 세대’와 아무런 생활대책 없이 밀려나는 조기퇴직자들 역시 벼랑 끝에 서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의 손에 권총이 들려 있지 않을 뿐이다. 그리스는 다음달 총선을 치른다. 잘못된 정치를 심판할 수 있어 그나마 실낱같은 희망이 숨쉰다. 한국 총선은 나흘 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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