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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의 딸2, 네윈의 딸과 박정희의 딸

칼럼/경향의 눈

by gino's 2012. 6. 25.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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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6. 19

 

그 역시 장군의 딸이다. 쿠데타로 집권한 뒤 26년 동안 버마를 쥐락펴락했던 네윈의 딸 산다르 윈(60). 공교롭게 박근혜와 동갑이다. 아버지를 총탄에 잃은 박근혜와 달리 아버지의 후광을 넘치게 받았다. 고교 졸업 당시 대학입학자격시험에서 전국 1등을 할 정도로 재원이었다. 최악의 장기독재자 중 한 명으로 지탄을 받았지만 청년 네윈은 아웅산과 함께 항일투쟁을 했던 독립의 주역이다. 황군(皇軍) 장교였던 청년 박정희와는 출발이 달랐다. 하지만 박정희보다 1년 늦게 쿠데타로 정권을 잡으면서 독재자 클럽에 들어갔다. 네윈 역시 법과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거병을 해 1962년 7월 랑군대학교 시위를 유혈진압했다. “칼에는 칼로, 창에는 창으로 혼란에 맞서 싸울 것”이라고 다짐했던 그가 연 버마사회주의계획당의 1당 독재는 1988년 정계은퇴를 할 때까지 유지됐다. 박정희와 달리 91세로 천수를 누렸다. 아버지들의 정치인생이 달랐듯 딸들의 인생 역시 사뭇 다르게 풀렸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국내외 정치인을 맞비교하는 것은 늘 조심스럽다. 나라별 정치상황과 아버지의 공과도 다르다. 하지만 산다르 윈이나 박근혜는 모두 아버지의 정치적·경제적 유산을 누려왔다. 아버지의 과오를 인정하기는커녕 긍정해온 것도 닮은꼴이다. 민주주의 수업을 받기 전에 통치 수업을 직간접적으로 받은 점도 그렇다. 아버지식의 세계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짙다. 다른 점을 인정하되 바로 그러한 같은 점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발언하는 박근혜 ㅣ 출처 : 경향DB



네윈과 박정희는 1970년대 초 상처를 했다. 이후 박근혜가 조숙한 퍼스트레이디의 자리를 지켰다면, 산다르 윈은 아버지 정권의 2인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집권 말기에 병들고 늙은 네윈이 정서적·정치적 의지가지로 여길 만큼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버마사회주의계획당의 실력자들이 아버지를 만날 때면 반드시 그를 거쳐야 했다. 아버지가 퇴임한 뒤 군사정부의 총리를 지낸 킨 니훗을 정보부장으로 앉혀 정보까지 독점했다고 하니 권력 안의 권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근혜에게 ‘여자 박정희’라는 별칭이 따라다니듯 산다르 윈은 명실공히 ‘여자 네윈’이었던 셈이다.

박정희가 퇴임 이후 대책으로 영남대를 사실상 건립하고 강탈 또는 징발한 재원으로 정수장학재단 및 육영재단을 세워두었다면 네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1988년 퇴임 뒤 소마웅이 이끈 신군부가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랑군의 봄’을 짓밟은 뒤에도 막후 실력자로 남았기 때문이다. 산다르 윈은 이때부터 지도층 내 네윈세력의 좌장 역할을 하는 동시에 사업가로 변신해 호텔 체인과 병원, 통신, 나이트클럽까지 아우르는 기업군을 운영했다.

 

1990년대 말 남편과 아들 3형제의 쿠데타 모의가 탄로나고, 2002년 네윈이 사망하면서 권력과 재력을 모두 휘두르던 그의 천하도 종말을 고했다. 산다르 윈은 아웅산 수치처럼 랑군 시내 호숫가 자택에서 6년간 연금된 뒤 풀려났다. 박근혜는 전두환·노태우 신군부 집권 12년 동안 정권의 비호 또는 묵인 속에 유산 관리나 하면서 비교적 조용히 지냈다. 1990년 이후 육영재단 운영을 둘러싸고 자매들과 몇 차례 잡음을 빚었지만 정계 입문 전까지 여론의 큰 주목을 받지 않았다.

아버지들의 공과는 같지 않다. 네윈이 쿠데타 당시 아시아 유수의 선도적인 국가를 최빈국으로 전락시켰다면, 박정희는 경제발전에 성공했다. 하지만 끝이 좋다고 모든 게 좋다는 해석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나 통하는 이야기다. 박정희가 아니었으면 대한민국이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거나, 적화됐을 것이라는 논리에도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민주적 절차를 밟아 국민의 뜻을 좇는 민정은 경제발전에 성공할 수 없다는 억지를 인정해야 가능한 논리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어느 나라에서든 늘 소란스럽고 불편하며 시간이 많이 걸리는 과정이다. 하지만 그 어떤 ‘구국의 결단’보다 상위의 가치다. 헌법에 민주주의를 박아놓고 있는 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마지노선이기 때문이다.

장군의 딸, 독재자의 딸이 아버지 사후 30여년 만에 유력한 대선후보로 떠오른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쉽지 않다. 4·11 총선 승리 이후 박근혜가 주요 외신의 주목을 받는 이유다. 뉴욕타임스는 ‘더럽혀지지 않은 아우라를 지닌 독재자의 딸’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개인적인 캐릭터나 부모의 향수를 동원하는 방식으로 인기를 구축하는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있다. 미래를 말하지만, 과거에 머물러 있다. 김용환 전 재무부 장관이나 하나회 출신 강창희 의원 등 아버지 또는 신군부의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모이는 것도 심상치 않다. 최근에는 법적으로 이적행위가 드러나지 않은 일부 통합진보당 의원들을 겨냥해 ‘기본적 국가관’을 운운하면서 유신시대를 방불케 하는 색깔공세를 주도했다.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를 넘어 보편적 복지의 화두를, 대결적 남북관계를 넘어 평화통일의 과제를 마주하고 있다. 박정희 2.0 정도의 국가관이나 국정철학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멀리 떠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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