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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부는 4월의 복고풍

칼럼/경향의 눈

by gino's 2012. 4. 16.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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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논설위원

 

백두산 곳곳에 독립군들의 피맺힌 조국 광복의 염원이 새겨져 있었다. 연전에 북측을 통해 처음 밟은 백두산과 삼지연, 보천보, 대홍단군에는 풍찬노숙하던 항일 빨치산의 웅혼한 기상이 숨쉬고 있었다. 전사 한명 한명이 나무 껍질을 벗겨 먹으로 새겨놓은 ‘내 고향 떠나올 때/옷자락에 매달리며/꼭 왜놈 치고 돌아오라던/귀여운 누이동생 부탁/잊지 말자’는 식의 구호가 복원돼 있었다. ‘우리는/이천만 인민을 불러 일으켜/우리 힘으로/나라를 독립해야 한다’는 자주독립 의지도 담겨 있었다. 북측이 빗물에 씻겨간 먹물을 화학적으로 되살려 유리관 속에 전시해 놓은 구호목들이다.

 

수십 성상 동안 켜켜이 쌓였을 항일투쟁의 흔적들을 온통 김일성·김정숙·김정일 등 백두산 삼성장군의 업적으로 갈무리한 것은 균형을 잃었지만, 최소한 김일성의 항일투쟁은 남측 학계에서도 인정하는 바가 아니던가.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의 자손이 3대에 걸쳐 빈곤의 수레바퀴에 갇히고, 친일부역을 했던 놈들의 자손은 3대에 걸쳐 부귀영화를 누리는 한반도 남쪽에서 나고 자란 입장에선 부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서도 10여년이 지난 지금, 빨치산 정신을 천만년 이어가자는 정치적 언설은 생뚱맞다 못해 안타까웠다. 엊그제 평양에서 열린 김일성 주석 100회 생일 기념 인민군 열병식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이른바 ‘백두혈통’을 이어받은 김정은 노동당 제1서기는 젊은 시절의 김 주석을 연상시키는 묵직한 연설정치를 내보였다. 사거리 5000㎞가 넘는 대륙간탄도미사일과 스커드·노동·무수단 미사일 및 자폭형 무인공격기 등 신무기가 등장했지만, 전체적으로 김일성의 상징을 부활시킨 한 편의 정치공연이었다. 빨치산 시절을 상징하는 하얀 군복에 황토색 모자, 백마에 올라 백색 망토를 두른 기마대 역시 중요한 무대장치들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화려한 과거도 비루한 현재를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당연히 미래의 향도가 되지 못한다.

 

북한이 김일성 주석 100회 생일을 맞아 펼친 열병식 I 출처:경향DB

 

한반도 남쪽에서도 4·11 총선을 전후해 복고풍이 대세론을 형성하고 있기는 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는 말이다.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은 이번 선거유세 동안 유독 ‘미래’를 강조했다. “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평소의 언설과 사뭇 다른 전술적 변화다. 그러나 지난 2월 말 서울 상암동 박정희기념관 개관식 때는 과거로 회귀해 “이 기념관의 자료와 기록은 아버지 한 분의 것이 아니라 땀과 눈물로 나라를 일군 국민 모두의 것”이라고 말했다. “한분 한분이 근대화의 진정한 영웅”이라면서 “아버지 유지를 받들어 국민 모두가 골고루 잘사는 나라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충북 옥천의 어머니 생가를 방문해 적지 않은 중장년층 유권자들의 ‘육영수 향수’를 자극하기도 했다. 박정희·육영수·박근혜로 이어지는 혈통에 대한 자부심을 보란듯이 내보인 것이다.

 

북측이 항일 빨치산의 영웅들을 기리고 있다면, 박 위원장은 근대화의 영웅들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양극화에 부서지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경제민주화를 약속했지만, 한꺼풀 들춰보면 여전히 근대화 논리에 한 발을 담그고 있다.

 

물론 남과 북의 복고풍은 우연히 시기가 겹쳤을 뿐이다. 성격은 물론 양태도 온전히 다르다. 남측 복고풍의 운명은 남측 내부에서 결정할 사안이다. 12월 대선에서 아직 가시화되지 않은 새로운 리더십과 본선을 치른다는 점에서 계절풍에 그칠 수도 있다. 하지만 북측 복고풍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을 더한다. 북한이 지난 13일 장거리 로켓을 발사한 탓에 백두산 삼성장군이 그토록 피하려 했던 외세는, 실효가 없을지언정 국제사회라는 이름으로 다시 개입할 태세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대북 규탄 의장성명을 채택했다. 하지만 북을 침략하려는, 항일 빨치산 시대의 외세는 맹세코 존재하지 않는다.

 

북은 미국의 적대시정책이라는 가상의 위협을 빌미로 핵무기 프로그램을 멈추지 않고 있다. 조지 부시와 버락 오바마 등 미국 대통령들이 대를 이어 대북 불가침 의사를 공개연설로, 서면으로 천명했음에도 소 귀에 경 읽기다. 국제사회는 북한이 핵과 장거리 로켓 시험 카드를 들고 20년 가까이 벌이는 게임에 피로를 느끼고 있다.

 

설령 북한이 미국 본토에 도달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 기술을 획득하고 핵탄두를 성공적으로 탑재한다고 해도 미국에는 심각한 위협이 되지 않는다. 북이 발사단추를 누르는 순간 자살폭탄이 될 수밖에 없다. 러시아, 중국이 보유한 수천, 수만기의 핵무기와 상대하고 있는 미국 입장에선 한반도 밖으로만 핵 무기·물질·기술이 확산되지 않으면 별 걱정거리가 아니다. 확실한 보복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이건, 북이건 한반도 거주민들에게는 ‘우리 민족끼리 자폭’이 될 수 있다. 복고풍이건 아니건, 남측의 리더십이 북측과 평화를 도출해내야만 하는 이유다. 북은 항일 빨치산 시대에 고착된 김일성-김정숙-김정일 류의 리더십을 그만 접었으면 한다. 남도 역시 군사독재 시절로 회귀하려는 박정희-육영수-박근혜 류의 시대착오적인 복고풍을 말끔하게 걷어내야, 비로소 미래를 도모할 '12월의 희망'을 만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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