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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경향의 눈

장군의 딸1, 아웅산 수치와 박근혜

by gino's 2012. 5. 21.

격동기 아시아에서 태어난 두 사람은 장군의 딸이다. 두 살 터울의 아버지들이 군복을 입을 무렵 두 나라는 모두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다. 한 아버지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식민모국과 싸웠고, 다른 아버지는 굴종했다. 한 아버지는 영원한 독립의 영웅으로 인정받지만, 다른 아버지는 경제발전의 지도자라는 찬사와 함께 독재자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난달 버마 하원 입성으로 주목을 받은 아웅산 수치(67)와 박근혜 새누리당 의원(60)을 두고 하는 말이다. 



아웅산 수치 여사가 양곤의 민족민주동맹 당사에 도착하고 있다. (경향신문DB)




수치와 박근혜는 각각 비명횡사한 아버지의 후광으로 정치에 입문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소란스러운 정치판에 어울리지 않을 법한 청초한 이미지를 풍긴다. 그래서인지 압제에 시달리거나 기성정치에 물린 국민들에게 다른 세상, 다른 정치의 희망을 엿보게 한다. 수치와 박근혜가 모두 선거의 여왕인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인지도 모른다. 수치의 민족민주동맹은 1990년 총선에서 의석의 81%를 휩쓸었다. 박근혜는 2004~2006년 한나라당 대표 시절 치른 40차례의 재·보선에서 전승을 했다. 두 사람은 지난달 또 다른 승리의 축배를 들었다. 수치의 민족민주동맹은 보궐선거 45석 중 43석을 얻었다. 박근혜가 비대위원장으로서 이끈 새누리당 역시 국회 다수당 지위를 지켰다. 손에 붕대를 감아야 할 정도로 그의 손을 잡으려는 유권자들이 많았다. 


 국내외 정치인을 맞비교하는 것은 늘 조심스럽다. 각국의 정치 현실과 개인의 자질, 품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모든 차이를 인정하더라도 나란히 견줘봄으로써 안 보였거나, 덜 보였던 진면목을 확인할 수도 있다. 올해 들어 아시아에서 가장 주목되는 여성 정치인으로 꼽히는 수치와 박근혜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 두 사람의 삶은 홀로 서는 과정에서 극명하게 갈린다. 



(경향신문DB)



수치는 스스로 민주화의 상징으로 떠올랐지만, 박근혜는 아버지의 빛과 그림자에 머물렀다. 아버지 아웅산이 피격됐을 때 수치는 두살배기였다. 이후 정계에 뛰어들기까지 인도·영국 유학을 거쳐 뉴욕 유엔본부 직원과 버마 정부의 공무원, 노동운동가로 활동했다. 프랑스 유학 첫해 모친의 사망으로 급거 귀국, 5년간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맡았던 박근혜는 1979년 부친 사망 뒤 처녀가장이 돼야 했다. 청와대가 신당동 사저로, 황금마차가 호박마차로 바뀌는 허탈감이 있었을지언정 생활고와는 거리가 멀었다. 10·26 사태 직후 전두환이 쥐어준 ‘생계비’ 6억원으로 시작한, 푼푼한 살림이었다. 밑바닥부터 커리어우먼의 길을 밟은 적도 없다. 육영재단과 영남대, 정수장학회를 운영하던 ‘이사장의 시대’를 보냈을 뿐이다. 


정치인 수치는 8888봉기로 불리는 1988년 버마 민주화 운동이 유혈진압된 뒤 지난해 말까지 대부분의 세월을 영어의 몸으로 보냈다. 그 사이 남편이 해외에서 별세했다. 두 아들과의 재회마저 자유롭지 않은 힘겨운 시간이었다. 군부는 가족을 만나려면 출국하라고 종용했지만 수치는 한번 떠나면 돌아오지 못할 아버지의 땅을 지켰다. 가택연금이 역으로 유일하게 남은 민주화 투쟁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정치인 박근혜는 여전히 아버지를 두둔해야 하는 처지다. 그에게 5·16 쿠데타는 구국의 결단이고, 대한민국 법원이 강탈한 장물로 규정한 정수장학재단은 법적으로 하자가 없으며, 민주화 과정의 피해는 산업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일어난 일일 뿐이다. 2007년 대선 출사표를 던지면서 산업화 시대와 민주화 시대의 화해를 강조했지만, 그렇다고 땀흘려 일한 산업화 시대의 주역도 아니었다. 과거사에 대한 엉뚱한 해석의 잣대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명박 정부의 민간인 사찰을 다른 정권에서도 있었던 일이라고 치부하고, 공영언론의 장기간 파업 사실조차 몰랐던 걸 보면, 여전히 산업화 시대가 정당화한 반민주 또는 비민주적 유전자를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을 사고 있다. 


수치가 다민족국가인 국내의 광범위한 지지와 국제적인 평가를 받는 반면, 박근혜의 정치적 기반은 아직 부모의 고향 언저리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수치는 선친의 고향과 상관없이 자신이 노동운동을 했던 곳이자 2008년 사이클론 피해가 컸던 남부 카운훔을 지역구로 선택했다. 박근혜가 누려온 물질적 풍요와 정치적 자산이 상당 부분 부모 덕이라면, 수치는 자신의 활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노벨평화상과 사하로프상, 네루상, 시몬 볼리바르상 등을 수상했다.


버마의 정치현실은 박정희의 유신시대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지난달 보궐선거 압승에도 불구하고 수치의 민족민주동맹은 군부 대표 110석을 포함해 전체 440석의 하원에서 10%에 불과한 의석을 얻었을 뿐이다. 수치가 다시 갇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수치의 과거와 미래를 일직선으로 그으면 민주주의라는 뚜렷한 방향성이 읽힌다. 박근혜의 경우 그게 분명치 않다. 애당초 비교 대상을 잘못 택했는지도 모른다. 아웅산의 딸보다는 1962년 쿠데타로 집권해 26년간 버마의 권력을 틀어쥐었던 네윈의 딸이 박근혜와 더 비슷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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