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만에 상·하원을 장악한 미국 민주당이 변화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지난 4일 상·하원 개회식을 출발점으로 이라크 주둔미군의 단계적 철군 및 ‘회기 첫 100시간 의제’를 중심으로 개혁속도를 내고 있다. 하지만 1994년 공화당의 의회 장악과 2000년 조지 부시 미 행정부 취임 이후 6년 동안 오른쪽으로 일방통행했던 미국 사회의 방향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당내 공감대가 마련되지 않았다는 게 지배적인 관측이다.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을 비롯해 민주당 지도부는 ‘새로운 방향, 새로운 미국’을 강조하고 있지만 정작 새로운 방향의 성격에 대해서는 모호한 상태다. 민주당 내에서는 동성애 결혼과 낙태 허용 등에 대한 전통적인 당의 이념을 부활해야 한다는 진보의 목소리가 있는 반면에 이번에 공화당 지역구에서 대거 원내 진출한 보수 또는 중도주의 성향의 의원들과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걸었던 ‘제3의 길’을 여전히 선호하는 ‘뉴 데모크라트(뉴뎀)’의 중도파도 건재하다.
펠로시 의장은 지난 4일 하원 흑인의원회의에 참석, 당내 계파간의 경쟁 움직임에 대해 “민주당은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과거의 인질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새 방향’은 “선택된 소수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서 ‘보통사람’을 위한 정치를 강조했다. 민주당 코커스(간부회의 또는 의원회의) 의장인 램 엠마누엘 하원의원(일리노이)은 민주당 아젠다를 ‘중산층의 취약해진 경제적 안보를 복원하는 것’에 두었다.
하지만 당내 진보 및 리버럴 성향의 의원들은 그동안 부시 행정부의 공화당 주도 의회가 대내외 정책 전반에서 우향우를 해온 만큼 방향수정이 불가피하다는 정서를 갖고 있다. 패트릭 리히(버몬트) 법사위원장은 “미국민들은 많은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민주당의 새 방향이 부시의 이라크 정책 전환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대체로 큰 이견이 없어보인다. 하지만 국내 정책으로 들어오면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당내 진보와 보수 세력 간의 의견충돌과 많은 유권자들이 이미 우경화한 상황에서 급격한 방향전환을 꾀할 경우 아직 미약한 민주당 지지 분위기를 해칠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다.
민주당이 110대 의회 ‘회기 첫 100시간 의제’로 내놓은 안건들은 대부분 대중에 영합하는 포퓰리스트 정책들이 주를 이루지만 이념적 스펙트럼에서는 중도적인 성격이 짙은 것으로 지적된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대공황 당시 내걸었던 ‘취임 첫 100일’ 슬로건에서 착안, 지난 94년 공화당이 내세웠던 ‘미국과의 계약’의 반대명제로 내세웠지만 당의 획기적인 이데올로기적인 전환의지를 담고 있지 않은 것이다.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이 중간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던 ‘100시간 의제’는 우선 하원 개회와 동시에 로비스트 및 입법활동과의 연계고리를 끊겠다는 ‘사상 가장 윤리적인 하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중간선거에서 이라크전 못지않게 많은 표를 끌어모은 깨끗한 정치에 대한 유권자들의 희망을 반영한 조치다. 동시에 9·11위원회가 권고한 국토안보 강화조치들의 입법화를 양대 최우선과제로 내세웠다.
의회 근무시간 기준 100시간 동안 추구할 의제들은 이밖에 ▲연방최저임금 7.25달러로 인상 ▲학자금 융자 이율 50% 인하 ▲메디케어(65세 이상 노인 및 65세 이하 장애인·신장말기환자 대상 의료제도) 약값 인하 ▲줄기세포 연구에 연방기금 제공 ▲예산적자 감소 ▲부시 대통령의 감세안 부분적 폐지 ▲석유기업 세제 보조금 종식 및 대체에너지 진흥 등이다.
중산층을 중심으로 체감할 수 있는 경제적 효과를 주겠다는 것이지만 증세와 낙태 문제를 비롯해 미국사회에서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주요 규범들은 배제했다. 부시의 감세안에 대해 부분적인 손질만을 요구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찰스 슈머 상원의원(뉴욕)은 “세계가 변했다”면서 “낡은 민주당과 공화당의 가치가 아닌, 새로운 해법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선택의 기로에 놓인 민주당을 바라보는 공화당은 다소 느긋한 입장인 것 같다. 민주당원들이 신속하게 당론을 정할지 불투명한데다 2008년 대선을 앞두고 이념보다는 실리를 추구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한 공화당 고위간부는 최근 워싱턴포스트지 회견에서 “민주당이 부시 행정부에 대해 적대적으로 나온다면 개구리를 앞에 둔 전갈과 같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개구리를 물고 싶은 충동은 강하지만 자칫 스스로가 다칠 수도 있다는 우화에 비유해 민주당의 선택이 쉽지 않을 것임을 지적한 것이다.
그렇다고 민주당의 개혁바람이 ‘100시간 의제’에 국한될 것이라는 전망은 속단인 것 같다. 계파별 다양한 입장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원들은 이라크 전쟁을 비롯한 대외정책은 물론 부시 행정부와 공화당이 ‘다수의 횡포’ 속에 입법화해놓은 수많은 법률과 행정세칙 등에 대한 정밀 재검토를 하자는 데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고 워싱턴포스트는 분석했다. 그 검토 과정에서 민주당이 찾고 있는 새 방향이 구체화될 것이라는 관측이다.
1990년대 중반 클린턴이 던진 ‘뉴뎀’의 화두는 대처리즘을 겨냥했던 토니 블레어의 뉴 레이버(새노동당)로 이어져 제3의 길이라는 굵은 흐름을 낳았다. 미 보수주의 혁명의 퇴조가 지난해 11월 중간선거로 가시화된 상황에서 민주당이 또 어떤 변화의 방향을 제시할지 주목된다. 보수와 진보, 공화당과 민주당의 가치가 혼합된 제3의 길에 환호했던 미 중산층은 또 다른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워싱턴|김진호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