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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의 눈]루저 동맹

칼럼/경향의 눈

by gino's 2013. 1. 2.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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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초 미국 워싱턴 연방의사당에서의 일이다. 유엔 장애인협약의 비준을 추진하던 상원의원들이 비준 표결을 하루 앞두고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대다수의 공화당 의원들이 반대하면서 비준 전망이 밝지 않았기 때문이다. 발언을 끝낸 존 케리 의원(민주)이 존 매케인 의원(공화)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매케인은 느닷없이 “고맙습니다, 장관(Thank you, Mr. Secretary)”이라는 농을 던졌다. 케리로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버락 오바마 2기 행정부의 국무장관에 공식 내정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얼굴이 상기된 케리는 그러나 곧바로 “고맙습니다, 대통령(Thank you, Mr. President)”이라고 응수했다.

 

 

                                               존 케리(왼쪽)과 매케인

매케인(76)과 케리(69)는 모두 대선에 출사표를 냈다가 쓴잔을 마신 루저(패배자)들이다. 좌중 곳곳에서 웃음이 새어나오면서도 묘한 긴장이 흐른 까닭이다. 그 순간 껑충한 키의 케리는 매케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면서 “루저 두 명이 어울리다 보면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는 조크로 자칫 어색해질 수 있는 상황을 정리했다. 유튜브에서 유포되는 장면이다. 두 사람의 루저는 지난 6년간 126개국이 비준을 마친 장애인협약의 비준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협약은 여성 장애인·장애아의 권리, 장애인 이동권과 문화접근권 등 생활영역에서 장애인 차별 예방을 골자로 한다.

신년 벽두부터 다른 나라 정치판의 해프닝을 소개한 이유는 18대 대통령 취임을 앞둔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51 대 48로 갈린 18대 대선 결과는 기왕의 지역별 표갈림에 세대별 분열까지 더했다. 박근혜 당선인이 언급한 국민대통합에 시대적 책무가 한층 무겁게 실린 까닭이다. 하지만 언필칭 대통합은 역사에 획을 긋는 식의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니다. 케리와 매케인이 현실정치 무대에서 보여준 소신의 결합, 가치의 동맹이 하나하나 모여서 이뤄지는 것일 게다. 물론 미국 정치의 풍경이 늘 이렇게 훈훈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경기부양 예산과 보건의료 개혁, 재정절벽 등 국운이 걸린 현안을 놓고 정파별로 ‘닥치고 반대’가 일반화되고 있기도 하다. 부시가 벌인 테러와의 전쟁과 부자감세, 비즈니스 프렌들리 탓에 국가재정이거덜나고 양극화는 파국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정파싸움에 코가 빠져 있다. 미국 정치는 이 점에서 ‘한국 정치화’하고 있다.

미국에서건 한국에서건 선거에서 중도 또는 상대편을 끌어들이지 못하면 승률이 낮아진다.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을 지지한 ‘레이건 민주당원’이 있었다면, 최근에는 ‘오바마 공화당원’들이 사상 첫 흑인대통령에게 두 번째 승리를 안겼다. 하지만 선거가 끝난 뒤 개개 현안에서 정파적 갈등만 들이댄다면 정권만 실패하는 게 아니라 국가도 후퇴한다. 정치판의 이전투구 과정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방치되는 것은 국민이다.

케리·매케인의 유쾌한 기자회견 다음날, 의사당에서는 더욱 감동적인 광경이 벌어졌다. 상원의 비준 표결을 앞두고 또 한 명의 루저가 가세한 것이다. 공화당 상원의원 출신으로 당을 막론하고 존경을 받고 있는 원로정치인 밥 돌(89). 그 역시 1996년 대선에서 패배했다. 최근 월터 리드 국립병원에서 퇴원한 그는 아내 엘리자베스가 미는 휠체어에 실린 채 등장했다. 돌은 정치인생을 같이한 공화당 의원들에게 협약 비준을 간절하게 호소했다. 공천권을 쥐고 있지는 않지만 YS가 부산·경남 의원들에게, DJ가 호남 의원들에게 당부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결과는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휠체어에 앉아 동료 공화당 상원의원들의 표결장면을 지켜보는 돌. 하지만 38명의 공화당 의원들은 결국 반대표를 던졌다.


매케인을 포함한 8명의 공화당 의원들이 찬성표를 던졌지만 역부족이었다. 비준에 필요한 66표에서 5표가 모자랐다. 공화당 의원 30여명은 협약안이 비준되면 국내법과 충돌해 유엔의 관료주의가 주권을 흔들 수 있다는 논리로 반대했다. “유엔 때문이 아니라 미국 장애인들을 위해 여기 나왔다”는 돌의 외침은 끝내 먹히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 정치는 이 같은 가치와 소신의 동맹이 있어 희망이 있다. 이들은 올해도 장애인협약 비준을 시도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이번 대선에서 박근혜·문재인 후보는 주요 현안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대를 이룬 것으로 비쳤다. 그렇다면 이는 희망의 조그만 근거가 될 수 있다. 대기업이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의 고혈을 짜내는 야생의 생태계를 인간화하는 경제민주화에서부터 복지 문제에 이르기까지 현안은 쌓여 있다. 북한 핵프로그램을 비롯한 대외환경은 ‘21세기 들어 최악’이라는 전망마저 나온다. 소모적인 보·혁 갈등의 틀을 깨고 문제 해결에 울력을 다하는 솔루션 모드로 전환해야만 하는 시점이다. 누군가의 ‘위대한 치적’ 한 방으로 해결될 문제들도 아니다. 과정 과정에서 수많은 미니 통합이 없으면 무엇 하나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올해도 국내외 한해살이 전망은 맑지 않다. 하지만 한국 정치가 희망을 주는 솔루션 비즈니스로 전환하는 원년이 됐으면 한다. 입력 : 2012-12-31 21:3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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