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속으면 속인 사람이 나쁘지만, 두 번 속으면 속은 사람이 문제다(Fool me once, shame on you. Fool me twice, shame on me)’라는 미국 격언도 20여년 동안 반복돼온 북핵 위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몇 차례 실수로도 모자란 듯해서 하는 말이다.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 안보 기상도에 먹구름을 드리우는 북핵 위기를 속고 속이는 게임으로 보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하지만 유사한 궤적을 그리면서 언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데자뷔의 인상을 연거푸 주는 게 사실이다.
안보리는 북한의 2012년 12·12 장거리 로켓 발사를 규탄하면서 채택한 대북제재 결의 2087호에서 북한이 탄도미사일 기술을 이용한 발사 또는 핵실험 등의 추가도발을 할 경우 ‘중대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빈말이 될 공산이 크다. 2009년 안보리 의장성명에 담았던 경고이기도 하다. 북한의 1, 2차 핵실험 당시 채택됐던 안보리 결의 1718·1874호 역시 실질적인 대북 압박책이 되지 못하고 있다.
북한 장거리로켓 잔해 (경향신문DB)
북한의 태도 역시 데자뷔다. 지난주 외무성·국방위원회·조국평화통일위원회 명의의 성명을 내고 추가 탄도미사일 발사는 물론 3차 핵실험도 강행하겠다는 의지를 공표했다.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국가적 중대조치’를 취하겠다는 말로 안보리 경고를 되받았다. 오죽하면 SNS상에 “북한이 장거리 로켓 발사하면 또 모하겠노, 안보리 제재 하겠제. 안보리 제재하면 모하겠노, 핵실험 하겠제. 핵실험 하면 또 모하겠노…”라는 허무 개그까지 등장했겠는가. 하지만 비슷해 보인다고 위기의 성격이 같은 것은 아니다. 작금의 상황은 북핵 위기 발발 이후 최악의 국면에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
북한은 지난달 인공위성을 대기권에 진입시킴으로써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에 한층 다가갔다. 북한 국방위가 강조한 ‘높은 수준’의 3차 핵실험 성격도 심상치 않다. 획기적인 폭발력 증대나 핵융합기술로 소형화한 증폭 핵분열탄 실험 가능성이 거론된다. 특히 우라늄탄일 경우 북한의 3차 핵실험은 과거와 달리 핵무기 개발의 이정표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북한이 3차 핵실험 또는 추가 장거리 로켓 발사에 성공한다면 북핵 위기는 미답의 영역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물론 3차 핵실험을 강행하면 가장 중대한 손실을 각오해야 하는 것은 북한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두 번째 취임사에서 “다른 국가와 차이를 다뤄나갈 용기가 있다”면서도 “어떤 상황이나 의심과 두려움을 제거해 나가는 방법은 적극적 대화(engagement)라고 생각한다”고 말해 대결과 대화의 가능성을 모두 열어놓았다. 박근혜 정부도 남북 대화 재개를 강조하고 있다. 북한이 성급하게 3차 핵실험을 한다면 이 모든 우호적인 환경이 일거에 망쳐진다. 한·미 새 정부가 이명박 정부나 조지 부시 1기 행정부와 같은 선택지만을 갖게 됐을 때 북한은 잃을 것이 더 많을 뿐이다.
이쯤 와서 한국과 미국이 불편하더라도 인정해야 할 진실은 대북 압박과 대화를 간헐적으로 반복해온 기존 접근방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점이다. 핵과 미사일은 물론 북한 체제 보장과 평화체제 등 한반도 문제의 근본적인 의제들을 모두 한 테이블에 올려놓는, 포괄적인 접근만이 남았을 뿐이다. 지난주 비핵화 포기를 선언한 북한 외무성 성명이 ‘조선반도와 지역의 평화안정을 보장하기 위한 대화’의 문을 열어놓은 것은 북·미 간 평화협정 체결을 염두에 둔 포석에 다름 아니다.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기존 방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때는 사고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북핵 해결 이후에 평화체제를 논의하려던 9·19 공동성명의 우선순위를 바꾸는 것도 방법이다. 가급적 남북한과 미국 등 3국 정상이 한자리에 앉는 것이 좋겠지만 일단 북·미가 먼저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차피 6자회담이 활발하게 가동될 때도 6자회담 속 북·미 회담이 진행되지 않았던가.
Carl Ford
개인적으로 발상의 전환이라는 화두는 부시 1기 행정부에서 국무부 차관보를 지낸 칼 포드의 제안을 떠올리게 한다. 원조 보수이면서도 오바마를 지지했던 그는 2007년 5월 카네기 국제평화재단 토론회에서 캠프 데이비드 북·미 정상회담을 공개 제안한 바 있다. “지난 수십년간 북한의 핵무기 확산을 막으려던 미국의 최우선 목표는 실패했다”면서, 그 이유로 “북한이 먼저 행동한 뒤에나 움직이겠다는 셈법이 틀렸기 때문”이라고 적시했다. 따로 만난 그가 “북한이 거부하더라도 미국이 이러한 제안을 함으로써 마음을 열 준비가 돼 있음을 보여줄 수 있다”고 역설하던 모습이 선하다. 당시 대선 후보였던 오바마는 “이란과 쿠바는 물론 북한 지도자와도 조건 없이 만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그후 6년 만에 발상의 전환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지경에 처했다.
북핵 위기의 국면마다 누가 속이고 누가 속았는지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북핵이라는 눈앞의 문제에 연연해 한반도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에 관심을 덜 기울여온 것은 분명하다. 포드의 제안을 새삼 상기할 까닭이 충분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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