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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여적

'동흡하다'

by gino's 2013. 1. 22.

[여적]헌법지킴이

 

1987년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대법관 후보자로 로버트 보크를 지명하자 전 미국이 들썩거렸다. 주요 신문 전면에 반대광고가 실리는가 하면 인준청문회를 맡을 상원에 집단 항의편지 쓰기, 거리시위, 상원의원들을 상대로 한 설득 로비가 벌어졌다. 시대정신을 정면으로 역행해온 그의 판결 성향 때문이었다. 보크는 1960년대 민권운동의 유산으로 얻은 인종차별 금지를 애석해하고 주정부가 여성의 낙태를 금지할 수 없도록 한 대법원의 ‘로 대(對) 웨이드’ 판결에 부정적인 입장을 표해왔다. 헌법정신에 위배되는 인물에게 대법관직을 줄 수 없다는 것이 반대의 명분이었다.

 

 

레이건이 보크를 대법관으로 지명하자마자 '로버트 보크의 나라'라는 제목의 반대연설을 하고 있는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 청문회에서 반박하는 보크.


정치적, 이념적 편향성도 도마에 올랐다. 보크는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지시한 ‘토요일 밤의 학살’ 집행자였다. 닉슨이 내린 아치볼드 콕스 특별검사의 해임 명령에 불복해 법무부 장·차관이 잇달아 사임하자 법무부 3인자(송무실장)인 보크가 나서 콕스의 해임을 집행했기 때문이다. 5일 동안 진행된 상원 인준청문회는 그 전까지 덕담이나 주고받던 주요 법관 청문회의 문화를 바꾸는 분수령이 됐다.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은 “로버트 보크의 미국은 여성에게 불법낙태를 강요하고, 흑인들은 식당에서 백인과 다른 좌석에 앉아야 하며, 경찰이 한밤중에도 시민의 집에 들이닥칠 수 있는 나라”라면서 “미국 대법원에는 그를 위한 좌석이 없다”고 못을 박았다. 48 대 52로 부결된 그의 지명안 표결에서 민주당뿐 아니라 공화당 의원 6명도 반대표를 던졌다.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인사청문회 이틀째인 22일 오후 국회에서 이 후보자가 청문회 시작 전 답변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지난달 19일 사망한 보크는 그나마 개인적 처신으로는 여론의 비난을 받지 않았다.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의 헌재 재판관 시절 판결 성향을 보면 그가 소신을 갖고 이루고 싶은 나라에서는 정부는 위안부 문제 해결에 나설 의무가 없으며, 친일파 재산을 국가가 환수해서도 안된다. 대한민국에 그를 위한 헌법재판소장 자리는 없어야 한다. 보수, 진보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의 혼을 수호해야 할 ‘헌법지킴이’의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보크 청문회는 ‘보크하다(Bork)’라는 신조어까지 낳았다. 옥스퍼드 사전은 그 뜻을 “공직후보자를 언론 등을 통해 조직적으로 공격하다”라고 규정한다. ‘동흡하다’ 또는 ‘동흡스럽다’라는 신조어라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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