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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경향의 눈

한·미 정상회담을 기다리는 이유

by gino's 2013. 3. 25.

주식투자에 대해 백치에 가깝지만 지금까지 딱 두 번 직접 투자를 한 적이 있다. 과학적인 분석 없이 세태의 흐름에 역행하려는 심리에서 내지른 ‘묻지마 투자’였다. 첫번째는 1994년 1차 북핵 위기 국면에서였다. 그해 7월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자 서울 시내에는 막연한 전쟁의 공포가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었다. 증시는 주저앉았고 서울 강남의 슈퍼마켓은 한동안 라면과 생수를 비롯한 생필품 사재기에 북새통을 이뤘다. 그 몇 달 전 박영수 북한 조평통 부국장의 ‘서울 불바다’ 발언 뒤 벌어졌던 사재기 현상의 재현이었다.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가” 하는 반감이 치밀어 때마침 만기가 된 적금통장을 헐어 증권사에 보냈다. 두번째는 전 세계 증시가 주저앉은 2001년 9·11 테러 직후였다. “이 정도 충격에 미국 경제가 망한다면 세계가 망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역발상에서였다.



돌이켜보면 9·11 투자는 그런대로 합리적이었다. 1994년 1차 북핵 위기 국면에서의 투자는 지극히 무모했다. 세월이 흘러 빌 클린턴 미국 행정부가 당시 북폭을 심각하게 고려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실제로 전운이 짙게 깔리던 형국에서 벌인 치기였음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느닷없이 얼치기 주식투자의 추억을 늘어놓은 것은 작금의 안보 위기가 너무도 뚜렷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서울 불바다’ 발언과 ‘서울·워싱턴 불바다’ 발언은 위기의 내용과 성격이 판이하다. 북한은 세 차례의 핵실험을 완료했고 어느 정도 대륙간탄도미사일 능력을 확보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래서인지 북한의 전쟁 위협은 갈수록 대담해지고 있다. 지난 주말에는 조평통의 인터넷 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를 통해 속전속결의 공식 전쟁 시나리오를 흘렸다. 


 


북한이 단 한번의 충격요법으로 남한 사회를 흔들어놓았던 1990년대 위기와 사뭇 다른 양상이 전개되고 있다. 위기 심리가 남한 사회에 은근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스며들면서 일상화하고 있다. 북한의 전쟁 위협은 일정 부분 남한의 인터넷 민심을 교란하고 있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문제 해결의 주체인 한·미 양국 정부를 움직이지는 못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통미봉남(通美封南)에 안절부절못하던 김영삼 정부와 달리 다소 차분해졌다. 박근혜 정부는 북핵 불용 의지를 분명히 밝히면서도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에 대한 의지를 일관되게 내보이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 역시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국무부 대변인은 북한의 위협을 “쓰레기 발언”이라고 일축했다. 미국 입장에서 1990년대만 해도 북핵 문제 해결이 최우선적인 과제였지만 이제는 “이란 핵문제에 이은 두번째 위협”(칼 레빈 상원 국방위원장)에 불과하다. 미국 국방부는 이례적으로 4월 말까지 벌어지는 한·미 독수리 합훈에 대북 핵공격이 가능한 전략폭격기 B-52가 동원될 것이라고 공개했다. 


철모 쓴 북한병사 (경향신문DB)



지난주 발효된 ‘한·미 공동 국지도발대비계획’은 북핵 위기 속에서 그동안 양국이 벌여온 대응노력의 일환이다. 한국 측은 북한의 도발 시 자위권 차원에서 도발 원점·도발 지원세력·지휘세력까지 공격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을 강조하지만, 미국의 강조점은 다르다. 한국군의 대북 응징에 앞서 반드시 미군과 사전 협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데 방점을 두고 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남한의 과잉대응으로 인한 걷잡을 수 없는 상황 악화를 막겠다는 것이 미국의 복안이다. 현재까지 미국이 보여준 한반도 안보 위기 대응책의 상한선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한·미 공동의 국지도발대비계획에도 우발적 확전의 위험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한·미 합훈이 끝나는 4월 말 이후 북한이 추가 도발하는 실제 상황이 벌어질 경우 얼마나 효율적으로 작동할지도 불투명하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뒤 처음으로 워싱턴을 방문해 오바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는 시점은 5월 상순이다. 방문에 즈음해 북한이 추가 도발을 해올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미 양국 지도부가 정상회담에서 어떤 해법을 내놓느냐에 따라 지난해 말부터 지속된 대결 국면을 해결 국면으로 돌려놓을 계기를 마련할 가능성 역시 병존한다. 북핵 문제 해결을 미국에만 아웃소싱할 수도 없지만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 없이는 어떠한 해결 기대도 가질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일시적 위기 관리에만 집중하는 오바마 행정부를 적극적인 개입 모드로 전환시키는 것이야말로 박근혜 정부가 관철해야 할 목표다. 



한국 증시는 더 이상 북한발 악재에 출렁이지 않는다. 하지만 중·장기적 개선 전망이 있다면 긍정적으로 움직일 것이 분명하다. 두 차례의 묻지마 투자는 모두 소박하지만 성공적이었다. 망외의 여름휴가 비용과 한 달 봉급에 가까운 불로소득을 안겨주었다. 한·미 정상회담 결과에 따라 다시 증시 투자에 관심을 보이게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번엔 단기차익을 노리는 대신, 진행이 느리더라도 결국은 한반도 문제가 개선될 것이라는 희망에 투자할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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