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리포트 김진호 특파원
지난 4일 미 역사상 첫 치마 입은 하원의장에 등극한 낸시 펠로시는 20여명의 아이들을 의장석으로 불러냈다. 몇몇 아이들에게 하나하나 의사봉을 직접 만져보게 한 뒤 여성 하원의장 취임 선서를 했다. 미국 독립 이후 여성으로 최고위직에 오른 순간을 아이들과 함께 장식한 의미는 적지 않다. 여느 일하는 여성들에게 그렇듯이 아이들은 인생의 최우선 순위인 동시에 걸림돌이었다. 5남매의 막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정치에 본격 뛰어들었다. 샌프란시스코 선거구에서 처음 보궐선거에 출마할 것을 제안받은 1982년에는 “아이들이 어려서…”라는 이유로 고사했다. 아이들이 제 앞가림을 하게 된 5년 뒤에야 의사당에 발을 들여놓았다.
성차별의 ‘유리 천장’을 날려버린 펠로시는 페미니즘의 또 다른 승리로 기억될 만하다. 하지만 펠로시의 성공이 가능했던 것은 페미니즘의 말뚝에서 벗어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아버지와 오빠가 고향 볼티모어의 시장을 역임한 정치명문가에서 자랐지만 ‘후광’에 의존하지 않았다. 평당원에서 자질과 능력을 인정받아 지도부에 발탁됐다. 일단 정치행보에 속도가 붙기 시작하면서는 정치자금 동원 능력과 강한 카리스마를 구축했다.
펠로시의 매력은 여성성에서 나오지만 여성성에 머물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여자로서 당당하다. 여성 정치인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지만 많은 경우 남정네들이 판치는 정치판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자보다 더 남자 같이 행동해야 했다. 페미니즘과 정치의 만남이 비주류의 한계를 못 벗어난 이유다. 그는 아내이자 엄마로서, 또 할머니로서 당당하게 주류의 정상에 올랐다. 대통령 남편의 옆자리에서 지명도를 얻었던 힐러리 클린턴과 다르며, ‘사회적 소수’에서 권좌에 올랐지만 ‘사회적 다수’의 이익에 투철했던 구멍가겟집 딸 마거릿 대처와도 다르다. 펠로시는 미 하원의원 가운데 가장 부자의원의 한명(부부재산 140억원)이면서도 사회적 소수를 지향한다. 공화당에서는 ‘골수좌파’라고 폄하하지만 골수좌파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현실정치의 엄혹한 한계를 뛰어넘었다.
펠로시의 정치는 60~70년대 미 하원에서 질풍노도와 같은 진보바람을 불러일으켰던 필 버튼의 진보적인 노선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자신의 정치적 대부이자 샌프란시스코 선거구를 물려준 사람이다. 미 정치평론가들이 뉴트 깅리치의 보수혁명이 상·하원을 장악한 지난 94년 중간선거 결과를 ‘버트니즘의 몰락’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그 정치적 후손이 깅리치혁명에서 의사당을 되찾아옴으로써 선대의 복수에 성공한 셈이다.
지난 92년 영국 의회 700여년 역사상 첫 여성하원 의장에 당선된 베티 부트로이드는 ‘마담 스피커’의 시대를 열었다. 대서양 건너 워싱턴의 의사당 언덕에서 부트로이드의 후배가 나오는 데 15년이 걸렸다. 마담 스피커가 다시 태평양을 건너와 여의도에 안착하는 데는 더 짧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싶다. 다만 능력과 상관없이 주로 여자라는 이유에서 주목받는 ‘여류명사’가 아니었으면 한다. 펠로시처럼 부엌에서 걸어나온 ‘아줌마 정치인’이었으면 한다. 명패가 날아다니고 수준 낮은 욕설과 고함이 오가던 여의도 국회의장 석에 여성이 앉게 될 날이 기다려진다. 그 자리에 아이들을 초청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어차피 정치는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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