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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경향의 눈

원자력협정, 누군가 국민을 속이고 있다

by gino's 2013. 4. 23.

1975년 12월 어느 날, 파리. 윤석헌 당시 주불대사는 오전 9시에 약속이 잡힌 키 도르세이의 프랑스 외교부 청사로 막 출발하려던 참이었다. 그해 4월 프랑스 생고뱅사와 맺은 재처리 시설 도입 및 기술용역 계약 문건의 최종 서명을 받기 위해서였다. 프랑스 외교부는 별안간 전화를 걸어와 계약을 파기했다. 재처리 기술을 확보하려던 박정희 정권의 꿈이 무산된 순간이었다. 사용후 핵연료의 재처리는 우라늄 농축과 마찬가지로 핵폭탄용 플루토늄을 얻는 데 필요한 과정이다. 한국 측은 “재처리 설비 수입은 원전의 핵연료를 얻기 위한 순수한 목적”이라고 강변했지만 박정희 정권의 핵무기 개발 의도를 간파한 미국의 방해 탓에 좌절됐다. 



2013년 4월 워싱턴. 박근혜 대통령의 첫 방미에 앞서 지난주 열린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협상은 별다른 결과물을 내놓지 못했다. 1974년 한·미가 원자력협정을 맺은 이후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음에도 최대 현안은 여전히 재처리 권한이다. 원전 23기를 가동하는 세계 5대 원자력 과소비 국가가 된 한국은 핵연료의 안정적 공급을 명분으로 우라늄의 저농축 권한도 요구하고 있다. 1970년대와 판박이로 “평화적 목적의 핵이용”을 다짐하고 있다. 하지만 북핵의 소용돌이 속에서 미국은 핵개발 ‘전과자’의 주장을 과거와 다름없는 언설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정몽준 의원을 비롯한 한국 내 ‘핵주권 탈레반’들이 핵확산금지조약 탈퇴론을 지피는 마당이다. 


원자력협정 관련 얘기 나눴나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왼쪽)이 지난 12일 한·미 외교장관 회담을 하기 위해 외교부 청사를 방문해 윤병세 외교장관의 안내를 받고 있다. 박노벽 외교부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협상 전담대표와 로버트 아인혼 미 국무부 비확산·군축담당 특보는 16일(현지시간)부터 미 워싱턴에서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협상 수석대표 회담을 연다. AP연합뉴스



한국의 원자력 학계 및 업계가 ‘종합감기약’처럼 내놓은 해법은 군사적 전용이 불가능하다는 파이로 프로세싱(건식처리공법)이다. 정부도 상당 부분 파이로의 환상에 홀려 있는 눈치다. 문제는 파이로 프로세싱 예찬론이 국내에서만 요란하다는 불편한 진실이다. 연구단계인 파이로 프로세싱이 과연 가능한지, 개발해도 과연 경제성이 있는지, 군사적 전용을 100% 막을 방안이 있는지 온통 불투명하다. 파이로 프로세싱 공법으로 재처리한 플루토늄 복합물을 태울 소듐냉각고속로 역시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일러야 2050년 이후에나 개발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수십년 뒤에도 가능할지조차 모르는 일을 두고 가설에 가설을 더해 재처리권을 요구하는 한국의 논리는 설득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미국에는 ‘스트롱 맨’의 추억을 되살릴 뿐이다. 



2024년이면 국내 고준위 핵폐기물의 임시저장시설이 포화상태에 이르는 만큼 대안을 마련해야 하는 시점에 도달한 것은 맞다. 순수하게 이 목적이라면 30~50년간 사용후 핵연료를 보관할 중간저장시설을 만드는 일이 발등의 불이다. 임시저장시설을 더 마련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지도 않다. 누군가 진실을 호도하고 있다. 지금 당장 미국으로부터 재처리 및 농축 권리를 얻어내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국민을 불안케 하는 것은 죄악에 가깝다. 북한에 비핵화를 요구하면서 1992년 한반도 비핵화선언에서 스스로 금지한 농축 권리를 찾겠다는 것은 자가당착이기도 하다. 



원자력협정 개정을 둘러싼 한국 내 담론은 순서가 뒤바뀐 비전략적 사고의 전형이다. 이번에 개정하면 다시 수십년 유지될 협정이다. 마땅히 수십년 뒤 대한민국의 에너지 정책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이 순서다. 소수 원자력 학계·업계의 이해에 휘둘려 서두를 사안이 아니라는 얘기다. 지난해 국제에너지기구의 세계에너지전망 보고서는 2035년 세계 3대 발전설비에 원자력을 포함하지 않았다. 가스복합(18%)·석탄(17.3%)·신재생(15.5%)이 미래의 핵심 에너지원이다. 원자력은 기껏 4.3%였다. 세계 에너지 환경은 급변하고 있다. 셰일가스가 개발됨에 따라 천연가스의 가격이 내려가고 있다. 이제는 시베리아 가스관을 한반도에 연결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세계가 대안 에너지를 찾는 와중에 한국만 원자력에 올인하겠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퇴행적 선택이 아닐 수 없다. 한·미는 현 원자력협정의 시한을 2년 정도 연장하고 논의를 이어가기로 했다고 한다. 박근혜 정부는 지금이라도 에너지 백년대계를 마련한 뒤 국민적 동의를 얻는 과정을 밟아야 할 것이다.

 

박 대통령은 다음달 7일 미국을 방문한다. 첫 한·미 정상회담 자리에서 국내의 논의 순서가 뒤죽박죽이고, 원자력 학계·업계의 의견이 과다 반영된 원자력협정 개정 문제는 미련없이 뒤로 미룰 필요가 있다.



우리에겐 북한과 북핵, 궁극적으로는 한반도 통일이라는 더욱 중차대한 현안이 있다. 박 대통령은 2005년 미국에서 북핵 해결을 위한 밥상론을 펼친 바 있다. 수프·메인요리·후식 등을 단계적으로 내오는 서양과 달리 밥·국·찌개·반찬을 한 상에 올리는 한국식 밥상처럼 북핵문제를 포괄적으로 타결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고 설파했다. 차제에 한반도 평화의 밑그림을 소담한 밥상에 담아 미국의 동의를 구해내야만 한다. 몇 달째 계속된 북한의 전쟁 위협과 앞이 보이지 않는 남북관계에 시달린 국민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밥상이다. 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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