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처음으로 6시간 동안이나 수석대표(단장)의 격(格)을 따지다가 당국회담이 무산된 뒤 남북관계의 앞날이 다시 불투명해졌다. 북측 단장의 격을 높이는 것이 새로운 남북관계라고 우기는 남과, 과거 관행을 벗어나지 못한 북이 함께 빚은 결과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정전협정 60주년이 되도록 티격태격이나 하는 남북관계의 현실에 아연할 뿐이다. 지금은 회담 무산의 책임을 서로 상대편에 미루는 데 급급할 때가 아니다. 박근혜 정부와 김정은 체제의 첫 대화가 무산된 지난 며칠 동안의 과정을 되돌아보면서 깊은 성찰을 해야 마땅하다.
남에서는 실체가 모호했던 신뢰 프로세스의 정신이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는 명제였다는 사실이 처음 공개된 셈이다. 절반의 진리일 뿐이다. 형식이 내용을 지배하건, 내용이 형식을 지배하건 그 형식과 내용을 조합해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 회담이고 남북관계의 현실이다. 서로 일방적 주장만 내세우면 끝없는 말싸움의 폐쇄회로에 갇힐 수밖에 없다. 남의 대성동 마을과 북의 기정동 마을 간에 깃대높이 경쟁을 벌였던 냉전시대 남북관계로 돌아가려는 것인가 묻고 싶다. 종래의 수석대표(단장) 관행을 두고 ‘굴종’이었다는 청와대의 궤변은 또 무엇인가. 그렇다면 그런 회담을 통해 꿈에 그리던 북의 가족들과 대면·화상 상봉했던 2만여명의 이산가족들과 200만명에 육박하던 금강산 관광객들은 죄다 굴종의 소산이었다는 말인가.
“민족 구성원으로 남측 기업인들의 피눈물과 애타게 혈육 상봉을 고대하는 이산가족의 아픔을 어떻게 외면하겠느냐”면서 대화제의를 해왔던 북한 역시 대화에 나서는 진정성이 희박했음이 입증됐다. “시비를 가리며 공허한 말장난과 입씨름으로 시간을 보낼 생각이 없다”던 말도 허언이 되고 말았다. 실무접촉 18시간, 대표단 명단 논란 6시간여 동안 남북이 벌인 것은 입씨름밖에 없지 않았는가. 회담 명칭을 ‘고위 당국회담’으로 하자는 남의 제안을 거부했다는 사실 역시 이번 회담에 거는 북한 최고 지도부의 기대가 엷었음을 말해준다. 겉으론 민족의 아픔을 들먹였지만 미·중 정상회담을 하루 앞둔 중국의 외교적 잇속을 채워주기 위해 회담을 제안했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회담대표의 격을 따진 논란은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른다. 회담 무산은 결과적으로 남이나, 북이나 새로운 남북관계 정립에 대한 진정성이 없었음을 고백한 것이나 다름없다. 언제까지 한반도 문제를 미국과 중국에 위탁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남북은 새로운 각오로 대화에 나설 준비라도 시작하길 바란다. 굳이 국제 관례를 따지자면 이번에는 남에서 북으로 회담 제의를 하는 것이 순서이다. 격을 맞춘 회담대표를 찾기 힘들다면 2009년 김양건 통일전선부장과 임태희 노동부 장관 간의 싱가포르 회담에서처럼 ‘특사’ 형식으로 만나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어떤 형식으로든 남과 북은 다시 만나야 하지 않겠는가. ㅣ수정 : 2013-06-12 21:2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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