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세계읽기]‘범아프리카’의 꿈
▲ 니그로, 아프리카와 흑인에 관한 짧은 이야기 | W.E.B. 듀보이스 | 삼천리
미국 흑인민권운동은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말콤X가 활동했던 1960년대를 연상시키지만 선각자들의 활동시기는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5년 W.E.B. 듀보이스가 펴낸 <니그로, 아프리카와 흑인에 관한 짧은 이야기>(삼천리)는 흑인해방운동의 연대기를 20세기 초로 끌어올린다. 듀보이스는 인종은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섞이거나 분화하면서 늘 변화하는 개념이라고 설파한다. 책은 그중 피부색이 짙은 사람들의 역사를 정리해놓은 것으로, 오늘날까지 흑인과 아프리카에 대해 이해하기 위한 입문서 역할을 하고 있다. 링컨의 노예해방선언 5년 뒤 매사추세츠에서 태어난 듀보이스는 흑인 처음으로 하버드대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딴 지식인이다. 1909년 미국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를 창설하고 범아프리카운동에 뛰어든 행동가이기도 하다.
니그로는 일반적으로 아프리카의 더 검은 피부색의 사람들이다. 짧고 곱슬곱슬한 머리카락과 두껍고 때론 뒤집힌 입술, 길쭉한 두상을 가진 사람들을 뭉뚱그려 지칭한다. 고대 유럽이나 아시아가 노예사냥터가 아니었듯이 아프리카도 노예의 땅은 아니었다.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흑인노예보다 백인노예가 훨씬 더 많았다. 고대 이집트의 위대한 문명은 니그로와 셈족이 울력으로 만들어냈다. 유럽과 아프리카의 교역은 북부 통로에서만 이뤄졌다. 15세기까지는 아프리카의 니그로 문명과 유럽 문명이 근본적인 차이가 없었다는 게 듀보이스의 연구결과다. 하지만 유럽이 경제·문화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반면에 아프리카는 정체됐다. 지리적으로 고립된 특성도 정체를 부추겼다. 듀보이스는 피부색과 얽힌 편견의 배경을 신체적·문화적 요인이 아니라 노예무역의 역사적 사실에서 찾기를 권한다.
1450년부터 1850년까지 400여년 동안 적어도 6000만명의 니그로들이 기독교도들에 의해 고국에서 사라졌다. 7세기부터 19세기 말까지 계속된 무슬림들의 노예무역 규모도 이에 버금갔다. 얼추 1억명의 니그로 영혼이 노예무역에 희생된 것이다. 노예사냥의 광풍이 수백년 계속됐다면 어떠한 문명권도 정체 또는 퇴보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아프리카 밖의 사람들이 아프리카 땅에 문화가 정체된 이유를 묻는 것은 지독한 모순이다.
무슬림들은 개종을 거부하는 흑인을 병사나 할렘의 하녀 용도로 팔아넘겼다. 18~19세기 기독교권의 노예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대규모 무역으로 성장했다. 유럽인들의 노예무역은 포르투갈인들이 길을 텄고 네덜란드인들이 제도화했으며 영국인들이 규모를 키웠다. 유럽 선박들은 아프리카 서해안으로 가서 상품을 주고 노예를 사들였고, 서인도제도에서 노예를 판 뒤 설탕을 그득 싣고 돌아왔다. 아메리카 대륙에 하역된 노예들은 16세기에 90만명, 17세기에 275만명, 18세기에 700만명, 19세기에 400만명에 달했다. 한 명의 노예가 무사히 수입됐다는 것은 평균 5명의 노예가 아프리카나 거친 바다에서 사망했다는 뜻이다. 노예들은 상자 안에 든 청어처럼 손발이 쇠사슬에 묶인 채 45㎝ 간격으로 선적됐기 때문이다.
듀보이스는 미국 내 흑인들의 지위향상을 꿈꾸었던 킹 목사보다 더욱 원대한 꿈을 꾸었다. 아프리카와 전 세계에 흩어진 니그로들의 광범위한 연대를 위한 범아프리카운동을 주창했다. 당시만 해도 흑인들 간의 결속은 물론 백인 노동자들과의 새로운 연합이 도처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흑인들이 노예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백인 노동자들 역시 자유인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서로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듀보이스는 “모든 새로운 것은 아프리카에서 나온다!”는 말로 책을 닫으면서 이성과 선의가 확실하게 승리한다면 미래의 세상은 유색인들이 만들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킹 목사의 꿈이 여전히 미완성인 것처럼 듀보이스의 꿈 역시 모순으로 가득한 세계의 지층 밑에 깔려 있다. 듀보이스는 1962년 가나에 영구이주했고 이듬해 9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김진호 선임기자 j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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