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대한해협 건너에서 나쁘지 않은 소식이 전해졌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지난 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 참석한 자리에서 고노담화를 수정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담화와 일제의 식민지배와 침략을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를 모두 인정하겠다는 얘기다. 청와대는 “만시지탄이지만 다행”이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내친김에 “한·일관계와 동북아관계가 공고히 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는 희망사항을 얹었다.

총리 취임 3년째, 고노담화에 대해서는 “(위안부) 강제동원의 증거는 없다”면서 고노담화와 마찬가지 성격의 관방장관 담화로 대응하겠다던 아베다. 침략 여부에 대해서는 “역사가에게 맡겨야 할 문제”라는 궤변으로 일관해왔다. 아베의 가치관이 하루아침에 바뀌었을 리는 만무하다. 다음달 중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일본, 한국 방문을 앞두고 미국이 일본의 팔을 비틀었음을 짐작게 한다. 미국 국무부는 아베의 발언 직후 “좋은 한·일관계는 미국에도 최선의 이익에 해당한다”면서 “긍정적 진전”으로 평가했다. 한·미·일이 어우러져 한 편의 잘 짜인 시나리오를 탄생시켰다는 연상이 가능하다.

하지만 계기야 어쨌든 간에 아베 내각이 전향적인 입장을 내보인 것은 청와대 발표대로 ‘다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뿐 아니라 우리 역시 힘겹게 성사시킨 오바마의 방한을 앞두고 한·일관계를 개선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한·일관계의 악화는 미국 국익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의 국익에도 명백하게 해가 된다. 과거사 문제는 물론 아베가 말하는 적극적 평화가 예고하는 안보환경의 변화는 한·일 정상 간 대화의 수요를 높였다. 북한의 핵무장과 중국의 부상에 따른 동아시아 정세 변화에 대해서도 한국과 일본은 함께 협력을 모색해야 할 대목이 있다. 일본은 북·일 당국간 회담의 재개를 서두르고 있기도 하다. 한·일 간 역사갈등은 외교의 영역을 넘어 경제와 문화의 영역으로 옮겨지고 있다.

급속히 우경화하는 일본은 한국이 직면한 하나의 현실이다. 이를 한사코 외면하고서 고고하게 동북아평화협력구상을 외치는 것은 공허한 독백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아베의 한마디에 덜렁 정상회담을 예약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음주 헤이그 핵안보정상회의에 앞서 장관급 접촉을 통해 일본의 진정성을 재삼 확인하고 난 뒤 한·일 정상회담의 멍석을 깔 필요가 있다. ‘생산적인 대화가 가능해지기 위한 여건’이 조성되기를 앉아서 기다리기보다는 일본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적극적인 행보가 필요한 까닭이다. 꼬일 대로 꼬인 한·일관계는 정공법이 필요한 시점이다. 대변인을 내세운 한두마디 입장 발표로 돌파구를 열 수 있는 계제가 아니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4년 3월18일(출처: 경향DB)


한·일 지도자가 마주 앉는 것 자체가 원칙의 후퇴이거나 보상은 아니다. 만나서 한국민의 우려 및 우리가 원하는 바를 가감없이 전달하고, 반전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래도 아베 정권의 역사적 퇴행이 계속된다면 그때 가서 외면해도 국제적으로 정당성을 축적할 수 있다.

박근혜 정부는 북한과 일본에 대해 원칙과 진정성의 확인을 강조하지만 진정성은 쌍방향으로 흐른다. 쉽게 좁혀지기 힘든 간극이 있을수록 자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외교이고, 안보의 초석이며, 통일 준비가 될 수 있다. 아베 총리가 의심쩍은 말만 내놓았다면, 북한은 이산가족 상봉으로 남북관계 개선의 첫 단추를 풀자는 대통령의 제안에 행동으로 화답했다. 그럼에도 우리 측에서 두번째 단추를 찾으려는 노력은 찾아볼 수 없다. 어떤 통일을 어떻게 하겠다는 설명이 없이 ‘묻지마 통일대박’의 국지풍을 일으키고 있을 뿐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박근혜 정부의 대북 및 외교안보 정책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우리가 잘했다기보다는 북한과 일본의 잇단 패착이 더 큰 원인이다. 오죽하면 “장학퀴즈에 출연해 문제를 맞혀 점수가 올라갔다기보다는 다른 학생들이 문제를 계속 틀려줘 우리 점수가 올라간 격”이라는 말이 정부 안에서 나오겠는가. 이제 정부 스스로 점수를 올려야 할 때이다.


김진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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