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호의 한반도 칼럼]북녀 응원단과 북한 미사일
“어이! ○○선생, 저번에 남쪽에 왔을 때 한 건 쎄게 했데. 남측 TV에도 대서특필 되고 말이야. 평양에 돌아와 큰 상 받았겠어?” 장소는 평양이었다. 실내에서도 절반쯤 코팅이 된 선글라스를 낀 그에게 돌발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남측에서 열렸던 한 남북 교류행사에 파견됐던 그가 반북단체 관계자들의 공개적인 북한 체제 비판에 격분해 돌진하는 장면을 TV 뉴스에서 보았던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반북단체 관계자들과 주먹다짐이라도 할 결기로 달려나가던 그의 모습은 적지 않은 남측 사람들에게는 전율이자, 충격이었을 것이다.
군사분계선만이 아니다. 남과 북이 만나는 자리에는 ‘지뢰’가 놓여 있는 경우가 많다. 자칫 선을 넘으면 터진다. 듣기에 따라 그의 기분이 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중인환시리에 농을 던지는 활짝 웃는 낯에 정색을 하고 대거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 사람들(반북단체 관계자들)이 하도 말같지 않은 말(북한 체제 비판)을 하기에…”라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그래, 그 덕에 어떤 상을 받았느냐고”라는 거듭된 짓궂은 질문에는 어색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주변의 북측 동료들 역시 입가에 웃음을 띤 것으로 보아 뭔가 상을 받긴 받았으리라 짐작했을 뿐이다. 그후 그와 가까워졌던 기억이 새롭다.
참여정부 시절 취재차 10차례 북한 땅을 밟으면서 익힌, 아슬아슬한 경계에 대한 감이 없었으면 던지기 힘든 농담이었다. 그보다 접촉이 잦았던 당시 남북관계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일이다. 북측은 그 무렵 술 한잔 걸치고 중국에서 두만강을 헤엄쳐 입북한 남측의 열혈 소설가를 달래 돌려보낸 적도 있지 않은가.
2003년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 당시 북녀 응원단은 비 맞고 있는 현수막 속의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진을 보고 발을 동동 굴렀다. 울며불며하다가 끝내 현수막을 끌어내렸다. 남측 시각으로 보면 이해하기 쉽지 않은 돌발행동이었지만, 전쟁이 나더라도 자기 목숨보다 지도자의 얼굴이 담긴 ‘1호 사진’을 먼저 챙겨야 하는 북측 시각으로 보면 일상생활의 단면이었다. 남한 TV의 보도로 졸지에 ‘영웅’이 됐을 북측 요원 역시 사전에 치밀하게 계산했다기보다는 조건반사에 가까운 행동이었을 것이다. 남북은 그런 접촉 계기를 통해 각각 화성과 목성만큼이나 다른 체제에 살고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동시에 이질감을 깨뜨릴 수 있는 농담의 파괴력과 접촉의 힘을 발견하기도 한다.
‘김정은의 북한’은 여전히 알쏭달쏭하다. 한편에선 오는 9월 인천 아시아경기대회에 ‘큰 규모의 응원단’을 보낸다고 하더니, 다른 한편에선 개성 북방 20㎞ 지점에서 한반도를 횡단하는 미사일을 발사했다. 남쪽 사회에서는 ‘북녀 응원단’과 ‘북한 미사일’ 중 어느 하나만을 강조하려는 예의 남남갈등이 도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북의 응원단이 9년 만에 인천을 다시 찾는다고 해서 무작정 당시로 돌아가 환호하기 어려운 것이 작금의 남북관계이고, 북한 내부의 불투명한 사정이며,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의 급변하는 정세다. 신뢰는커녕 싱거운 농담 한마디 던지기 힘든 분위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녀 응원단과 북한 미사일 중 한가지만 떼어놓고 본다면 동전의 한면에 불과할 것이다.
다른 행성에서 온 것 같은 상대라도 만나서 어깨를 부딪치고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가까워진다. 깊은 신뢰는 바라지 못해도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속내를 주고받을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접촉이 폭넓은 신뢰로 발전하기에는 많은 세월이 필요하다. 영원히 안될 수도 있다. 하지만 신뢰구축 과정이라는 지극히 정치적이고, 전략적인 과정은 작고, 사소한 데서부터 출발한다고 나는 본다. 전시에는 교전, 평시에는 적극적 상대라는 의미의 인게이지먼트(engagement)야말로 북녀 응원단과 미사일을 통으로 보는 유일한 길이다.
박근혜 정부가 판단할 문제이지만 17일 판문점 실무회담 석상에서는 북측 응원단의 체재 비용과 같은 작은 셈이 아닌, 큰 셈을 하기를 바란다. ‘국민정서와 국제기준’ 타령은 그만 들었으면 한다.
<김진호 선임기자>
입력 : 2014-07-14 21: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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