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 핵심인 ‘한반도신뢰프로세스’ 그림이 나왔다.
하지만 통일부 장관이 발표한 주요 내용에는 로드맵과 액션플랜이 안 보였다. 회견이 끝난 뒤 내외신 기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새로운 게 하나도 없잖아.”
“이게 뭐야.” “새로운 게 하나도 없잖아.” “대선공약에서 되레 후퇴만 한 것이 아닌가.” 지난 8월 21일 서울 삼청동 남북회담 사무국. 류길재 통일부 장관이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인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주요 내용을 확정해 발표한 내외신 기자회견 뒤 적지않은 참석 기자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한신프(한반도 신뢰 프로세스)가 무엇인가. ‘박근혜 정부=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라고 해도 좋은 핵심 대선공약이자 핵심 국정과제가 아니던가. 대통령이 후보 시절 국민에게 약속하고 지난 5월 국무회의에서 확정한 대북정책의 청사진이 바로 한신프였다. 그러한 구상을 다시 주무부처인 통일부가 몇 달 동안 가다듬어 그 개념과 목표, 추진원칙, 추진기조, 추진과제를 국민 앞에 선보인 이날은 잔칫날이 됐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한 시간여 진행된 류 장관의 발표 및 질의·응답 과정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강연에 머물렀고, 발표가 끝난 사무국에는 실망만 쓰레기처럼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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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1일 류길재 통일부 장관이 서울 삼청동 남북회담본부에서 내외신 기자간담회를 열고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홍보 책자를 들어 보이며 설명하고 있다. | 홍도은 기자 |
박근혜 대통령 취임 6개월에 즈음해 발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가장 높은 평점을 받은 분야는 단연 대북정책 분야다. 취임 직전 북한의 3차 핵실험에 이어 3~4월의 전쟁 위협에 이은 개성공단 폐쇄조치 탓에 순탄하지 못한 상황에서 출범한 정권이다. 하지만 개성공단 정상화를 도출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원칙의 리더십이 국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판문점에서 남북 적십자 회담이 가동되면서 이르면 9월 말쯤 3년 동안 중단됐던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치러질 것이라는 기대감도 높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대북정책의 전달자이자 1차 소비자 격인 통일부 출입기자들을 실망시킨 까닭은 무엇일까. 정부가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국민에게 발표할 때는 명확한 목표를 제시하고 그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로드맵과 액션플랜이 곁들여져야 설득력을 갖는다. 정부를 대표해 류 장관이 발표한 내용에는 그러나 이러한 알맹이들이 쏙 빠져 있었다. 여전히 정책이라기보다는 두루뭉술한 구상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아직까지 두루뭉수리 구상 수준
먼저 류 장관이 이날 소개한 리플릿과 34쪽 분량의 설명책자를 살펴보자. 한신프는 남북관계 발전·한반도 평화정착·통일기반 구축 등을 대북정책의 3대 목표로 설정했다. (안보와 교류, 남북협력과 국제공조의) 균형·(지속적으로 보완·발전시키면서 상황에 맞춰 대북정책에 변화를 주겠다는) 진화·(국제사회와의) 협력을 추진 원칙으로 제시했다. 북한의 도발-위기-타협-보상-도발의 악순환을 끊고, 북한 핵문제를 비롯한 안보위기를 근원적으로 해결하며, 정권에 따라 냉온탕을 오간 과거 대북정책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는 배경에서 한신프가 탄생했음을 적시하고 있다. 설명책자는 신뢰 형성을 통한 남북관계 정상화와 한반도의 지속가능한 평화, 통일 인프라 강화, 평화통일과 동북아 평화협력의 선순환 모색 등 4대 부문별로 14개의 과제를 선정했다.
하지만 DMZ 세계평화공원 조성을 제외하고는 손에 쥘 만한 내용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다른 의견을 수용하는 열림의 통일, 남북이 뜻을 같이하는 울림의 통일, 주변국이 함께 하는 어울림의 통일이 됐으면 좋겠다”는 류 장관의 멋진 수사가 반향을 크게 얻지 못한 까닭이다.
정치·군사적 신뢰조치를 과제로 꼽았으면서도 남북 장성급회담의 정례화나 DMZ 평화공원과도 연결되는 비무장지대의 비무장화 방안, 서해 북방한계선(NLL) 문제 등이 생략됐다. 1989년 노태우 정부가 발표하고 역대 정부가 수용해온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겠다면서도 “광범위한 의견수렴을 거쳐 발전방향을 공론화하겠다”는 것 외엔 다른 방도가 보이지 않는다. 작은 통일(경제공동체)에서 시작, 큰 통일(정치통합)을 지향하겠다는 희미한 그림이 제시됐을 뿐이다. 한반도의 지속가능한 평화를 추구한다면서도 군사적 도발을 단호하게 막겠다는 ‘소극적 평화’에만 방점이 찍혔을 뿐 ‘적극적인 평화’를 위한 평화체제라는 표현은 애써 회피하고 있다.
남북관계 주도하겠다는 의지 안 보여
북한의 3차 핵실험과 “서울과 워싱턴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던 3~4월의 전쟁 위협, 개성공단 근로자 일방 철수 등의 험악한 분위기에 출범해 이제 간신히 대화국면으로 접어든 남북관계의 현실에 비춰볼 때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측면도 있다. 개성공단 정상화를 타결짓고 이산가족 상봉 재개를 논의하고 있으며, 곧이어 금강산 관광 재개 및 5·24 조치의 재고 등 남북관계 현안이 밀려 있는 상황에서 장밋빛 청사진을 제공해 헛된 기대를 갖게 할 필요는 없었다. 더욱이 북한은 핵무기 개발을 경제발전과 함께 병진하겠다고 선포해놓지 않았는가. 그러한 점에서 한신프 설명책자에서 가장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은 첫 번째 추진과제로 제시된 ‘신뢰 형성을 통한 남북관계 정상화’인지도 모른다. 특히 ‘정상화’라는 단어에 유의해야 한다.
‘비정상적인 관행을 정상화하는 개혁’을 유독 강조하는 박 대통령의 말에는 역대 정권에서 만들어진 관행은 비정상적이었다는 평가가 담겨 있으며, 대북정책에서도 마찬가지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대화·교류 중심의 포용정책이 남북협력은 강화했지만 원칙을 훼손했고, (이명박 정부의) 원칙 중심의 대북정책은 유연성이 떨어지는 만큼 각각의 장점을 취하겠다는 말 역시 뒤집어보면 각각의 비정상을 정상화하겠다는 말에 다름이 아니다. 문제는 중간선을 찾겠다는 구상은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서 남은 임기 4년 6개월을 허송할 가능성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는 점이다.
그 전조를 보여주는 것이 “북한이 유연할 땐 유연하게, 단호할 땐 단호하게 대응하겠다”는 수동적 자세다. 남북관계를 능동적·적극적으로 주도하겠다는 의지가 안 읽힌다. 희미한 목표는 있되, 거기까지 가는 길은 북한의 선택과 상황에 따라 바꾸겠다는 말이며, 이는 일정 기간이 지난 뒤 어느 지점에서부터인가 길을 잃을 가능성을 내포한다. 신뢰, 신뢰 하지만 그 진정성도 의심스럽다. 서로 믿으려면 북도 남도 같이 변해야 하는데 남의 기준에 맞게 북만 변해야 한다고 고집한다고 신뢰가 쌓이지는 않는다. 무엇을 위한 신뢰인가도 따져봐야 한다.
분단체제에서 신뢰의 최종 목적은 평화를 위한 신뢰여야 한다. 한사코 평화체제를 외면하면서 어떻게 정치·군사적 신뢰를 구축하겠다는 것인지 묘연하기 짝이 없다. 정전체제를 상징하는 비무장지대(DMZ)에 평화공원을 건설하겠다는 구상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DMZ를 남북이 공동관리함으로써 정전체제를 현상유지하려는 것이지, 이를 토대로 무엇을 하겠다는 구상으로 보기는 어렵다. DMZ에는 평화적 공간을 만들자면서 정작 가장 휘발성이 높은 대치의 현장인 서해 북방한계선(NLL) 상에는 어떠한 평화수역도 만들 수 없다는 주장은 모순적일 뿐 아니라 한신프의 근본 정신을 의심케 한다.
류 장관은 내외신 회견 자리에서 “긴 시야에서 긴 호흡으로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다짐했다. “남북관계의 단기적 성과에 연연하지 않겠다”고도 했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라는 정책 아닌 정책이 그나마 희망을 주는 것은 역설적으로 미완성의 구상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다. 류 장관 말대로 하나하나 완성해 나가면서 국민과 북한 모두에게 지속가능한 신뢰의 원천이 되길 바란다. 그 전에 균형 잡히지 않은 대목들에 대한 자기성찰이 있어야 함을 물론이다.
<김진호 경향신문 선임기자 jh@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