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평양에 위치한 미국령사모아 출신 미국 정치인이 지난 달 22일(현지시간) 숙환으로 작고했다. 13선의 미국 연방하원의원을 지내고 2014년 정계를 은퇴한 에니 팔레오마배가. 향년 73세. 서울시 3분의1 면적에 인구 5만4000여명의 섬나라 출신인 그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2007년부터였다.
에니 팔레오마배가 미국 하원의원이 2012년 8월20일 경기 광주시 퇴촌면에 있는 위안부할머니들의 보금자리 ‘나눔의 집’을 방문해 할머니들과 인사를 하고 있다. 에니는 2009년 이후 모두 6차례 나눔의 집을 찾았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하원 외교위원회 아시아태평양·환경 소위 위원장이었던 에니는 그해 2월15일 위안부 청문회를 열었다. 하원 레이번빌딩에서 청문회장에 나온 한국인 피해자 이용수(당시 79세), 김군자(당시 81세) 할머니와 호주 국적 네덜란드인 얀 러프 오헤른 할머니(당시 85세)의 생생한 증언은 의사당을 넘어 미국을 울렸다. 기자 역시 현장에서 지켜보았던 생생한 감동의 장면이었다. 청문회 좌석이 모두 차서 바닥에 앉아 취재를 했지만 장내는 숙연했었다. 그 끝에 같은해 7월30일 일본 정부에 대해 일제의 군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을 시인하고 공식 사과할 것을 촉구하는 위안부결의안(HR121)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결의안 채택 이후 정체모를 ‘유감’을 표명하고 변명에 급급했던 당시 일본 총리가 바로 지금 한국은 물론 미국 내 위안부 소녀상까지 치우라고 윽박지르고 있는 아베 신조였다.
위안부 할머니들은 에니에게 ‘용기의 표상’이었다. 경기 광주의 나눔의 집만 6차례 방문했다. 2015년 12월 한국과 일본이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를 내놓자 병석에서 ‘일본의 위안부 사과는 충분치 않다’라는 제목의 개인 성명을 내고 일본은 물론 이를 환영한 존 케리 당시 미국 국무장관까지 싸잡아 비난했다.
에니는 “위안부 생존자들과 단 한차례도 의논하지 않았다”면서 케리 장관이 이러한 합의에 도달한 아베 총리의 용기를 치하한 것을 비난했다. 그는 “미국을 대표해서 말할 때는 좀 더 책임 있게 단어를 선택해야 한다”면서 “문제가 해결됐다거나 잘못을 사과하는 데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모든 할머니들에게 모욕”이라고 질타했다. “‘용기’라는 말이 제대로 쓰이려면 범죄의 가해자에게가 아니라, 일제군대에 의해 잔인하게 학대당한 피해자들에게 써야 한다”고도 했다.
병상의 에니는 그럼에도 기회 있을 때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안부를 물었다. 그와 함께 위안부결의안 통과에 힘을 보탠 김동석 뉴욕뉴저지 시민참여센터 상임이사는 26일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에니는 할머니들에게 자신의 와병 소식을 전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었다”고 전했다. 선거에서 낙선한 것도 알리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용기를 떨어뜨리게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까닭에서였다. 김 이사는 “에니는 나눔의 집의 진입로나 건물, 엘리베이터 등 세세한 것 까지 챙겼다”면서 “김문수 당시 경기도지사에게 ‘할머니들을 잘 보살펴 달라’는 편지를 써줘서 내가 전달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윤병세 외교부’는 지난 26일 오전(한국시간) 장관 명의로 조전을 보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틀이 지난 28일 오후 현재 유타주의 유족들에게 도착하지 않았다. 그가 2009년 이후 6번이나 찾았던 경기 광주 나눔의 집에서는 지난 25일 1992년 이후 돌아가신 위안부 할머니 11분의 사진과 같이 에니가 방문했을 때 사진을 놓고 함께 추모를 했다. 역사를 잊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한다. 멀리 있는 친구의 불행에 침묵하는 민족에게도 미래는 없다. 에니의 장례식은 오는 10일 유타주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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