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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 산책

민족주의, 전쟁, 학살, 절반의 진실1 - 라트코 믈라디치는 과연 '발칸의 도살자'였나.

by gino's 2017. 11. 25.




스레브니차 학살의 유해발굴 현장. 1996년 9월18일 국제유고전범재판소의 조사관들이 보스니아 스레브레니차 인근 피리차에서 유해를 발굴하고 있다. AP연합뉴스

1995년 11월, 기자는 발칸의 첫눈을 베오그라드에서 맞았다. 고전음악축제를 마치고 레스토랑으로 온 사람들은 음악의 아름다움과 인생의 덧없음을 토로하면서 밤이 늦도록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식탁 옆 집시악단의 바이올린 선율이 흐르는 가운데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며 전쟁의 궁핍함을 한탄했다. 그들이 아쉬워한 좋았던 시절은 언어와 종교가 다르지만 인종학적으로 동족인 남(Yugo)슬라브 사람들끼리 사이 좋게 넘나들며 친선과 번영을 구가하던 요시프 티토(1892~1980)시절이었다. 1995년은 유고 내전 또는 국제전이 막바지에 달했던 때다. 

베오그라드에서 머문 며칠 동안 국제부 기자로서 사고의 근육을 키울 수 있었다. 하나의 국제적 이슈를 볼 때 서방언론을 상식으로만 접했던 절반에서 벗어나 다른 절반의 진실을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깨침이었으며, 현실 국제정치에서 정의는 늘 절반의 사실을 토대로 한다는 발견, 또 그 결과는 결코 정의롭지도, 공평하지도 못하다는 상식의 반란이었다. 

발칸의 굴곡진 현대사가 한반도의 그것과 중첩되어 읽혔던, 우리 문제의 객관화도 경험했다. 역사도, 인물도 그리 흘러간다. 하지만 어떠한 전쟁도 말끔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절반을 정리하고 절반을 뭉갠다. 그 상태에서 다시 새로운 연대기를 시작하는 것이 역사인지도 모른다. 역할이 컸건 작았건, 역사의 거대한 격랑에 실려가는 사람도 그렇다. 

보스니아 세르비아계가 건립한 스르프스카 정부군 총사령관이었던 라트코 믈라디치가 지난 11월22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에 출정하고 있다. 뉘렌베르크 전범재판 이후 가장 중요한 전범재판소인 ICTY는 그에게 인종청소를 비롯한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 혐의를 물어 종신형을 선고했다.  EPA연합뉴스

보스니아 세르비아계가 건립한 스르프스카 정부군 총사령관이었던 라트코 믈라디치가 지난 11월22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에 출정하고 있다. 뉘렌베르크 전범재판 이후 가장 중요한 전범재판소인 ICTY는 그에게 인종청소를 비롯한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 혐의를 물어 종신형을 선고했다. EPA연합뉴스 

보스니아 내전(1992~1995) 당시 보스니아 세르비아계의 사령관이었던 라트코 믈라디치(74)가 22일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판결문을 들은 믈라디치는 “이건 모두 거짓말이다. 모두가 거짓말쟁이다”라고 외치면서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심리과정에서 ICTY를 두고 ‘악마의 법정’이라고 했던 그다. 항소가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물론 지극히 희박하다. 우선 밝혀진 혐의가 너무 무겁다. 16년의 도피생활 끝에 2011년 체포된 뒤 500여명의 증인들이 라트코의 범죄사실을 증언했다. 보스니아 스레브레니차에서 대부분 남자였던 무슬림 8300여명을 인종청소, 내전 기간 내내 사라예보를 포위 공격해 주민 1만1000여명을 죽인 혐의 외에도 혐의는 많다. 고문과 살해, 인질 억류 등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 혐의가 인정됐다. 

ICTY는 24년 동안의 활동을 마치고 연내 문을 닫는다. 뉘렌베르크 전범재판 이후 처음으로 전쟁범죄에 대한 국제사회의 단죄를 완성함으로써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 서방언론은 이에 의미를 부여하며 보편적인 정의가 작은 승리를 거뒀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뒤집어보면 뉘렌베르크 이후 한국전쟁을 필두로 베트남전, 소련과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미국이 치른 두차례의 걸프전, 러시아의 체첸내전 등 숱한 전쟁에서 저질러진 전쟁범죄는 단죄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최근의 시리아 내전도 마찬가지다. 보스니아 내전의 3개의 축인 세르비아계만을 콕 집어 악마시해 온 모순도 고스란히 남게됐다.

믈라디치에게 면죄부를 주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그를 단죄하는 것으로 손을 털고 일어선다면 불완전한 진실을 인정하는 셈이다. 전쟁에선 모두가 가해자이고, 모두가 피해자이다. 그만큼 발칸의 역사는 녹록치 않으며, 보스니아 전쟁은 그 한 장(章)에 불과하다. ICTY가 그를 스레브레니차 인종학살의 주범으로 단죄한 날, 보스니아 동부의 세르비아계 거주지역에는 여전히 그를 영웅으로 떠받드는 포스터가 붙어있다. 오히려 ICTY를 비난하는 시위까지 벌어졌다. 보스니아 내전은 작금에 유럽을 휩쓸고 있는 포퓰리즘과는 결이 다르다. 결만 다른 게 아니라, 깊이 패인 골도 다르다.

1995년 여름 보스니아 반야루카의 일선부대 시찰에 나선 라트코 믈라디치 스르프스카 정부군 사령관이  경례를 하고 있다. 티토 휘하 빨치산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보스니아 전쟁 전까지 유고연방의 정규 육사를 졸업한 엘리트 군인이었다.<br />EPA연합뉴스

1995년 여름 보스니아 반야루카의 일선부대 시찰에 나선 라트코 믈라디치 스르프스카 정부군 사령관이 경례를 하고 있다. 티토 휘하 빨치산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보스니아 전쟁 전까지 유고연방의 정규 육사를 졸업한 엘리트 군인이었다. EPA연합뉴스 

헤르체고비나 보자노비치에서 태어난 라트코의 운명은 갓난아기 시절에 이미 결정됐는지도 모른다. 2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 아버지는 나치독일에 저항했던 요시프 티토의 유격대 전사였다. 우스타샤와의 교전중 사망했다. 우스타샤는 나치친위대(SS)를 모방해서 크로아티아인들이 만든 극우 파쇼 무장세력이다. 라트코의 고향마을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협력했던 크로아티아 괴뢰 공화국의 영토였다. (우리로 따지면 항일 독립군이 일제의 괴뢰국이던 만주국의 독립군 토벌대에 죽음을 당한 격이다.)

유고슬라비아는 미국이나 소련의 도움 없이 나치 독일로부터 해방됐다. 티토의 빨치산 투쟁 덕이었다. 유고연방이 사회주의 국가이면서도 1956년 스탈린 체제에서 탈피, 비동맹국가의 맹주로 떠오른 배경이다. 티토의 유고연방은 ‘제3의 길’을 걸었다. 이미 1950년대 사회주의의 단점을 보완하는 ‘자주관리 사회주의’로 중·동유럽에서 가장 성공적인 경제적 번영도 구가했다. 1980년대 현대자동차가 ‘포니’로 미국시장을 처음 두드릴 때 경쟁 차종이 유고연방이 만든 ‘유고(Yugo)’였다.

보스니아 전쟁중이던 1995년 7월14일 유엔이 마련한 보스니아 스레브레니차의 안전지대에 난민들이 모여 있다.  AP연합뉴스

보스니아 전쟁중이던 1995년 7월14일 유엔이 마련한 보스니아 스레브레니차의 안전지대에 난민들이 모여 있다. AP연합뉴스

빨치산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군인의 삶을 선택했다. ‘라트코(Ratko)’라는 이름부터가 슬라브어로 ‘전쟁’을 뜻한다. 1965년 유고연방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마케도니아에서 소대장으로 군경력을 시작했다. 1990년 당이 해체될 때까지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원의 신분을 유지했다. 1991년 6월 민족 분규가 잦던 코소보에 잠시 주둔한 그는 같은달 독립을 선언한 크로아티아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이동했다. 혁혁한 무공을 세웠지만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막지는 못했다. 

장군 계급장을 단 1992년 5월 ‘주적’이 다시 바뀌었다. 역시 독립을 선포한 보스니아의 반란군이었다. 그 사이 반란의 주·객이 바뀌었다. 반란군을 진압하는 유고연방군에서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반란군으로 전략한 것이다. 헬무트 콜 총리의 독일을 필두로 각국이 보스니아를 독립국으로 인정하면서 자기 땅 안에서 정부군에서 반군으로 신분이 바뀐 것이다. 유고 내전을 국제전으로 비화시킨 장본인이 콜 총리라는 지적이 나오는 까닭이다. 

그는 1992년 5월 보스니아 세르비아계가 선포한 스르프스카 공화국(Republika Srpska)의 정부군사령관이 됐다. 세르비아계 입장에서 보면 정부군이지만, 스프르스카를 인정하지 않은 서방 입장에선 여전히 반군이었다. 결정의 주체인 국제사회의 승인 여부에 따라 유고연방군에서 보스니아 반군으로 다시 스르프스카 정부군으로 바뀐 셈이다. 

보스니아 주민들이 11월22일 스레브레니차 인근 포토카리에 세워진 학살 추념시설에서 라트코 믈라디치에 대한 ICTY의 판결이 내려지는 장면을 TV로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AP연합뉴스

보스니아 주민들이 11월22일 스레브레니차 인근 포토카리에 세워진 학살 추념시설에서 라트코 믈라디치에 대한 ICTY의 판결이 내려지는 장면을 TV로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AP연합뉴스

보스니아의 독립선포는 무모한 것이었다. 앞서 유고연방에서 이탈한 슬로베니아는 민족구성이 복잡하지 않았던데다가 지정학적으로 서방에 가까웠고, 크로아티아는 자체 역량이 있었지만 보스니아는 무턱대고 독립을 선포했다. 라트코의 정규군은 오즈렌과 투즐라 등의 접전지역에서 보스니아 정부군을 격퇴했다. 보스니아 정부군은 서방의 지원을 받았지만 유고연방군의 무력과 조직을 물려받은 스르프스카 정부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라트코는 병사들과 함께 먹고 함께 잠을 잤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투중에 장갑차에 올라 진두지휘했다. 스르프스카는 전쟁 기간 대부분 보스니아 영토의 70% 가량을 점령하고 있었다. 보스니아는 사라예보에서 섬처럼 고립됐다. 

전쟁에는 정규군만 동원된 것이 아니었다. 스르프스카 정부군과 보스니아 정부군은 물론 크로아티아계와 세르비아계, 보스니아계 비정규 무장세력도 활동했다. 스레브레니차 학살을 비롯한 그에게 씌워진 많은 전쟁범죄의 상당부분에 다른 무장세력도 관여했었다는 말이다. 서방언론으로부터 ‘발칸의 도살자’라는 악명을 받았지만 상당부분 잘못 알려졌거나 과장됐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믈라디치가 총사령관이 되기 전에 이미 학살은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최소한 그 모든 학살의 책임을 라트코에만 씌우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는 말이다. 

실제로 스르프스카 정부군의 한 장교는 믈라디치 사령관이 무슬림 전쟁포로의 처형을 금지시켰다고 증언했다. 크로아티아계 전쟁포로는 그가 수용소를 방문한 뒤 포로대우가 훨씬 개선됐다고도 증언했다. ICTY가 1만여건의 증거자료를 검토한 뒤 1992년부터 1996년까지 보스니아 6개 지방에서 자행됐던 인종청소 혐의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린 것도 그 때문일지 모른다. 하지만 전쟁에서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ICTY가 라트코 믈라디치에게 종신형을 선고한 11월22일 밤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 도심에서 믈라디치를 지지하는 주민들이 모여 항의 집회를 갖고 있다. 배경에는 믈라디치의 초상화와 함께 ‘세르비아인과 러시아인은 영원한 형제다’라는 펼침막이 보인다.  AP연합뉴스

ICTY가 라트코 믈라디치에게 종신형을 선고한 11월22일 밤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 도심에서 믈라디치를 지지하는 주민들이 모여 항의 집회를 갖고 있다. 배경에는 믈라디치의 초상화와 함께 ‘세르비아인과 러시아인은 영원한 형제다’라는 펼침막이 보인다. AP연합뉴스 

믈라디치는 여전히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주민들에게 영웅이다. 그는 2011년 체포되기 전까지 16년 동안 세르비아에서 도피생활을 했다. 2009년 ICTY 측의 세르비아 주민 여론조사에서 라트코 믈라디치를 국제사법당국에 넘기겠다는 응답자는 34%에 불과했다. 78%는 넘기지 않겠다고 답했고, 전체 40%는 그를 영웅이라고 답했다. ‘영웅’과 ‘도살자’ 사이 어느 지점에 그의 인생이 놓여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희생자였다는 점에 전쟁의 아이러니가 있다. 사라예보에 있던 그의 집은 개전 초기에 불탔다. 가족들과 떨어져 사라예보의 의과대학을 다니던 그의 딸 아나(당시 24세)는 아버지에 대한 비난을 못견뎌하다가 1994년 3월 자살했다.

그 역시 자신이 지휘했던 군대의 잔학행위를 인정한다. 하지만 조국의 군인으로 조국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스레브레니차 참극 역시 보스니아 측이 세르비아계를 비롯한 다른 인종을 내몰려고 무리수를 둔 끝에 발생했다. 전쟁 뒤 보스니아 연방 내 공화국으로 남은 스르프스카의 밀로라드 도디크 대통령은 22일(현지시간) “ICTY의 판결이 무엇이든 라트코 므라디치는 세르비아인들에게 전설로 남아 있다. 그는 군인으로서의 직업적 능력과 인간적 능력을 쏟아 세르비아인들과 그들의 자유를 지키는 책무를 다한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침략자인가.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또는 포클랜드를 침략했는가. 아니면 소말리아나 걸프전에 뛰어들었는가. 아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국민을 지켰을 뿐이다.” 1994년 뉴욕타임스 매거진 인터뷰에서 그가 한 말이다. ICTY가 그를 기소하자 “베트남전에서 양민을 학살한 미국 장군은 왜 기소하지 않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라트코는 종신형 판결 뒤 로이터에 “나는 늙었다. (내 운명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나의 사람들(세르비아인)에게 어떤 유산을 물려주느냐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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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11231524001&code=970205#csidx6cd8b20a742c3deb0d1468999865d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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