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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오늘

광복절 아침에 비켜간 ‘전쟁 위기’... 말을 아끼고, 준비할 때다

by gino's 2017. 8. 15.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제72회 광복절 경축사를 하는 동안 한명이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청중들의 좌석 뒤에 설치된 소형화면 속에 문 대통령의 연설모습이 보인다.  AP연합뉴스

북한의 위협이 다시 한번 먹혔다. ‘김정은의 북한’은 괌을 포위사격하겠다고 공언한 ‘8월 중순’에 맞춰 1단계 위기를 접고, 2단계 위기에 발동을 걸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은 14일 전략군 사령부를 방문해 괌 포위사격 작전계획을 보고받고 “비참한 운명의 분초를 다투는 고달픈 시간을 보내고 있는 미국놈들의 행태를 좀 더 지켜볼 것”이라면서 공격 지시를 유보했다. 방문시점은 14일이지만, 조선중앙통신이 이를 전한 것은 15일 이른 아침이다. 

김 위원장은 그러나 “미국놈들이 우리의 자제력을 시험하며 조선반도 주변에서 위험천만한 망동을 계속 부려대면 이미 천명한대로 중대한 결단을 내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북핵 위기를 최대한 얇게 썰어 위기를 고조시키는 예의 벼랑끝전술을 또다시 꺼내든 것이다. 북한의 중장거리탄도미사일(IRBM) 능력이 어느 정도 인정된 상태에서 벌인 한편의 협박드라마였다. 어느 때보다 긴장을 높여놓고, 슬쩍 낮췄다가, 다시 높일 수있다고 강조, 북핵위기아 김정은의 의도대로 진행될 수 있음을 보였다. 과연 한 미국 전문가(제프리 루이스)의 말대로 ‘북핵 게임’에서 한·미는 이미 진 것일까. 한반도 전쟁이라는 아마겟돈을 피하려면 계속 북한의 위협에 끌려다녀야 하는 것일까. 착잡한 광복절 아침이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광복절 하루 전인 14일 전략군사령부를 방문해 괌 포위사격 방안이 담긴 ‘전략군 화력타격계획’을 들여다보면서 보고를 받고 있다. 김정은의 시찰 소식과 사진은 15일 오전 공개됐다.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광복절 하루 전인 14일 전략군사령부를 방문해 괌 포위사격 방안이 담긴 ‘전략군 화력타격계획’을 들여다보면서 보고를 받고 있다. 김정은의 시찰 소식과 사진은 15일 오전 공개됐다. 연합뉴스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된 북한과 미국의 치킨게임 

북한과 미국은 마지막까지 팽팽하게 대치했다. 조선중앙통신이 김정은의 행보를 보도한 비슷한 시간(한국시간 15일 이른 아침),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장관은 “북한 지도자가 미국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한다면 매우 빠르게 전쟁으로 치달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14일(현지시간) 펜타곤 기자실을 예고없이 방문해 작심한 듯이 내놓은 일종의 최후 통첩이었다. “미사일이 미국 도시를 타격한다면 게임이 시작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매티스 장관은 “북한이 괌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한다면 탄착지점을 곧바로(within moments) 알 수 있다”면서 “미국을 타격하지 않는 것이 최선일 것”이라고 경고했다.

 

매티스는 그러나 개전에 관한 추가 질문에 “전쟁(결정)은 대통령 또는 아마도 의회에 달려 있다”면서 “분명한 것은 우리는 국가를 공격으로부터 방어할 것”이라면서 “우리에게 그것(북한의 미사일발사)은 전쟁이다. 전시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매티스는 그러나 “전쟁 결정은 미리 할 수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가지 일이 진행돼야 한다”면서 “혐의해야만 할 동맹국들이 있다”고 말했다. 매티스가 개전에 필요한 법적 정당성까지 언급한 것은 한반도가 전쟁 직전 상황까지 치달았었음을 웅변한다. 서울시간으로 조선중앙통신을 직접 받아보는 연합뉴스가 김정은 발언의 1보를 전한 게 15일 오전 6시49분이고, 매티스의 최후통첩을 AP통신이 1보도를 전한 게 6시6분이다. 매티스는 김정은의 발언을 접하지 못하고 펜타곤 기자실을 향한 것으로 미뤄 짐작된다. 치킨게임을 기획하고, 위기를 살라미 썰듯이 잘게 썰어 배치한 것도, 마지막 순간에 슬쩍 긴장을 뺀 것도 모두 김정은의 기획이 된 꼴이다. 한반도가 상시적 긴장에 쌓일 것임을 예고한 날이었다. 

한·중·일 방한의 첫번째 방문국으로 서울을 찾은 조지프 던포드 미국 합참의장(왼쪽)이 14일 서울 국방부 청사에서 송영무 국방장관과 회담을 하기에 앞서 웃고 있다.   AP연합뉴스

한·중·일 방한의 첫번째 방문국으로 서울을 찾은 조지프 던포드 미국 합참의장(왼쪽)이 14일 서울 국방부 청사에서 송영무 국방장관과 회담을 하기에 앞서 웃고 있다. AP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의 광복절 대북 평화 제안 

김정은의 이날 언급은 지난 13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 공동기고문 형식으로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과 매티스 국방장관이 함께 내놓은 대화 제의에 찬물을 끼얹는 위협이다. 이번 광복절에 김정은과 매티스에 이어 국제적으로 주요 뉴스메이커가 된 사람은 바로 문재인 대통령이다. 문 대통령은 ‘제72주년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한반도와 동북아의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의 대장정을 시작하는 것이 (우리가 가야할) 명확한 길”이라고 선언했다. 당면한 안보상황에 대해 미국과 긴밀한 협력을 전제하면서도 “우리의 안보를 동맹국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한반도 문제의 주도적 해결의지를 거듭 내보인 것이다. 문 대통령은 대북 군사대화를 제안하는 한편, “쉬운 일부터 시작하자”면서 이산가족 상봉과 고향 방문, 성묘에 대한 북한의 조속한 호응을 촉구했다. 2018년 평창 올림픽과 2020년 도쿄 올림픽, 2022년 베이징 올림픽 등 자신의 임기중 열리는 3번의 올림픽이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와 경제협력을 촉진하는 기회”라고 강조했다. 일촉즉발의 긴박한 상황에 멀리는 국민의 정부의 햇볕정책과 참여정부의 평화번영 정책의 맥을 잇는 제안을 내놓은 것이다. 김대중 정부의 튼튼한 안보와 노무현 정부의 ‘협력적 자주국방’ 정책과도 같은 맥락이다. "전쟁만은 안된다"는 외침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한 말이기도 하다. 그 외침이 빌 클린턴 행정부로 하여금 북한 선제타격계획을 중단케하는 데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문 대통령의 경축사는 이례적으로 외신 주요뉴스로 소개됐다. 

북한이 포위공격의 목표로 공개한 괌의 주민들이 14일 괌 하가트나시의 케푸하 공원에서 ‘평화를 위한 사람들’이라는 현수막을 펼쳐든채 평화시위를 하고 있다. 사상 처음 괌의 일반 주민들도 전쟁위협을 느낀 위기였다.   AP연합뉴스

북한이 포위공격의 목표로 공개한 괌의 주민들이 14일 괌 하가트나시의 케푸하 공원에서 ‘평화를 위한 사람들’이라는 현수막을 펼쳐든채 평화시위를 하고 있다. 사상 처음 괌의 일반 주민들도 전쟁위협을 느낀 위기였다. AP연합뉴스 


■‘한반도의 발칸반도화’를 막을 방도가 있는가 

평화를 구축하는 것은 전쟁을 준비하는 것 보다 더욱 지난하고 오래 걸리는 과정이다. 일촉즉발의 위기 일수록 대화와 타협을 강조하며 긴장을 낮추는 것 역시 중요하다. 이산가족 상봉과 같은 ‘쉬운 일’부터 시작하자는 제안은, 긴장을 잘게 썰어 위기를 증폭시키는 북한에 맞서 위기를 잘게 썰어 평화의 길을 닦자는 의미도 담겨 있다. 하지만 현 상황에 대한 인식과 나아갈 방향에 대한 진단으로는 부족하다는 판단이다. 위협의 성격과 악화 속도, 불투명한 전망 탓에 한반도가 발칸반도처럼 상시적인 화약고로 변하고 있는 지금이다. 다소 안이한 인식까지 엿보인다. 

 

종래의 북핵위가와 목전의 북핵위기는 다르다. 북한이 소형 핵탄두를 장착한 ICBM 능력을 획득할 단계에 접근함에 따라 위기가 한반도를 넘어 미국 본토에까지 확대됐다. 특히 미국이 이번 위기에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북핵 위기의 인화점을 결정적으로 높이는 요소다. 김정일이 백악관 주인을 ‘부시 대통령 각하(2005년 6월17일 방북 정동영 통일부장관과 대화중)’라고 부르고,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김정일을 ‘친애하는 위원장(Dear Mr. Chairman·2007년 12월1일 대북 친서)’라고 부르던 시절과도 다르다. 김정일의 북한과 오바마·트럼프의 미국은 6년이 넘도록 아직 서로를 대화상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평양 주석궁과 워싱턴 백악관의 주인들이 과거에 비해 합리적인 판단을 기대하기 더 어려운 인물들로 채워져 있기도 하다. 공개적인 대화 제의 만으로는 변화시킬 수있는 상황이 아니다. 10여년 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북한의 조선인민군 전략군사령부가 괌 주변 해역에 포위사격과 함께 남반부 불바다를 위협한 지난 9일 파주 자유로에서 바라본 남과 북의 초소에 정적이 감돌고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북한의 조선인민군 전략군사령부가 괌 주변 해역에 포위사격과 함께 남반부 불바다를 위협한 지난 9일 파주 자유로에서 바라본 남과 북의 초소에 정적이 감돌고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지금이야말로 말을 아끼고, 새로운 한반도 전략을 짜야할 시점이다

북한이 외면하는 대화제의를 반복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한반도 문제의 운전석에 앉는다고 해도 마주보고 달리는 두 대의 자동차에 장착된 엔진은 우리 것이 아니다. 수년 내 전시작전통제권을 돌려받아도 남북 간의 비대칭전력은 단기간에 메울 수없다. ‘절반의 방위’ 밖에 되지 않는다. 확장억지력 제공 약속에 기대어 필요할 때마다 미국에 손을 벌려야 하는 구조, 분단의 구조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북한이 괌을 비롯한 미국 영토 공격을 다짐하며 미국의 위협 인식을 건드리기 시작한 것은 2013년 2월 세번째 핵실험 직후부터다. 이제 미국도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럴 때일수록 매년 3월의 키리졸브·독수리 훈련과 8월의 을지프리덤가디언(UFG) 훈련을 중단 또는 축소하기도 어렵다. 훈련 없이 어떻게 대비하겠는가. 자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당장에 답을 내놓을 수없는 문제라면, 차라리 침묵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수면 밑에서 무력대응과 대화탁자를 동시에 준비할지언정, 응답하지 않는 대화제의를 거듭 내놓을 때는 아니다. 

 

“위기는 수백 만개의 움직이는 조각들을 갖고 있다. 그모든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추적하는 중앙의 양치기(a central Sherpherd)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정부가 집중한 상태로 위기를 맞을 수있다. 압력에 놓인 상황에서 내리는 실시간 결정들은 논리적이어야 할 뿐 아니라, 논리적으로 방어할 수있어야 한다. 상황이 뜨거워질 때는 온도를 낮추는 게 현명하다.” 한 미국 칼럼니스트(마거릿 페기 누냄)의 한반도 위기 진단이다. 한마디 보탠다면, 낡은 제안으론 곤란하다. 때론 침묵이 온도를 낮추는 방법이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큰전략을 다시 짜야할 때다. 아니, 이미 짜기 시작했어야 한다.


 

AP통신이 뜬금없이 제공한 오래전 사진. 1990년 광복절에 평양의 김일성광장에서 10여만명의 인파가 광복을 자축하고 있다. 어느 때보다 전쟁위기가 고조됐던 이번 광복절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AP연합뉴스

AP통신이 뜬금없이 제공한 오래전 사진. 1990년 광복절에 평양의 김일성광장에서 10여만명의 인파가 광복을 자축하고 있다. 어느 때보다 전쟁위기가 고조됐던 이번 광복절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AP연합뉴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8151803001&code=970100#csidx392ade3cdb2a371b76d7870eea4a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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