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의 사적 공간을 낱낱이 들여다본다면 사는 게 지옥일 수밖에 없다. 스스로 실존적인 존재로서가 아니라 타인의 관찰 대상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법이 경우에 따라 사적 공간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게다. 하지만 개인의 사생활이라는 자연인의 권리와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상 국민의 권리가 부딪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모나코의 군주인 레니에 3세가 투병 중이던 2002년 독일의 연예주간지 프라우 임 슈피겔은 캐롤라인 공주 부부가 태연하게 스키 휴가를 즐기는 사진을 보도했다. 발끈한 캐롤라인 공주는 사생활 침해를 들어 법원에 제소했다. 하지만 지난주 유럽인권재판소는 ‘표현의 자유’를 두둔했다. “공주 부부는 공인”이라는 이유에서 국민의 알권리를 앞세운 것이다.
<표현의 자유 탄압 사례> l 출처 :경향DB
한국에서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유난히 공인의 명예훼손 논란이 빈번하다. 대선 후보나 장관 후보들의 주소 이전 정보를 따지는 게 “사생활 침해”라는 얼토당토않은 볼멘소리가 나온다. 한국 사회는 아직도 공인의 사생활과 표현의 자유 사이에서 제대로 된 나침반을 갖고 있지 못하다. 광우병 파동 당시 정운천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은 MBC ‘PD수첩’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걸었다가 패소했다. “정부나 국가기관이 형법상 명예훼손의 피해자가 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비키니 대 코피’ 논란으로 번지면서 옆길로 샜지만 정봉주 전 의원 사건도 대통령 후보의 행실을 둘러싼 표현의 자유가 본질이다. 공인의 기준은 나라마다 다를 수 있지만 적어도 국민 세금으로 사는 고위공직자, 국민을 대표하겠다고 나선 정치인에게는 예외가 없다.
장 폴 사르트르의 희곡 <닫힌 방(Huis-Clos)>에서 3명의 남녀가 갇힌 출구 없는 방에는 그들을 징벌할 심판관도, 고문관도 없다. 하지만 결국 지옥이다. 영원히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천형을 걸머지고 있기 때문이다. 공인으로서 타인의 감시를 받는 상황도 개인적으론 지옥 같을 수 있다. 하지만 필요한 지옥이다. 공인의 삶은 실존인 동시에 대상이어야 할 운명이기 때문이다. 공인의 행실에 대한 감시의 시선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이기도 하다. 보기에 따라서는 무자비할 수도 있다. 타인의 시선에 구속될 자세가 안된 사람이라면 영원히 사인(私人)에 머물러 있는 편이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