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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오늘

북-미정상회담, 시나브로 다가오는 운명의 날, 진실의 순간

by gino's 2018. 5. 13.

40여일 만에 다시 중국을 방문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7일 랴오닝성 다롄 공항에 도착해 전용기인 참매1호의 트랩을 내려오고 있다.  다롄/AP연합뉴스 


ㆍ북·미 정상회담 한 달 앞으로

 


"김정은 위원장과 정상회담 준비와 관련해 훌륭하고 충분한 시간의 대화를 가졌다. 미국이 어젠다에 포함시키려는 내용에 대해 심도있는 이야기를 나눴다. 양측 모두 정상회담에서 성공적인 회담을 위한 조건을 내놓을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지난 9일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반나절 동안의 방북을 마치고 귀환하는 길에 내놓은 말이다. 폼페이오 장관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의 대화 내용은 전하지 않은 채 ‘생산적인’ 대화였다고 강조했다. 물론 북한이 억류해온 미국 시민권자 3명을 풀어주었기 때문에 발걸음이 가벼워진 측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방북 전날 평양행 전용기 안에서 “우리는 과거를 답습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이 과거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대북) 제재를 풀지 않을 것”이라던 입장에서 한 단계 진전됐음을 분명히 했다. 긍정적 반응에 이은 10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부부까지 나선 메릴랜드주 앤드루스 공군기지에서의 심야 환영 이벤트, 트럼프 대통령의 북·미 정상회담 시간 및 장소 트위터 발표로 숨 가쁘게 전개된 이후 상황도 상서롭다. 폼페이오가 방북 전날 말한 ‘성공적인 미·북 정상회담을 위한 틀’이 갖춰졌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김 위원장은 폼페이오가 전한 트럼프 대통령의 구두메시지를 전해 듣고 “대통령이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데 대해 높이 평가하고 사의를 표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0일 전했다. 김 위원장이 “폼페이오 장관과 훌륭한 회담을 진행하고 만족한 결과를 이룩한 것을 높이 평가했다”는 대목도 주목된다.


양측은 과연 정상회담의 핵심의제와 관련해 상당한 의견 접근을 보인 것일까. 한반도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남북, 북·미, 북·중, 한·중·일 정상외교의 쌍둥이 어젠다는 비핵화와 평화체제 협상이다. 종전선언은 평화체제 협상의 전 단계에 배치된다. 북·미 정상은 이미 폼페이오를 통한 ‘대리 회담’을 두 차례 했다. 북한은 여기에 한 차례의 남북정상회담과 두 차례의 북·중 정상회담을 통해 미국과 간접적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폼페이오의 방북을 전후해 북한과 미국이 내놓은 긍정적인 반응을 외교적 수사라고 폄하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0일 부인 멜라니아와 함께 북한에서 풀려나 미국 메릴랜드 앤드루스 공군기지에 도착한 한국계 미국인 3명을 비행기 트랩에 올라가 환영하며 박수를 치고 있다. 앤드루스 | AP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 핵합의를 파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북·미 정상회담의 전망이 어둡지 않게 제기되는 근거들이다. 특유의 과장화법을 감안하더라도 그가 10일 트위터에 김 위원장을 지칭해 “우리 두 사람 모두 이 회담을 세계 평화를 위한 매우 특별한 순간으로 만들 것”이라고 말한 것은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폼페이오는 평양 환영 오찬에서 김영철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과 건배를 하면서 “우리는 지난 수십년 동안 적이었지만 이제 갈등을 함께 해결하기 위해 일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세계를 향한 위협을 거두고, 당신 나라 국민들이 기대해 마지않는 기회들을 모두 갖도록 함께 일하자”는 말도 곁들였다고 뉴욕타임스가 전했다.


폼페이오의 방북과 관련해 국무부 고위관계자는 지난 8일 일본 요코타 공군기지 기내에서 수행기자단을 상대로 한 특별브리핑에서 “폼페이오 장관은 방북 길에 김 위원장으로부터 북한이 실질적으로 변했다는 신호들을 듣게 될 것”이라면서 성공적인 방북을 예견한 바 있다. 그러면서 미국은 ‘새롭고도 대담한 접근’을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물론 북·미가 노출하고 있는 긍정적인 분위기들은 일정 부분, 서로 본심을 드러내지 않고 상대가 먼저 양보하기를 기다리면서 내놓는 빈말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본회담 전에 종종 의도적으로 배포하는 낙관이다. 다만 국무부 고위 당국자가 설명한 ‘대담한 접근’이 과연 북·미 모두 동의하는 것이냐에 그 진위가 걸려 있다. 익명의 이 고위 당국자는 그 뜻을 묻는 수행기자의 질문에 “과거의 점증적이고, 장기간에 걸쳐 천천히 진행됐던 비핵화의 형식이 평화를 담보하지 못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면서 “그 반대가 바로 대담한 접근”이라고 답했다. 트럼프 정부는 지난 27년간 북한 핵문제에서 미국이 시도했던 모든 접근 방식을 거부하고 있다. 북핵과 평화체제의 단계적인 해결 수순을 담은 6자회담 합의문 9·19 공동성명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말해준다. 이에 반해 김 위원장은 최근의 두 차례 방중 길에 단계적·동시적 비핵화 원칙을 거듭 밝히고 있다.


김 위원장은 지난 7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다롄 정상회담에서 “유관 각국이 대북 적대 시 정책과 안전 위협을 없앤다면 비핵화는 실현 가능하다”면서 “북·미 대화를 통해 상호 신뢰를 구축하고 유관 각국이 단계별로 동시적으로 책임 있게 조치를 취할 것”을 강조했다.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 프로세스를 전면적으로 추진해 비핵화의 영구적인 평화를 실현하자는 제안이다.


일각의 예상처럼 미국은 북핵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에 더해 화학무기를 비롯한 대량살상무기(WMD)와 중거리 미사일을 포함한 탄도미사일 등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려고 하는 것일까. 여기에 북한에 억류됐다가 지난해 귀국 직후 숨진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의 죽음을 기억하는 미국 사회 일각에서는 인권문제까지 포함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부부가 북한에서 풀려난 한국계 미국인 3명이 도착한 메릴랜드주 앤드루스 공항에 직접 마중을 나간 것은 이중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북한에 대한 천사와 악마의 이미지가 섞인 것이다. 김 위원장의 특별사면에 사의를 표하는 동시에 북한 인권에 관심을 갖고 있는 많은 미국인들의 정서에 부합하려는 의도가 읽혔다.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고 했던가. 미국이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강대국의 DNA는 다르다. 북한은 2012년 북·미 2·29합의에서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목표로 삼았던 핵 및 미사일 모라토리엄을 정상회담도 하기 전에 미리 내주었다. 또 다른 전향적인 양보를 할 수도 있다. 북·미 정상회담에서 CVID,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함께 수십년 동안 실타래처럼 얽혔던 현안들을 단번에 해결하기를 바라는 정서가 미국 내에 있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자칫 어렵사리 마련된 회담이 파행으로 치닫게 되는 것은 어느 쪽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트럼프 행정부가 과연 이번 정상회담에서 무엇을 어느 정도까지 원하는지, 또 그 상응 조치로 무엇을 어느 정도까지 내놓을지는 불투명하다.


답답한 마음에 미국 주요 싱크탱크 전문가 중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트럼프 사람’에게 e메일로 질문 보따리를 던져보았지만, “미안하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에 답하고 나설 허가를 받지 못했다”는 답만 돌아왔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 시절 정권 인수위원회 자문을 맡았던 마이클 필스버리 미국 허드슨연구소의 중국전략연구센터장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는 다만 자신이 지난번 만남에서 강조했던 “평화조약 초안의 중요성을 기억하고 있기를 바란다”고 말해 합의안 초안 작업이 진행되고 있음을 시사했다. 초안 작업과 관련해 최근 워싱턴을 다녀온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는 “백악관, 국무부, 에너지부 등이 함께 모여 북한의 핵시설 신고에 대한 사찰·검증·폐기 등에 관한 로드맵(일정)을 구체적으로 짜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아무리 완벽한 초안과 로드맵도 북·미 간 해묵은 불신을 씻어내지 않는 한 공염불에 그칠 수밖에 없다. 필스버리는 지난해 11월 인터뷰에서 “평화조약 초안에는 오랜 기간 협의해야 하는 회색지대도 있겠지만, 김정은이 당장이라도 서명할 수 있는 내용도 포함돼야 한다”면서 상대 입장을 이해하려는 ‘공감(empathy)’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협상 기간은 최소 수개월을 예상했다. 북·미 합의가 평화조약의 형식을 취할 경우 연방 상원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받아야 하는 부담이 있기 때문에 공식적인 국교정상화 대신 연락사무소를 설치하는 방식이 제기되기도 한다. 북·미 간 서로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관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김 위원장은 4·27 판문점 정상회담 당시 미국이 공화국(북한)에 대해 갖고 있는 ‘체질적 거부감’을 시인했다. 그는 하지만 “우리와 대화해 보면 내가 남쪽이나 태평양상으로 핵을 쏘거나 미국을 겨냥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될 것”이라면서 신뢰와 종전 및 불가침 약속을 비핵화의 조건으로 거론한 바 있다.


북한에만 비핵화라는 근본적인 변화를 결정했는지 또는 결정할 준비가 됐는지 물을 일이 아니다. 성공의 절반을 담보하는 것은 미국이다. 미국 역시 북한을 정상국가로 받아들이는, 근본적인 변화를 결정해야 한다. 빌 클린턴 행정부는 1994년 제네바합의에서 북·미관계 정상화를 약속하고도 여소야대 의회가 되자 사실상 이를 포기했다. 이 대목에서 전통적이고, 상식적이지 않은 트럼프의 스타일이 오히려 미국이 종래 못하던 결정을 내릴 것이라는 기대지수를 높이는 것이 사실이다. 트럼프는 앤드루스 공항 활주로에서 김 위원장에 사의를 표하면서 북·미관계와 관련, “우리는 새로운 행보를 내딛고 있다. 그(김정은 위원장)는 진정 무언가 하기를 바라는 것 같다”고 말했다. 말이 말로 끝날 것인가. 근본적인 변화를 끌어내는 행동으로 이어질 것인가. 6월12일, 진실의 순간은 시나브로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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