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평양 개선문 인근 모란봉 기념품상점 앞의 거리. 수삼나무 가로수가 늘씬하게 서 있다. 오래전 한반도에서 사라진 수삼나무를 다시 살려 평양 시내 곳곳에 가로수로 심어 놓았다.   김진호기자



‘조국해방(8·15) 경축’ ‘항일전쟁 승리’. 평양은 축제 분위기다. 8·15를 시작으로 9월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기념일인 국경절, 9·9절이 있다. 이어 10월10일 조선노동당 창건 기념일이 3대 명절의 끝을 장식한다. 북한에선 광복절을 ‘조국해방기념일’ 또는 ‘8·15’로 불렀다.


73돌 광복절인 15일 평양 시내 곳곳에선 조직별, 단위별 8·15 경축행사가 열렸다. 하지만 5년 단위로 꺾어지는 정주년이 아니어서 국가 차원의 행사는 없었다. 올해 3대 명절의 중심은 단연 70주년을 맞은 두번째 명절이다. 평양 시민들은 휴일인 이날 저녁 늦게까지 9·9절 대집단체조 준비가 한창이었다. 김일성광장과 인접한 대동강변에서는 오후 7시 넘어 행사 연습 중 잠시 휴식을 취하는 시민들도 보였다. 이번 대집단체조의 주제는 ‘빛나는 조국’이다. 김일성경기장에서 만난 한 시민은 “올해 8·15엔 국가행사가 없어 개별적으로 만수대 언덕을 찾아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동상에) 인사를 드릴 뿐, 주로 가족 단위로 쉰다”고 설명했다. 


평양 시내 곳곳에 나붙은 조국해방기념일(8.15) 기념 플래카드.     김진호기자



남북은 9월 안에 평양에서 올해 3차 남북정상회담을 열기로 지난 13일 합의했다. 낙랑구역 초급중학교 교원이라고 밝힌 최일룡씨는 “판문점 선언이 잘 풀려 풍요로운 가을을 맞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일성경기장에서 만난 평양시 인민위원회 복무원 림현철씨(41·평천구역)는 “평양 수뇌회담에서 그동안의 부진을 벗고 더 실질적인 조치가 취해져 우리 민족이 번영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길 바란다”고 했다. 양각도 국제호텔 1층 서점의 복무원 김혜영씨(46)는 “노무현 대통령이 오셨을 때 평양 4·25문화회관 앞에서 열렸던 환영행사에 나갔었다”며 “정확히 며칠인지는 몰라도 문재인 대통령이 오시면 또 환영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에서는 ‘조국해방기념일’로 부르는 광복절인 15일 평양 시내 김일성광장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기념일(9·9절) 행사 준비가 한창이다. 평양 |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북한에서는 ‘조국해방기념일’로 부르는 광복절인 15일 평양 시내 김일성광장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기념일(9·9절) 행사 준비가 한창이다. 평양 |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한 북측 보장성원은 “문재인 대통령이 9·9절에 오시면 더할 나위 없지. 거기다 트럼프까지 함께 오면 좋은데…”라면서 “(오면) 놀러오는 건 아닐 테고, 종전선언을 기대해볼 수도 있는 것 아닌가”라며 기대를 표했다. 


하지만 많은 북측 인사들은 정상회담 전망을 묻는 질문에 즉답을 피했다. “잘돼야죠. 잘되겠지…”라며 말끝을 흐렸다. 14일자 노동신문은 정상회담 소식을 4면에서 4개 문장으로 짧게 전했다. ‘정상회담’과 관련된 제목을 따로 붙이지도 않았다. 남측 언론이 3차 정상회담 소식을 대서특필한 것과 대비된다.


북측의 생각은 지난 14일 만수대 의사당으로 예방한 김영대 북측 민화협 의장 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의장의 말에서도 확인됐다. 김 의장은 “남측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오는데 성과는 하나도 없다. 서울에 돌아가 그 얘기를 전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는 “미국에 일일이 물어보고 그래서 되겠나. 우리 민족끼리 뭉치면 위대한 조국이 된다”고도 했다. 맞다. 4·27 판문점선언과 6·12 북·미 싱가포르 정상회담 뒤에도 본질적인 변화는 없다. 북측의 불만이 전달된 게 처음도 아니다. 최근 방북했던 김홍걸 남측 민화협 의장에게도 비슷한 메시지를 들려 보냈다. 


하지만 ‘실질적 진전’을 위해선 북측도 할 일이 있다. 이를 생략하고 남측의 역할만 강조하는 것이 남북관계에 과연 도움이 될까. 아니면 당장 남북이 함께할 수 있는 영역을 넓히기 위해 머리를 맞대는 게 좋을까. 확신이 서지 않았다. 

외식하러 나왔어요 평양 대동강 수산물식당에 엄마를 따라 나들이 나온 어린이들. 평양 |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외식하러 나왔어요 평양 대동강 수산물식당에 엄마를 따라 나들이 나온 어린이들. 평양 |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14일 점심시간. 대동강구역 대동강 수산물식당은 외식 나온 시민들로 북적였다. 1층에 마련된 여러 개의 수조에서는 철갑상어와 ‘룡정어’, 잉어, 연어 등 각종 어류가 헤엄치고 있었다.

지난달 26일 문을 연 수산물식당은 김정은 국무위원장 집권 이후 유희장과 물놀이장 등 주민 편의시설을 확대해온 노력의 일환이다. 2012년 4월 집권 첫 연설에서 “다시는 인민의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했던 김 위원장이다. 김일성대 출신의 30대 북측 보장성원은 “인민 생활의 많은 부분이 개선되고 있음을 몸으로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짧은 기간 동안 수산물식당을 두 차례(6월8일, 7월26일) 현지지도하면서 큰 관심을 보였다. 


환하게 빛나는 대동강변 
아파트 베란다엔 태양전지판
점심시간 수산물 시장엔 
외식 나온 시민들로 ‘북적’

 

SNS로 평양 실시간 공유 
‘페친’들은 신선한 충격


‘최고 존엄’은 북한 주민 생활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크고 작은 의문의 종착점이었다. 왜 북에는 유독 ‘은정’이라는 간판이 많을까. 개성~평양 고속도로 휴게소 이름과 양각도 호텔 찻집 이름도 ‘은정’이었다. 찻집의 20대 여성 복무원에게 이유를 묻자 “그걸 모르셨습니까”라며 되레 의아해했다. 이어 “위대한 수령님의 은혜를 받는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평양 시내 22개 구역은 물론 지방에도 지역별, 단위별 ‘은정원’이 있다고 한다. 찻집은 물론 식당과 이발소, 목욕탕 등 주민 편의시설을 모아놓은 건물이라고 했다. ‘은정차’도 있다. 황해남도 강령군에서 재배한 강령녹차의 다른 이름이다. 평양은 질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평양 야경 맞나 양각도 호텔에서 12일 밤에 본 평양의 야경이다. 오른쪽 유난히 환하게 빛나는 높은 탑이 주체사상탑이다. 건물마다 환하게 불을 밝혀놓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전력 사정이 과거에 비해 많이 개선되었음을 알 수 있다.  평양 |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평양 야경 맞나 양각도 호텔에서 12일 밤에 본 평양의 야경이다. 오른쪽 유난히 환하게 빛나는 높은 탑이 주체사상탑이다. 건물마다 환하게 불을 밝혀놓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전력 사정이 과거에 비해 많이 개선되었음을 알 수 있다. 평양 |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밤마다 양각도 호텔 34층의 강변 창문으로 내다본 평양 시내 건물들은 불빛으로 환했다. 전기 사정이 과거에 비해 획기적으로 개선된 것이 분명하다. 북측 보장성원들은 “평양, 동평양 화력발전소가 가동되고 있는 데다 곳곳에 발전소를 짓고 있다”고 말했다. ‘제재 탓에 전력 생산에 어려움이 없느냐’는 질문에 “대비를 잘해왔기 때문에 전기 사정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고 답했다.


시내 아파트에는 가구마다 베란다나 창틀에 태양전지판을 설치해놓은 곳이 많았다. 화력발전소와 함께 대체에너지가 평양의 전력난을 완화시키고 있음을 말해준다. 평양 물가로 보아 요금(㎞당 0.49달러)이 녹록지 않은 택시를 이용하는 시민들도 자주 눈에 띄었다. 


전력 사정뿐이 아니었다. 산뜻한 신축 빌딩, 도로 위의 자동차와 무궤도전차 등 모든 것이 달라졌다. 무엇보다 차창 밖 평양 시민들의 표정이 대체로 밝아보였다. 국제사회의 제재를 이고 산다고 믿기 힘들었다. 대체 이 도시의 활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30대 초반의 세대주(가장)에게 ‘제재가 풀리면 살림살이도 좀 나아지지 않겠냐’라고 묻자 “우리야 늘 제재를 받으며 살아와서 별 신경을 안 쓴다. 지금도 잘산다”고 답했다.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지켜본 소감이 어땠느냐는 질문에는 “우리 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느꼈다. 세계 최강국 대통령이 굽실거리는 것 보지 않았느냐”라고 말했다. 


73년 전 8·15, 그날은 분명 벅찬 감격의 날이었을 것이다. 여전히 기쁜 날이다. 하지만 한반도 현대사의 ‘BC’와 ‘AD’가 갈린 날이기도 하다. 바로 그날, 분단의 징한 여정이 시작되지 않았나.

우리 방금 결혼했어요 북한의 한 신혼부부가 ‘조국해방기념일’로 불리는 15일 평양 만수대에 자리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평양 | AP연합뉴스

우리 방금 결혼했어요 북한의 한 신혼부부가 ‘조국해방기념일’로 불리는 15일 평양 만수대에 자리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평양 | AP연합뉴스 



서울을 떠나기 전만 해도 평양 한복판에 앉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평양 도착 뒤 페이스북에 “여기는 평양”임을 알리고, 대동강변의 풍광과 옥류관 ‘평양랭면’ 사진을 올리자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단순히 부러움을 표하는 분도 있었지만, 평양에서 페이스북을 통해 실시간 교신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는 반응이 많았다. 서울은 평양을, 평양은 서울을 바라보는 지독한 모순. 늦은 밤 숙소로 돌아와 조선중앙TV 채널을 선택하니 <방탄벽>이 방영되고 있었다. 해방 직후 인민 속으로 숨어든 친일파와 첩자를 찾아내기 위해 역시 신분을 숨기고 활동하던 여성 혁명가의 이야기다. 인기 여배우 리수경이 주연으로 나와 북측에서 꽤 인기 있는 연속극이다.


15일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선 남과 북의 축구 꿈나무들이 격돌했다. 스탠드를 빼곡하게 메운 4만여명의 관중은 대부분 흰색 상의를 입은 학생들이었다. “잘한다, 잘한다”는 함성이 들렸다. 금빛 응원도구를 활용한 파도타기 응원도 선보였다. 북측 4·25 여자팀과 남측 하나은행 클럽 간 유소년 축구 친선경기는 북측의 1-0 승리로 끝났다. 잠시 후 제4회 아리스포츠컵 15세 이하 국제유소년축구대회 개막 경기가 벌어졌다. 북측 4·25팀과 남측 남강원도팀(강원도FC 유소년팀)이 입장하자 관중석의 열기는 한껏 달아올랐다. 



지난 14일 평양 중구역 만수대 의사당(최고인민회의 의사당)에서 김영대 북측 민화협 의장을 예방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동안 접견실 앞에 서 있는 안내원들의 모습을 담았다. 


서로 공격적인 플레이를 펼치다가도 쓰러진 상대방 선수를 부축하는 장면이 여러 차례 보였다. 북측의 일방적인 우세였다. 남강원도팀이 좋은 경기를 보일 때마다 관중은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북측의 4-1 승리. 경기가 끝나자 남북의 선수들은 서로 어깨를 겯고 그라운드를 돌며 관중석에 머리를 숙였다. 남북이 잠시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다시 한번 경기장이 떠나가도록 박수와 격려가 쏟아졌다.


대형 스크린에는 ‘반갑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선율이 흘러나왔고, 학생 응원단은 노래를 따라 불렀다. 40대의 남자 관중은 “서로 힘합해 국제경기에 나서면 경쟁력이 있을 것 같다. 다 형제 아닌가”라며 “북남을 함께 응원했다”고 말했다. 


전날 일기예보는 최저 25도, 최고 32도. 불볕더위가 약해지고 흐린 날이었지만, 온종일 후덥지근했다. 조국해방기념일의 불꽃놀이(축포)는 없었다. 평양에서 처음 8·15를 맞았다.



지난 11일 평양 양각도 호텔에서 바라본 미래 과학자거리 모습.    김진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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