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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진 반쪽/방북기

백두산, 절반의 항일역사

by gino's 2012. 2. 26.
애국가 첫구절의 '동해물'에 처음 발을 적신 것이 중학교때이니 14세쯤 된 것 같다. 두번째 '백두산'을 밟아본게 40줄에 들어서니 30년 가까이된 세월이 걸린 셈이다. 백두산만 4박5일의 여정이었다.


[경향신문]|2003-10-06|07면 |45판 |특집 |기획,연재 |4442자

분단 50여년의 세월은 남북간 이질감을 심화시켰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두 한국간 정치.경제 분야의 교류협력은 활발해졌지만 사회.문화 분야에서의 동질성 회복작업은 아직 더디다. 이러한 가운데 남북 역사학자들은 지난 9월 20∼27일 백두산.평양에서 항일투쟁 역사를 주제로 한 학술토론회를 가졌다. 토론회에 참석한 남측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북측 조선사회과학자협회, 중국 옌볜대 소속 학자들은 이념과 상관없이 공유할 수 있는 '중간 주제'를 선택, 접점을 마련한 뒤 장차 상고사와 발해사 등의 영역으로 학술교류의 접촉면을 넓혀나가기로 했다. 남북 모두 미완성 상태인 '절반의 항일역사'와, 북한 젊은이들을 통해 본 '오늘의 북한'을 세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편집자주


지난 9월23일 백두산 삼지연의 광활한 침엽수림에는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이깔나무(낙엽송)의 잎이 노랗게 물들어 가는 '민족의 영산(靈山)' 한 기슭에서는 의미 깊은 모임이 열렸다. 삼지연 베개봉호텔 2층 세미나실에 내걸린 주제는 '일제의 아시아 침략과 조선민족의 반일 투쟁사 연구에 관한 국제학술토론회'.


분단 60년이 다 되도록 하나의 근.현대사에 대한 해석이 엇갈렸던 남북 및 중국 교포 학자들이 모처럼 친근하게 공유할 수 있는 주제를 택했다. 학자들은 아직은 체제와 이념이 다른 현실적인 제약을 의식한 듯 기조발언에서부터 조심스러웠다. 첨예한 갈등을 피해가기 위해서였지만 한편으로는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도 해석됐다.

"오늘은 비록 북과 남이 갈라져 있지만 역사는 반드시 제골(길)로 흘러 백두산에 근간을 둔 이 땅이 멀리 한라산 백록담에까지 다시 하나의 지맥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북측 단장 최진혁 조선사회과학자협회 중앙위 부위원장의 인사말에 남측 단장 장을병 정신문화연구원 원장은 "우리가 역사와 문화를 이야기 하는 까닭은 민족이 함께 살아갈 미래를 바라보기 때문"이라는 말로 화답했다.

이어 남측 학자들은 홍익인간과, 일본의 교과서 왜곡, 일제의 묘향산 보현사 유물 훼손 등을 주제로 비정치적 논문을 발표했고, 북측은 백두산 일대에서 전개된 김일성 주석의 항일 유격대활동의 역사적 의미와 평가에 초점을 맞췄다. 오전 8시부터 저녁 무렵까지 진행된 이날 세미나에서 남북 학자들은 단 한 사람도 자리를 뜨지 않고 시종 진지한 자세를 보였다. 남측 9개, 북측 6개, 조선족(최문식 중국 옌볜대 민족연구원장) 1개 등 모두 16편의 논문이 발표됐다.

북측 김병선 사회과학자협회 부국장은 "민족해방 투쟁에 여러 갈래의 투쟁조류들이 얼마나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투쟁을 전개했는가가 그 지위를 고찰하는 데 중요한 기준의 하나"라며 "백두산 일대 빨치산 무장투쟁은 해방된 그때까지 견지되고, 투쟁이 중단없이 지속됐다는 것이 명백하게 판명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고등외사월보'와 옛 소련의 국제정치잡지 '태평양' 등을 그 근거로 제시했다.

일본에 대한 성토는 남과 북이 따로 없었다. 북측 정치건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장은 "최근 일본의 급격한 우경화를 보면 일제의 위협이 '박제된' 역사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20세기 전반기에 감행된 일제 침략사를 다시 한번 냉정히 되돌아보면서 새세기에 그런 피의 역사가 되풀이돼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고 역설했다.

'일제하 좌우합작론의 역사적 의의'를 주제로 발표한 남측 권희영 정문연 교수는 "일제강점기 유일한 좌우합작의 중심에 위치했던 신간회와 자매단체인 근우회가 항일 투쟁 측면에서 일정한 기여를 한 점을 인정해야 한다"면서 그러나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전략을 전환함에 따라 좌우합작이 끝내 붕괴됐음을 지적하며 역사적으로 좌우합작은 상대편을 전략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로 시도될 때 그 한계가 명백한 것이 입증됐다고 주장했다.

정문연 정연순 교수는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현상과 남북공동대처방안'을 통해 남북간 초.중.고교 역사교과서 통합을 제안했다. 그는 "통합 교과서를 통해 분단 이후 남북 학생들이 서로 다른 관점에서 바라봤던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객관적, 과학적, 주체적 인식을 갖도록 유도해야 한다"면서 이를 위한 남북협의회 구성과 교사들의 공동연수, 인터넷상 홈페이지 구축 등을 제안했다.

정문연 이길상 교수는 일본과의 역사교과서 충돌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남북간 역사의식의 공유라며 일본뿐 아니라 최근 강화되는 중국의 우리 상고사 및 고대사 왜곡 현상을 지적했다.

남북 학자들의 진지한 논문발표에도 불구하고 이날 학술토론회에는 어딘가 알맹이가 빠진 듯한 인상을 남긴 게 사실이다. '학술토론회'라는 타이틀에 걸맞지 않게 공격적 문제제기와 활발한 토론이 생략된 것이다. '함께 한 과거, 함께 할 미래'라는 취지에도 불구하고 남북 학자들이 서로 자기들의 논리만 설파한 셈이다.

유영옥 경기대 교수는 "남한 학자들은 남에 관한 발표를 많이 했고, 북 학자들은 북에 관한 연구를 주로 했는데, 이를 바꿔서 연구했으면 더 많은 것을 배우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지적했다.


■'場外 토론회' 마음 연 남과 북
남북 학술회의는 엄연한 체제와 이념 차이로 치열한 토론문화가 자리잡기 힘든 한계가 있다. 이번 백두산 학술회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남북학자들은 일단 장외(場外)로 나서자 한층 자유롭고 활발한 토론을 벌여 '남북이 함께하는 역사'의 가능성을 열었다.

세미나 중간 휴식시간이나 만찬장은 물론, 1주일간 함께 한 답시기간 동안 양측 학자들은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특정 분야에서는 공감대가 이뤄지기도 했다. 북측 최진혁 부위원장과 남측 김호일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소장간의 장외 토론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민족주의 진영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자들의 항일투쟁의 간극이 화제에 오르자 최부위원장은 "우리나라 반제국주의 운동에서 민족주의운동이 공산주의보다 먼저 시작했으니 맏형이나 마찬가지"라고 정의내렸다.

김소장이 "스칼라피노 교수가 지적했듯이 우리의 항일운동은 공산주의건, 민족주의건 이념과는 상관이 없었다"고 말하자 최부위원장은 전격적인 공감을 표시했다. 그는 "어느 분의 글인지 기억이 희미하지만 '민족주의 운동은 맏형같고 공산주의 운동은 자유분방한 막내같다'고 규정한 것이 생각난다"면서 "이념적으로 대립한 것도 있고, 투쟁방법에서 차이가 있었지만 전체로서야 다같이 우리 민족을 위한 것이 아니었느냐"고 말했다.

김소장이 일제 강제연행자 42만명의 명단과 관련 공동대응을 제안하자 최부위원장은 "일제와 싸울 적에 우리가 절반 땅만 광복하자고 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라고 반문하며 맞장구를 쳤다.


■보천보.무산지구 답사
남북 학술토론회 참가자들이 묵은 삼지연 베개봉 호텔에서 양강도 보천군까지는 줄잡아 120리(48㎞)길. 해발 1,420m의 삼지연 일대 고원에 뻗은 길들은 정연하게 머리 가르마를 탄 듯 침엽수 밀림 사이로 일직선으로 내뻗었다.

길가 감자밭에는 군데군데 수확해놓은 붉은 감자가 쌓여 있었고 보천읍이 가까워지면서 마을 앞을 흐르는 가림천에는 따사로운 햇살 아래 아낙네들의 빨래하는 모습이 보였다. 북측은 세미나를 앞둔 지난 9월 21∼22일 일제 강점기 김일성 유격대의 대표적인 전적지인 보천보와 무산지구 전투현장으로 남측 학자들을 안내했다.

보천보 전투는 1937년 6월4일 밤 10시. 김일성 유격대가 조국광복회 갑산 지부 조직원들과 함께 압록강을 넘어 당시 함경북도 갑산군 혜산진 보천보 읍내를 기습한 사건이다. 국경 경비에 자신하던 일제에 엄청난 충격을 던졌다.

박영태 북한 양강도 혁명사적관 실장은 "일제 경찰 희생자는 7명에 불과했지만 이는 혼비백산한 일제 경찰이 민가에 숨어들자 인민 피해를 우려, 적극 추적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라는 마키아벨리의 말을 인용하며 "보천보 전투의 의미는 일제에 입힌 피해규모보다는 조선인이 살아 있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라고 말했다.

보천보 전투는 남측 학계에서도 의미를 인정받게 된 반면 양강도 대홍단군 무산지구에서 벌어진 전투는 남측에서 아직 '공증'되지 못한 사건이다. 백두산 천지에서 내려오다가 처음 만나는 양갈래 길에서 왼쪽으로 접어들어 비포장길 40여㎞를 달리면 대홍단군 신사동 일대가 나온다. 이 지역은 일제시대 한인 벌목노동자들이 감자와 소금, 산배추김치로 연명하며 중노동에 시달리던 한맺힌 장소다. 김일성 유격대는 39년 5월23일 일본군 부대를 나도그늘사초가 무성하게 자란 들판으로 유인, 일거에 30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뒀다. 정치적 선전효과에 치중했던 보천보와 달리 '치고 빠지는' 유격전의 위력을 입증해보인 곳이다. 북측은 전투일을 기념해 39.523m 높이의 대형 승전기념탑을 당시 전투현장 한 복판에 건립해놓았다.

최근까지 한국전쟁 때 이재민들이 모여살던 682㎢ 면적의 대홍단군은 대단위 감자 및 밀재배 단지로 육성되고 있다. 현지 안내원(강사) 이청미씨(21)는 "평양에서 2000년 1,200명의 제대군인을 보내줘서 감자 밭 개간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경향신문]|2003-10-07|08면 |45판 |특집 |기획,연재 |4055자

`우리는 이천만 인민을 불러 일으켜, 우리 힘으로 나라를 독립해야 한다' `내 고향 떠나올 때, 옷자락에 매달리며 꼭 왜놈치고 돌아오라던, 귀여운 누이동생 부탁 잊지 말자' `너와 내가 떨쳐나가 조국 광복 이룩하자'1930년대 후반기 백두산 일대에서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벌인 항일 빨치산 대원들이 나무에 써놓았다는 글들이다. 나무껍질을 벗기고 먹으로 써놓은 글은 대부분 유실됐지만 북측은 이를 화학적인 방법으로 발굴, 복원한 뒤 보관하고 있었다.

병사들이 묵었던 귀틀집 병영 안에는 '우리 모두가 공부하자, 지식은 황금보다 유력하다'는 구호가 걸려 있다.

지난 9월22일 방문한 삼지연 인근 사자봉 밀영(密營)을 비롯한 빨치산부대의 유적지에는 이같은 '구호나무'가 상당수 보존돼 있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탄생지로 성역화된 백두밀영 등에도 6각형 유리기둥 안에 약품처리 해놓은 구호나무는 심심찮게 눈에 띈다. 물론 이데올로기의 색채가 입혀진 정치구호가 주류를 이룬다. 이 구호들에 대해 "조작됐을 것"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있게 나오고 있지만 구호에 담긴 의미마저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풍찬노숙하던 독립군들의 활약상에 대해 남이건, 북이건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분단의 질곡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조차 기록에서 지워버리거나, 희미하게 처리하고 있다.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은 그렇게 과거 속에서도 완전한 화해를 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장을병 정신문화연구원 원장은 "보천보와 무산지구 전투는 비교적 중간자적 관점에서 기술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을 통해 알고 있었다"면서 "역사적 사실은 사실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국내 항일무장투쟁이 1920년 청산리전투 이후 독립운동 진영에 대한 일제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인해 사실상 중단된 상태에서 김일성유격대가 벌인 보천보 전투와 그 의미는 이미 학술적으로 검증, 평가가 끝난 사건이다.

남과 북의 역사학자들은 일본 우파의 교과서 왜곡을 비판하는 데는 같은 의견이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교과서에는 관심이 낮은 것도 사실이다. 남측에서는 작년 여름 '보천보전투'를 기록한 고등학교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하자 일부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교육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비난이 빗발치기도 했다. 남북이 공유해야 할 항일 투쟁사에서도 냉전의 그늘이 여전히 드리워진 상태임을 보여준 경우였다.

무산지구 전투는 아직까지 우리 학계에서 생소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어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도 검색할 수 없는 상태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김호일 소장은 "무산지구 전투는 이번 방북기간 처음 접했다"면서 "국내외 문헌을 뒤져 확인이 되면 학술적으로 공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북측도 '반쪽 역사'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백두산 일대 항일유적은 100% '백두산 3대장군(김일성.김정숙.김정일)'의 발자취뿐이다. 20년대까지 백두산 지역을 근거지로 삼아 여러차례 국내 진공작전을 펼쳤던 홍범도 장군의 유적지도 괄호 속에 처리됐다. 남측의 한 학자는 "역사에서 어느 한 부분만 잘라낼 수는 없다"면서 "김일성유격대의 활약도 이전 홍범도 장군을 비롯해 면면하게 이어지던 투쟁의 연장선상에서 봐야지 더욱 빛이 날 것"이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일제 강점기 종교단체 가운데 가장 적극적인 항일운동을 펼쳤던 천도교도들에 대해서도 그 흔한 기념탑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남측에선 전투지역 중심으로 기념비를 만들어놓은 동학혁명의 유적조차 단장해놓지 않았다. 북측이 생생한 기록으로 남겨놓은 천도교 함경남도 도정(道正)이었던 박인진 선생(상자기사 참조)의 경우는 예외였다.

3.1운동도 어느 지역보다 평안도와 함경도 등 북선(北鮮)지역에서 활발했지만 적어도 평양 시내에는 이를 기념하는 어떠한 유적도 없었다.

같은 사안을 놓고 해석을 달리하는 사례도 있었다. 우사 김규식박사연구회의 김재철 회장 대행은 이번 학술토론회에서 50년 9월17일 우사의 납북과정에 대해 "평화옹호대회에 참석하라는 이승엽 당시 서울시 인민위원장의 말을 듣고 길을 나섰다가 그 길로 북행하게 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북측의 한 학자는 이후 사적지 답사 과정에서 "우사가 납치된 것처럼 발표한 것은 유감"이라며 "실제로는 전황이 불안정해지면서 남측 민주인사들의 신변안전을 위해 북행을 권유했고, 본인들 의사를 좇아 모셔온 것"이라고 말했다.

김규식.조소앙 선생을 비롯한 전쟁중 납북자들은 이후 '재북 평화통일 촉진회'를 결성, 지식인으로서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을 했다는 게 북측의 주장이다. 남측 학계에선 한학의 대가였던 조소앙 선생 등 일부 납북자들이 북쪽의 조선왕조실록 번역작업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남북의 동질성은 이데올로기의 입김이 강하게 반영된 역사기록과 사적지보다는 오히려 정서적인 측면에서 찾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광복회는 작년에 이어 올해 8.15행사 때도 문화관광부측에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의 참배를 공식 요청했다. 한국전쟁 도중 북으로 간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오하영 선생 등 임시정부 요인 10여명의 묘역을 참배하기 위해서다.

남북 학자들은 백두산 천지지역을 함께 답사하며 일제가 만주사변때 백두산 정계비를 훼손함에 따라 이후 북.중간의 국경분쟁에서 우리땅을 빼앗긴 데 대해 울분을 나눴다. 하지만 '공동의 적'을 앞에 두고 정서적인 공감을 나누는 것과, 항일운동사를 비롯한 과거 역사를 정확하게 복원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김호일 소장은 "반일 반제투쟁의 이념과 정책, 사상을 떠나서 남북이 공통분모를 찾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면서 "오랫동안 헤어져 연구를 달리해온 게 사실이지만 잦은 학술교류를 통해 벽을 허물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납북인사들의 후일담처럼 정확한 기록을 교환하지 못함에 따라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면서 "그 때문이라도 잦은 학술교류를 가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北 황만청 보천보 혁명사적관 부관장
북한에도 이데올로기와 무관하게 항일운동을 한 사람의 족적은 있었다. 천도교 지도자로 많은 천도교 소속 청년들을 항일투쟁으로 이끈 고 박인진(朴寅鎭) 선생이 주인공이다. 그러나 남쪽에서는 천도교 내부 기록을 제외하면 그에 대한 공식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박선생이 현재 평양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모셔진 게 주요한 이유가 된 듯하다.

지난 9월22일 백두산 밀영 방문길에 만난 북측 황만청 보천보 혁명사적관 부관장(61)은 "박선생은 비록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일제에 항거하고 조국 광복 성전에서 높은 위업을 달성한 분"이라고 평가했다.

황부관장은 "박선생은 1930년대 후반 김일성 유격대의 항일투쟁에 적극 호응, 휘하 천도교 청년들을 대거 합류시킨 인물로 빨치산 간부급 100명의 유해만을 모셔놓는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안치돼 있다"고 소개했다.

황부관장에 따르면 박선생이 백두산 일대에서 항일유격대 활동을 하던 김일성 주석을 만난 것은 1936년 11월15일 밀영에서였다. 이 자리에서 당시 중국 장백현과 갑산, 풍산, 삼수, 혜산 등 5개 종리원(宗理院.군단위 천도교 조직)을 관할하던 박선생 휘하의 천도교 교인들과 김일성유격대의 인연은 시작된다.

황부관장은 "김주석이 이 자리에서 '천도교도들은 하늘을 믿되 민족의 하늘을 믿어야 한다'면서 항일 무장투쟁에의 동참을 권유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50대였던 박선생은 '내가 직접 산에 들어가 싸울 수는 없지만 천도교도들을 항일전선에 많이 동원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박선생은 이후 장백현 종리원대표회의를 갖고 관내 교인 및 청년들 대부분을 그해 5월5일 발족한 조국광복회에 가입시켰다. 일제 경찰의 '사상휘보'에 따르면 조국광복회는 창립 1∼2년만에 함경도와 평안도 및 만주일대 20만명의 조직원을 확보, 위협적인 무장투쟁단체로 성장했다.

황부관장은 "이중 조국광복회 함경남도 풍산.갑산.혜산지구는 순수 천도교도들로만 구성됐다"고 말했다. 박선생은 일제가 37년 10월과 38년 5월 두차례에 걸쳐 독립투사들에 대한 대규모 검거선풍을 일으켰던 '혜산사건' 당시 장백현에서 체포, 구금돼 심한 옥고를 겪은 뒤 병보석으로 출감해 39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항일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였으면서도 단지 김일성부대와 연합했다는 이유로 남측 독립운동사에선 배제되거나 축소됐다.

 

[김진호기자의 訪北 취재기]‘변화의 北韓, 오늘의 北韓’

북한의 변화는 백두산 관광의 거점인 삼지연읍에서도 이뤄지고 있었다. 남북 학술토론회와 역사유적 답사를 위해 들른 백두산 일대 곳곳에서 경제재건을 위해 부심하고 있는 흔적이 엿보였다.

백두산 관광의 거점인 삼지연읍에 위치한 베개봉호텔은 작년말부터 시작한 증축·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호텔 관계자는 “3층 건물이던 1호동(객실 48개)의 보수공사와 2호동(4층·객실 80개)의 신축공사가 연내에 마무리될 것”이라며 “공사가 완공되면 최대 245명의 손님을 투숙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삼지연읍에서 10㎞ 가량 떨어진 ‘리과수 노동자구’에는 수십채의 주택 겸 숙박용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2~3층짜리인 이 건물들은 현지 주민들의 거처뿐 아니라 관광객들의 민박 장소로도 쓰이고 있다. 민박을 할 수 있도록 취사도구와 이부자리 등이 완비돼 있었다. 이 건물들은 “외국사람들이 묵을 수 있는 수준으로 지어야 한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우선 1단계로 2000년 11월부터 삼지연읍 일대에 3,000채가 지어졌으며, 앞으로 이같은 대단위 건물들을 더 많이 지을 계획이라고 북한관리들은 설명했다.

이밖에도 삼지연에는 300명분의 객실을 보유하고 있는 ‘제1여관’과 내무반식 숙박시설 100동이 마련돼 있어 외국관광객들이 몰려와도 숙소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북측인사들은 홍보했다. 1동당 평균 200명의 숙박이 가능하다고 하니 이 시설 하나만 해도 한꺼번에 2만명의 관광객들을 소화할 수 있는 셈이다.

대표적 위락시설로는 해발 1,621m의 베개봉 한쪽 능선에 있는 스키장을 꼽을 수 있다. 이 스키장은 과거 제대로 사용되지 않다가 “국제경기를 열 수 있는 수준으로 확장하라”는 김위원장의 지시로 시설이 확충돼 사용중이다.

삼지연으로 가는 도로와 열차, 항공로도 북한 전체 수준에 비하면 꽤 잘 돼 있는 편이다. 삼지연에서 60리 떨어진 양강도 혜산까지 열차가 다니고 있고, 삼지연엔 중형 활주로가 갖춰져 있어 평양에서 비행기로 1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밀영을 비롯, 백두산 일대에 널린 혁명사적지들을 방문하는 북한 주민들을 위해 북측 당국이 일찍부터 수많은 도로를 닦아 놓아 육로 교통길도 비교적 양호하다.

주요 관광자원으로는 천혜의 비경을 자랑하는 백두산 천지와 차로 4시간 운행하는 동안 계속되는 울창한 원시림 지대, 천지 아래의 광활한 화산암 지대와 사구의 이국적 풍경, 밀영을 비롯한 혁명사적지 등을 꼽을 수 있다. 여기에 찻집이나 노래방 등 외국인 및 남측 관광객들이 필요로 하는 위락시설만 갖춘다면 백두산은 국제규모의 관광단지로 거듭날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북한 변화의 신호는 베개봉 호텔에서 근무하는 젊은 여성들의 태도에서도 묻어났다. 이 호텔 1층 기념품점에서 5년째 판매원으로 일하고 있는 정경선씨(27)는 “월급 2,500원에 판매목표 초과달성시 지급되는 성과급을 합하면 월 수입은 4,000원이 넘는다”며 “외국인들이 오면 수입이 더 늘어날 것”이라고 기대했다. 정씨의 월 소득은 북한 생산직 근로자의 평균 월 급여 2,000원의 2배가 넘는다. 정해진 업무에 정해진 급여만 받던 북한에 인센티브제가 도입된 셈이다.

2002년 도입한 ‘7·1 경제관리 개선조치’가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백두산 일대에서도 시행되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사례였다.

외부인들을 대하는 북한 당국자들의 태도도 달라지고 있었다. 기자 일행은 방북기간 동안 비교적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고, 북한 주민들과 자유로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남측 방문객마다 안내원이 따라붙고 예정된 장소 외에는 방문할 수 없도록 하던 과거에 비하면 큰 변화였다.

( 경향신문.2003-1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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