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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남측 방문단을 실은 버스 행렬이 평양~개성 간 고속도로에서 터널을 지나고 있다. 140여㎞ 구간에 18개의 터널을 지나야 한다. 물리적인 길은 이미 놓여 있다. 하지만 서울이 평양으로 가거나, 평양이 서울로 오려면 창의적인 생각의 길을 놓아야 할 것 같다.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우리도 아이들에게 좋은 옷 입히고, 좋은 신발 신기고 싶다.” 


2005년 7월 북측이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서울에서 열렸던 제10차 경제협력추진위(경추위) 회담장에서다. 북측은 지하자원 개발 투자를 보장하고 광산물을 제공할 테니, 남측이 경공업 원자재를 제공해달라고 제안했다. 평양 방문길에 누구나 아이들의 남루한 입성을 보던 시절이었다. 북측의 안타까움이 밴 말이자, 민생경제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북측은 그동안 남측이 해외에서 수입하는 광산물을 조사했다면서 그중 아연·마그네사이트·인회석 정광·석탄 등 5가지 광물의 제공을 약속했다. 남측이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이른바 서로 갖고 있는 것을 융통해 부족한 것을 채우자는 유무상통(有無相通) 거래가 실현됐다. 개성공단 개발이나 철도·도로 연결과 같은 메가 프로젝트보다 의미 있는 관계맺기 방식이었다고 본다.


그 이듬해부터 남측은 의류·신발·비누의 원자재를 넘겨주었고, 북측은 그중 3%에 해당하는 아연괴를 먼저 건넸다. 나머지는 5년 거치 10년 상환을 하기로 하고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사업 자체가 중단됐다. 


지난 10일부터 18일까지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열린 제4회 아리스포츠컵 15세 이하 유소년 축구대회를 계기로 열흘간 평양을 다녀왔다. 뜬금없이 13년 전 경추위 합의를 떠올린 것은 평양을 돌아보면서 뇌리를 떠나지 않은 의문 때문이다. 


평양~개성 고속도로 중간쯤 은정휴게서 앞마당에서 본 황해북도 서흥군의 풍경. 옥수수가 익어가고 있다.  서흥군은 사과산지로 구릉지역에 과수원도 많이 보였다. 들판 풍경에 카메라를 대자 30대 중반의 북측 보장성원은 "뭐, 찍을 꺼리가 있습니까"라며 의아해 했다. "남측에 계신 어르신들 중 서흥군을 고향을 두신 분들은 이 평범한 사진 한 장만으로 아련한 향수를 달래시지 않겠나"라고 답해주었다. 그도, 나도 짐작만 할 뿐 겪어보진 실향의 아픔이 아니겠는가. 김진호국제전문기자


평양은 ‘표정’과 ‘풍경’이 모두 바뀌었다. 표정에선 미래에 대한 낙관과 자신감이 읽혔다. 깔끔해진 입성과 현대식 고층빌딩, 많은 자동차가 굴러다니는 도로…. 적어도 도시의 외관은 놀랍게 바뀌었다. 북은 그리 변했는데 남도 변했을까. 태극기 집회로 상징되는, 더욱 심해진 보혁 갈등 문제는 차치하자. 북측과의 화해·협력을 주장하는 분들만 보아도 그리 변한 것 같지 않아서 하는 말이다.


북측은 과거 그토록 갈구하던 경공업 부문 발전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대부분 김정은 국무위원장 집권 6년 동안 이룬 변화다. 남측의 도움 없이 옷과 신발은 물론, 식료품 등 인민생활에 필요한 기초 물품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평양의 밤거리는 더 이상 암흑이 아니다. 불 밝힌 매대가 북적이고 새 자동차들이 다닌다. 평양 시내 곳곳에 나붙은 ‘인민경제의 주체성’이란 구호가 빈말로 읽히지 않았다. 김 위원장은 북핵 대치국면을 대화국면으로 돌려놓기 바쁘게 화장품 공장으로 발전소로 뛰어다니며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발품을 팔고 있다. 


과거 북측이 아쉬웠던 필요의 상당 부분을 자력 해결하고 있는 지금, 남북관계는 어떻게 진화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남측의 역할은 무엇일까. 이번 방북길에 갖게 된 의문이다.


생활수준의 변화는 많은 것을 바꾼다. 10여년 전 평양에서 만났던 북측 보장성원(안내원)에게 세대주(가장)의 권위를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아무리 밤늦게 귀가해도 마누라가 기다리지 않고 누워 있으면 옆구리를 차서라도 밥상을 차려오게 한다”고 말했다. ‘아니, 밖에서 밥 잘 먹고 왜 또 상을 차리라 하나’라고 물으니 “그래도 세대주가 숟가락을 한번 들어야 집안에 질서가 잡힌다”고 답했다. 북측의 가정 내 여성인권 수준을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이 역시 과거지사일지 모른다. 


곳곳 ‘인민경제의 주체성’ 구호 
경공업 발전 기본물품 현대화
남측 의존 않고 자력 해결 수준 

북, 제재 뚫고 변화 견인 자신감

인도적 지원·개발 ·대북사업 등

 
9년 ‘교류 공백 메우기’ 매몰돼남측, 방법론 한계 경제 치우쳐 

북측 가르치려 착각 빠지기도


30대 보장성원 대부분 자녀 1명 
남측 인구 감소 해결 발상 ‘무색’


방북단과 일정을 같이한 10명 남짓한 북측 보장성원들 중 30대 남녀는 대부분 아이가 1명이었다. 한 보장성원은 “하나 더 낳고 싶기는 한데 첫애 가졌을 때 처가 입덧으로 고생한 걸 생각하면 아득하다”면서 가능성을 낮게 잡았다. 성장한 두 자녀를 둔 50대 초반의 한 여성은 “우리 때만 해도 아이 셋은 나야 한다고 교양받았는데 이제는 대부분 1명”이라면서 “집안에서 세대주의 위치도 많이 달라졌다”고 귀띔했다. 남측의 프리즘으로 북측을 보면 허방을 짚기 십상이다. 남측의 인구감소 문제 역시 북측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발상도 수정이 필요한 것 같다. 


평양~개성 고속도로 위에 설치된 온정휴게소. 지난 18일 귀로에 휴게소에 들른 남측 방문단을 상대로 북측 봉사원들이 야외 매대에서 잡화류를 팔고 있다.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적지 않은 분들이 끊어진 남북관계를 다시 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맞다. 하지만 방법론으로 들어가면 곧 상상력의 한계를 드러낸다. 많은 경우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 동안의 공백을 메우는 일에 매몰돼 있다. 대표적인 착각이 북측을 가르치겠다는 생각이다. 인도적 지원 또는 개발지원에 나서려는 분들이나 대북사업을 희망하는 기업인들까지 갖고 있는 생각이다. 환상에 가깝다.


지난 60여년 동안 미국과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으면서 이 정도 변화를 이끌어낸 북측이 수긍할까. 이번에 만난 북측 인사들은 대부분 “어차피 제재하에서 자력으로 발전해왔다. 제재를 풀건, 풀지 않건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물론 현재 누리는 생활수준이 흔들린다면 북측 사회에 위기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제재하에서도 로켓을 대기권에 성공적으로 올려놓고, 인민경제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북측이다. 과거처럼 식량·비료를 대량으로 지원하거나, 눈앞에서 현금다발 흔들면 따라올 것이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박흥렬 남북교류협력지원협회 고문은 “과거엔 경제 분야가 우리의 레버리지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유효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해부터 북측 인사들과 대화를 나눠온 정치학자는 “우리가 가르친다는 생각을 북쪽은 수용하지 않는다. 자기들 모델을 찾고 있다. 외부에 의존한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고 단언했다. 북측은 과거처럼 외부의 일방적 지원에 기대려는 생각을 버렸다는 말이다. 북은 남을 넘어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인민경제 발전에 그치지 않고 국가경제를 단번에 도약시키기 위해선 지원이 아닌 투자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라는 말이다. 핵을 파는 것이 아니라, 핵을 버림으로서 더 큰 기회를 바라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물론 북측 사회가 현재의 경제적 성공을 유지하면서 더 큰 성공을 이루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당장 옆걸음질을 하고 있는 비핵화와 체제보장 협상이 가닥을 잡아야 한다. 가닥을 잡더라도 이행 과정에서 굴곡이 없을 수 없다. 핵을 놓고 극한대치했던 작년 상황이 반복될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하지만 일단 방향을 잡은 북한의 진화는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촬영해 제모습을 담지 못했다. 지난 18일 평양~개성 고속도로 상에서 본 황해북도 금천군 중심부. 다리 난간 밑으로 흐르는 강이 예성강이다.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혁명 또는 혁명적 변화는 잃을 게 없는 상태에서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조금이라도 물질생활의 편의에 익숙해지면 더 많은 것을 기대하기 마련이고, 현 수준이 떨어진다면 저항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편의를 지속적으로 공급해주려는 게 김정은 위원장의 우선순위일 게다. 지난해 전쟁 직전까지 갔던 한반도 상황이 올 들어 대화국면으로 전환한 배경을 두고 “북의 변화, 특히 경제적 변화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기 때문”이라고 보는 많은 전문가들의 분석은 틀리지 않다고 본다. 하지만, 그다음 북측과 관계맺는 방식은 미지의 영역이다. 


서울에서 평양 가는 길 못지않게, 평양에서 서울 오는 길 역시 녹록지 않다.

평양 체류 사흘째인 지난 12일 저녁. 숙소인 양각도 호텔 로비에 삼삼오오 모여 있던 북측 보장성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진 한 장 때문이었다. 


남측 방북단이 전날 김일성 주석 생가인 만경대 고향집을 다녀오던 길, 작은 공사현장을 지나면서 군인 또는 보안원 두세 명이 웃옷을 벗고 작업하는 현장이 있었던 것 같다. 하필 그 장면을 누군가 찍어 남측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것이 화근이 됐다. 북측 안내원들이 남측 대표단을 상대로 심각하게 문제 삼지는 않았다. 하지만 좌불안석의 안색이 역력했다. 


한 보장성원은 “사진을 찍힌 사람들 입장에서 생각해달라. 기분이 좋았겠나. 너무 더워서 잠시 웃옷을 벗고 일하는 장면이 만방에 공개됐는데…”라며 분을 삭였다. “그 시간에 지나간 버스행렬이 남측 방문단 버스들밖에 없었기에 해당 조직에서 항의를 해왔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소동은 북측의 별다른 조치 없이 끝났다. 남측의 5060 이상 세대는 그 기분을 경험한 세대다.


양각도 호텔에서 바라 본 평양시내. 양의 뿔을 닮은 형상이라고 하여 양각도라는 이름을 붙였다.


1980년대 초까지 서울을 방문한 외신기자들은 하필 판자촌이나 종로 뒷골목 등 구질구질한 광경을 콕 집어 소개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과민반응 아닐까. 한 북측 동료에게 “왜 그러는지 이해한다. 하지만 그런(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시기도 지나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상대는 수긍하기 어려워 보였다. 그 때문이었는지 방북 첫날부터 사진촬영을 제지하는 정도가 강했다. 과거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발전할수록 더욱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려는 강박관념이 커졌는지도 모른다.


상점 점원은 무료한 시간 손전화로 영화를 보고, 젊은 보장성원은 버스 이동 중 기자의 질문에 정확한 답을 주기 위해 손전화로 사전을 검색했다. 컴퓨터 통신이 생활의 일부분이 됐다. 인터넷이 아닌, 인트라넷일 뿐이다. 포털사이트 광명망은 내부에서만 유효하다. 찻집이나 안경점에서도 범용 전자결제카드 ‘나래’를 10분 만에 뚝딱 만들어준다. 양각도 호텔 바텐더부터 유소년 축구대회 조직위 젊은 구성원까지 유럽 프로축구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북측 인사들에겐 어떤 질문을 던져도 같은 답이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평양교원대학의 교수법이 북유럽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냐’고 묻거나 ‘핵 문제 해결되고 경제발전하면 중국처럼 당의 통제 속 개방이 되지 않겠나’라고 물어도 각각 “우리식이다. 우리식대로 간다”는 답이 돌아왔다.


지난 18일 남측 방문단을 실은 버스 행렬이 평양~개성 간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 황해북도 서흥군을 지나 금천군으로 향해 가는 길이다.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공식 환율이 1달러당 100원이지만, 장마당에선 몇 천원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지자 그전까지 축구 이야기를 화제로 유쾌한 대화를 나누던 호텔 봉사원은 대뜸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더니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십쇼. 욕먹습니다”라면서 “그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라고 못 박았다. 호텔 봉사원들에게 주 52시간은 없었다. 호텔 방문객이 많을 때는 퇴근도 하지 않고 호텔에서 잠을 자며 하루 12시간 이상 일을 한다. 그러면서도 활기가 넘치고, 대단히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사회 전체가 자본주의의 요소를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부인하는 이중성이 전환기 평양 사람들에게서 감지됐다. '우리식'의 내용은 아직 채워지지 않았지만, 그 틀은 갖춰가는 것 같았다. 10여년 만의 방북이었지만 평양만 네 번째였다. 그럼에도 유독 이번에는 북측을 읽기 어려웠다. 기자 역시 평양의 경제적 낙후성에 못 박혔던 고정관념 탓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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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8241651005&code=970100&sat_menu=A074#csidx5435d4ef7b72d88a6de5666426aa0c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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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df 2019.01.17 15: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0여년 만의 방북이었지만 평양만 네 번째였다. 그럼에도 유독 이번에는 북측을 읽기 어려웠다. 기자 역시 평양의 경제적 낙후성에 못 박혔던 고정관념 탓이 아니었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