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리포트 김진호 특파원
워싱턴에서 포토맥강을 건너 남쪽으로 40여분 거리에 있는 ‘마운트 버논’은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생가다. 미국 혁명의 역사 박물관이기도 하다. 생가 현관의 왼쪽 벽에는 큼지막한 열쇠가 걸려 있다. 프랑스 대혁명 때 무너진 파리 바스티유 감옥의 서쪽 정문 열쇠로, 미국 혁명 전쟁에 참전했던 라파예트 장군이 워싱턴에게 선물한 것이다. 미국 사회를 지켜보면서 종종 떠올리게 되는 열쇠다.
열쇠 선물이 상징하듯 봉건 전제주의의 성채를 깬 프랑스 대혁명은 그보다 13년 전에 있었던 미국 혁명에 빚을 지고 있다. 18세기 말 미국은 분명 세계 자유민주주의의 큰형이었다. 하지만 이후 미국과 프랑스가 걸어온 길은 사뭇 다르다. 미국 혁명이나 프랑스 대혁명이나 다같이 절대왕정에 대한 상공인 등 중산계급의 저항이었다. 그 결과 두 나라 사람들은 자유를 얻었다. 미국이 일회성 혁명으로 그친 반면 프랑스는 대혁명 이후에도 두 번의 혁명을 더 겪었다. 특히 7월 혁명으로 등장한 왕정을 뒤엎은 2월 혁명에서 비로소 평등을 배우기 시작했다. 대혁명 59년 만이다.
뜬금없이 역사 책을 꺼낸 이유는 의료보험 개혁을 둘러싸고 미국 내에서 벌어지는 웃지 못할 현상 때문이다. 자유, 특히 납세자의 자유와 비즈니스 업계의 자유는 비대하고 평등은 삐쩍 말랐다. 흥미로운 것은 버락 오바마를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파시스트, 나치와 동일시하는 흑색선전이 상당부분 먹혀들고 있다는 점이다. 공화당 전국위원회(RNC) 모임에서 민주당의 개혁안을 채택하면 공화당원들이 제대로 진료를 받지 못한다는 담론까지 나오는 걸 보면 확실히 정상이 아니다.
선진 민주주의 국가로 알고 있던 미국 사회의 터무니없는 모순이 궁금하던 차에 떠오른 것이 ‘마운트 버논’의 열쇠였다. 미국은 평등을 배울 기회가 없었던 게 아닐까. 미국은 제2, 제3의 혁명 대신 남북전쟁을 겪었다. 그 결과 북쪽 양키들에게 굴복당한 남부 딕시랜드(Dixieland·미 동남부)에는 좌절과 증오, 뒤틀린 인종차별의 유전자가 남아 있다. 오바마의 의회 연설 도중에 “거짓말이야”를 외친 공화당의 조 윌슨 하원의원이 사우스 캐롤라이나 출신인 건 우연이 아닌 듯하다. 전쟁 중 남부군의 깃발을 주 의사당에 게양하자는 운동을 하고 있다는 윌슨은 전형적인 남부인이다. 다른 남부인인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인종주의”라고 꼬집은 이유이기도 하다. 미국에도 합리적인 보수 정치인들은 많다. 하지만 중도 좌파와 중도 우파의 공존에서 통합의 길을 찾은 프랑스에서는 ‘극우 꼴통’으로 격리될 사람들이 엄연한 주류 정치인으로 행세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미국 사회의 이런 갈등은 어딘지 낯설지 않다. 특히 공화당과 보수성향의 정치인들이 휘발유를 붓는 매도의 방식이 친숙하다. 2002년 한국 대선에서도 빨갱이 논란이 있지 않았던가. 그 레퍼토리가 시들해지자 최근엔 친북, 반북 논란이 신상품으로 등장했다. 어떤 경우건 문제 해결과 상관 없이 막연한 증오의 병균을 퍼뜨린다는 점에서는 사촌이다. 미국 정치에서 못된 버릇만 직수입해와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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